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시의 성립과 확산, 화폐경제의 새로운 발달 등 유통경제의 활성화로 상업이윤을 추구하는 경향이 두드러지자 적지 않은 농민들이 상인으로 전화하였다. 농민들이 상인으로 전화하여 가는 추세는 특히 지방장시의 발전에 의하여 더욱 촉진되었다. 지방에서 장이 늘어나는 데 따라 농민층의 생산활동은 이와 연계되는 정도가 깊어져 갔고 상공인구도 늘어 갔다. 한편 도시상업이 성장함에 따라 도시주변 농민들이 상인으로 전화하는 일도 많아졌다. 이렇게 해서 상인의 숫자는 예전보다 배에 이른다고 할 만큼 현저히 늘어났다.140)≪中宗實錄≫권 30, 중종 12년 11월 무술.
홍희유, 앞의 책, 146쪽 참조. 서울 주변의 여러 읍민 중에는 전토를 팔거나 다른 사람에게 대여하여 병작을 맡기고 서울로 들어와 상업에 나서는 이들도 늘어 갔다.141)≪中宗實錄≫권 52, 중종 19년 10월 계사. “本에 힘쓰는 자는 적고 末을 좇는 자는 많다”142)≪中宗實錄≫권 8, 중종 4년 6월 갑자.라거나 “末은 더욱 많아지고 食은 더욱 적어진다”143)≪明宗實錄≫권 5, 명종 2년 2월 기축.라고 하듯이 상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증가하는 것은 농업이 이득이 적고 상업은 이익이 많은 데서 오는 당연한 추세였다.144)≪中宗實錄≫권 33, 중종 13년 5월 병인.
이처럼 상업에 투신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상업을 겸하는 인구가 늘어나는 것은, 상업이득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점이 중요한 요인이지만, 농민층 분화에서 비롯되는 측면도 적지 않았다. 장시를 통해 직접 생산자가 이득을 취하게 되자, 농촌사회 내부에서는 장시에서 판매할 것을 목적으로 물품을 생산하는 추세가 진전되어 갔다. 이런 상황에서 농민·수공업자들 중에는 각기 좀더 이득을 얻고자, 점차 원료작물을 전문적으로 재배하고 물품의 생산규모를 증대시키는 방향에서 경영을 추진하여 가는 이들이 늘어 갔다. 그리고 이 과정이 점차 경쟁적으로 진행되면서는, 이들 직접생산자 서로간의 분화·분해도 갈수록 커져 갔다. 이를 배경으로 아예 상업으로 전신하는 이들도 더욱더 배출되었다. 이것은 말업인구의 증가로 나타난 농민층 분화의 양상이었다. 이 시기 농민층 분화는 기본적으로는 지주제가 확대됨에 따라 한편으로 토지를 겸병하고 다른 한편으로 토지를 상실하는 대립적인 사정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장시와 관련한 농업경영을 통해서도 농민층 분화가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145) 李景植, 앞의 글(1987), 59쪽.
장시와 결부되어 농민들의 교역활동이 성행하고, 상업으로 전업하는 일과 같은 현상들이 광범위하게 일어나자 정부에서는 이러한 사태를 매우 우려하였다. 따라서 장시는 초반에는 금령대로 일단 폐지되었다. 그러나 이는 잠시뿐이었다. 정부에서도 곧 그 필요성을 부분적이나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시가 출현한 지 10여 년이 지난 성종 18년(1487) 무렵에 오면 정부 특히 국왕의 자세가 바뀌고 있었다.146)≪成宗實錄≫권 204, 성종 18년 6월 무자. 이 무렵에 와서는 ‘捨本逐末’이니 ‘物價騰踊’이니 하는 폐해보다는 오히려 흉황에 유익하고 有無를 교역한다는 기능을 더 중시하는 데로 바뀌고 있었다. 즉 정부의 억말책에 변화가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나 단순히 흉황에 도움이 된다는 점만으로 정부의 인식이 바뀔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 시기 농민층 분화가 점차 심화하여 농민의 몰락·도산이 가속화하면서 도적도 성행하고 피역농민도 늘어나고 있었는데, 이들은 장시를 새로운 활동처의 하나로 활용하고 있었다. 농민의 도산, 도적의 성행은 지주제의 발달, 부역제의 모순 등 사회경제 체제상에서 야기되는 농민층 분화의 한 양상이었다. 이 체제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정부는 이들 몰락농민, 도산농민의 생계를 어떤 식으로든 유지하도록 도와주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이런 사태에 대하여 여러 가지 방책을 강구하고 있던 정부로서는 장시가 이들을 추스릴 수 있는 방편이 될 수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이러한 사정에서 정부의 억말책에도 변화가 나타났던 것이다. 장시의 보급·확산에 대해, 조정내에서 금지안이 틈틈이 제기되는 속에서도, 중종대에는 새로 세워진 장시만 폐지하자는 의견으로 좁혀지더니, 명종·선조대에는 출시일을 같게 하자는 데로 방침이 변경되었다. 조선정부의 억말책은 쇠퇴하고 있었다.
무본억말책이란 국가권력 및 양반지배층이 유통경제의 독점을 유지하기 위해 내세운 상징적인 정책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그 속에서 장시는 출현하였고 또 성장하면서 마침내는 이러한 장벽을 무력하게 하였던 것이다. 결국 이는 지배층 일부에서 여전히 장시금지책의 유지를 강경하게 요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농민교역이 성장하고 물자유통이 활발하여지는 사회경제적 조건의 변화에 처하여 왕이나 정부관료들이 장시금지라는 종전의 정책을 변경시키지 않을 수 없었음을 말하는 것이었다.147) 李景植, 앞의 글(1987), 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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