인류가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언어를 가지게 된 것은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아득한 옛날이었다. 이에 대하여 눈으로 볼 수 있는 기호로 언어를 적는 방법을 발달시킨 것은 지금으로부터 5천년 전쯤의 일이다. 가장 일찍 사용된 문자는 수메르인의 쐐기문자, 이집트인의 神聖문자, 그리고 중국인의 한자였다. 이 세 문자에서 오늘날 인류가 사용하고 있는 대부분의 문자가 유래하였다.
문자는 그림으로부터 발달하였다. 이것은 繪畵文字라 부르기도 하나 엄밀한 의미에서는 문자라고 할 수 없다. 기호들이 언어의 어떤 단위(의미의 단위 또는 음운의 단위)를 나타내는 것이어야 문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문자는 크게 둘로 나뉜다. 첫째는 表意文字(ideograph) 또는 表語文字(logograph)요, 둘째는 表音文字(phonograph)다. 표음문자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그 하나는 음절을 표기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음소를 표기하는 것인데, 나중 체계는 알파벳(Alphabet)이라 불리고 있다. 이집트문자는 표어문자와 음절문자가 복합된 것이었는데 페니키아인은 기원전 2천년 경에 이것을 받아 쓰다가 알파벳으로 탈바꿈하였고, 이것이 희랍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 알파벳이 그 뒤 구라파에 퍼져 오늘날 세계의 대표적 문자체계가 되었다.
넓게는 세계 문자들 중에서, 좁게는 동아시아 문자들 중에서 정음이 차지하는 위치는 어떤 것인가. 첫째로 그 독립성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정음은 한자문화권에서 만들어진 유일한 음소문자이며 그러면서도 알파벳의 세계에서도 그 어느 계통에도 속하지 않는 매우 특이한 존재다. 실상 정음과 같이 한 개인이 독창적으로 만든 문자로서 성공을 거둔 것은 그 유례를 찾기 어렵다. 둘째로 그 과학성을 들 수 있다. 정음은 국어의 음소를 하나씩의 기호로 나타내는데 그치지 않고 그 음소들의 발음 특징을 기호로 나타내고 있다. 가령 로마문자의 ‘M’은 본래 물(水)을 의미하는 표어문자에서 발달한 것으로 그 음소와는 아무런 본질적인 관계가 없는데, 정음의 ‘ㅁ’은 이 음소가 발음되는 입의 모양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정음은 독창적이고 과학적으로 만들어진 세계 유일의 문자체계인 것이다. 그런데 이 사실은 오랫동안 세계 학계의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우리 나라 학자들이≪훈민정음≫(해례본) 출현 이후에 더욱 확신을 가지고 정음의 우수성을 주장했을 때, 국제 언어학계와 문자학계는 편협한 민족주의의 외침으로 밖에 여기지 않았다. 이런 냉소적 태도가 지난 60년대에 와서 바뀌게 되었다. 네덜란드의 포스가 영어로 쓴 논문에서 우리 나라 학자들의 주장을 소개하면서 한글을 “세계에서 가장 좋은 알파벳”이라고 소개하였고,154) Frits Vos, Korean Writing:Idu and Han'gŭl. (Papers of the CIC Far Eastern Language Institute, University of Michigan, Ed. by J.K. Yamagiwa. Ann Arbor, 1964). 이 논문이 든 책의 서평을 쓰면서 미국의 맥콜리가 이 말이 조금도 과장이 아님을 확인 한 것이 계기가 되어,155) James D. McCawley, Review of Yamagiwa 1964 (Language 42, 1968). 정음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갑자기 번지기 시작한 것이다.
최근 영국의 샘슨은 그의 저서에서 일반 알파벳체계와는 따로 한글을 위하여 새로이 資質體系(featural system)를 세워 논한 바 있다.156) Geoffrey Sampson, Writing Systems:A Linguistic Introduction(London, 1985). 우리 나라 학자들도 한글이 범상한 알파벳과는 다름을 느껴 왔었는데, 샘슨은 이 다름을 분명히 이론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그의 자질체계는 정음 창제에 보인 加畫의 원리를 특히 중시한 것으로 한글의 과학성의 일면만을 포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글의 과학성을 포괄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새로운 체계가 필요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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