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4. 군역제도의 붕괴
  • 2) 갑사·정병·수군 군역의 변질
  • (3) 보정병과 수군의 역졸화

(3) 보정병과 수군의 역졸화

양인 농민의 의무 군역인 정병은 騎兵과 步兵으로 병종이 구분되었다. 기병과 보병은 같은 정병에 속했지만 이들에 대한 국가의 대우는 현저히 달랐다. 기병은 보인을 3명 지급받았음에 비해 보병은 2명을 받았고, 보병의 역은 기병보다 훨씬 고된 것이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기병은 16세기를 거치면서 점차적으로 보군으로 변해갔지만 번상보병은 이미 15세기말부터 군사라기보다는 役軍·役卒로 변하였다. 이에 성종 4년(1473) 大司諫 鄭佸의 상소에서 “이른바 보병이라 하는 자들은 서울에 올라오면 모두 토목공사에 동원되어 한 사람이라도 시위하는 자가 없다. 이들은 이름은 병사이지만 실은 역졸이다”221)≪成宗實錄≫권 35, 성종 4년 10월 경신.라고 하였다.

16세기에는 농업경제의 변동과 상품유통의 발달 속에서 사치풍조가 만연하면서 지배층들은 궁궐·저택들을 광대하게 짓는 등 토목공사가 급증하였다.222) 16세기의 사회 경향에 대해서는 다음 글이 참조된다.
李泰鎭,<16세기 韓國史의 理解 방향>(≪韓國社會史硏究≫, 지식산업사, 1986).
韓相權,<16世紀 對中國 私貿易의 展開-銀貿易을 중심으로->(≪金哲埈博士華甲紀念 史學論叢≫, 知識産業社, 1983).
원래 토목공사는 급료를 지급받는 시취 군인인 彭排와 隊卒이 담당하였다. 앞의<표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팽배는 정원이 5천 명이고, 대졸은 정원이 3천 명인데 그들은 遞兒給料를 받고 근무하였다. 그러나 성종 5년에 팽배·대졸은 정원의 반도 되지 않았으며, 성종 24년에는 실제 번상 인원이 每番에 팽배 200∼300명, 대졸 40∼50명에 불과하였다.223)≪成宗實錄≫권 44, 성종 5년 윤6월 경자 및 권 277, 성종 27년 5월 병술.
李載龒, 앞의 책, 143쪽.
그리고 명종 5년(1550)에 이르러서는 “팽배와 대졸 중 남아 있는 자가 거의 없다”224)≪明宗實錄≫권 10, 명종 5년 10월 임오.라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되자 이들 대신 보병과 수군들이 토목공사에 동원되어 역졸화하였다. 그래서 보병은 기병과 같이 군장을 갖출 필요도 없었고, 정부 역시 군장 點閱을 하지 않았다. “군사를 쓸 때 보병은 무기도 지니지 않았으니 제외한다”225)≪成宗實錄≫권 278, 성종 24년 윤5월 기미.라고 하여 보병은 아예 군사력으로 간주하지도 않는 실정이었다.

사실 보병은 입번하는 기간에 관에 매여 있는 상역자였으므로, 昇平이 오랜 시기에 이들이 역졸화되는 것은 당연한 추세이기도 했다. 하지만 보병이 이렇게 역졸화하기는 하였으나 요역과는 명확히 구분되었다. 요역은 민호를 대상으로 하여 민간의 노동력을 징발하는 戶役이었지만, 군역은 특정한 人身을 대상으로 특정한 역을 부과하는 身役이었다.226) 尹用出,<15·16세기의 徭役制>(≪釜大史學≫10, 1986).

16세기에 들어와서는 요역에 의해 징발되는 煙戶軍보다도 보병을 각종 役事에 우선적으로 동원시키고 있었다. “축성을 할 때 마땅히 當番步兵을 쓰고, 그것이 부족하면 연호군을 쓴다”227)≪中宗實錄≫권 40, 중종 15년 윤8월 병오.라는 말처럼 축성할 때는 당연히 당번보병을 동원하였다. 이것은 요역에 의해 징발되는 연호군은 단기간에만 입역하였으므로,228)≪經國大典≫권 2, 戶典 徭役條에는 ‘凡田八結出一夫 一歲不過役六日’이라 하여 연간 사역 일수를 6일로 정하고 있다. 공사기간이 긴 역사에는 군인을 동원하는 것이 번거롭지 않고 보다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당번보병은 각종 토목공사에 동원되었을 뿐만 아니라, 병조나 도총부·승정원 등 각 사의 伺候使令으로도 끌려다녔다. 원래 각 사의 사후사령으로서 皂隷와 羅將이 책정되어 있었으나,229) 姜萬吉,<朝鮮後期雇立制發達>(≪世林韓國學論叢≫1, 1977). 조예와 나장이 피역 저항함으로써 수가 부족함에 따라 보병으로 충당하였던 것이다.

한편 양인 농민의 또 하나의 의무군역인 水軍은 조선 초기부터 여러 가지 역사에 동원되었다.230) 수군에 대해서는 아래의 글이 참고된다.
李載龒,<朝鮮初期의 水軍>(≪朝鮮初期社會構造硏究≫, 一潮閣, 1984).
方相鉉,≪朝鮮初期 水軍制度≫(民族文化社, 1991).
≪경국대전≫에서 수군으로 명명되기까지 이들은 일반적으로 騎船軍 또는 船軍으로 불렸다. 수군은 屯田耕作, 燔鹽, 해산물 채취, 병선 제작과 수리, 선내 필수품 제작, 공물·진상의 備納 그리고 漕運 등에 동원되었다. 이것은 수군들의 선상방어 임무와 더불어 신역으로 담당해야 하는 일이었다. 이것은 무척 苦役이어서 수군역을 기피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 이외에 원칙적으로 수군의 역사 동원은 면제되어 있었다. 그러나 세종 16년(1434) 工曹參議 張友良은 “築城·營繕 등의 工役에 감사가 주현마다 몇 명씩 差定하면 수령은 부득이 船軍戶에까지 그 차정을 명하여, 아들은 騎船하는데 아버지는 다른 일에 사역되고, 아우는 당번인데 형은 다른 일에 부역하는 일이 종종 있다”231)≪世宗實錄≫권 64, 세종 16년 4월 무진.라고 하였다. 또 세종 21년에는 “근래에 태평이 오래되어 舟楫諸緣 및 營田·번염 외에 무릇 民戶가 천시하며 싫어하는 역사는 모두 선군에게 맡겨 선군은 그 무거운 역을 이기지 못하여 여러 방면으로 謀避한다”232)≪世宗實錄≫권 86, 세종 21년 7월 병인.라는 실정이었다.

수군의 역사 동원은 성종초 보병이 역군화되면서 더욱 심해졌다. 이들의 역사 동원은 보병처럼 서울의 土木營繕에 가장 많이 동원되었다. 서울의 토목영선에 동원된 군사 중에서도 경기 수군의 동원이 번상보병보다 자주 있었으며, 심지어 下番의 수군에게도 소위 ‘引番’으로 동원되는 폐단까지 있었다. 이와 같이 수군의 동원이 잦아지자 수군의 留防者는 겨우 1/10∼2/10에 불과하였다고 한다.233)≪成宗實錄≫권 280, 성종 24년 7월 경술. 서울의 토목공사에 동원되는 수군은 주로 경기 수군이었지만, 때로는 황해·충청·강원도의 수군이 동원되기도 하였다. 또 각 지방마다 그 지방의 여러 토목공사와 영선에 수군이 동원되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수군은 군역 중 가장 고역이어서 정병보다 앞서 代立과 放軍收布의 폐해를 초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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