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26년(1593) 정월 상순 조·명연합군이 평양을 수복한 후 제독 이여송 은 그 동안 전투에서 입은 명군의 손실이나 조선이 전담하고 있던 군량의 지원능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급히 임진강을 넘어 서울수복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정월 중순 碧蹄館 礪石嶺전투에서 참패하자, 그는 왜군의 전력을 과대하게 평가하고 작전상 일시 후퇴론을 주장하여 휘하의 주 병력을 평양으로 회군시켜 사실상 서울수복전을 포기하고 왜군과의 전투를 기피하였다.
왜군은 평양패전 후 서울에 집결하였지만 개전 당시 병력의 3, 4할을 전투·기아·질병으로 소모하여 실전의 수행능력을 거의 상실하고 있었다.102) 崔永禧,<壬辰倭亂의 再照明>(≪國史館論叢≫30, 國史編纂委員會, 1991), 165쪽. 그러나 왜군은 여석령전투의 승세를 틈타 2월 중순 全羅道巡察使 權慄의 부대가 명군의 서울수복전을 돕기 위해서 포진하고 있던 幸州山城을 사력을 다해 공격하였지만 대패당하고 전의까지 잃고 있었다.
특히 서울에 총집결한 왜군은 이제 서울의 인근지역에서 군량조달을 위한 약탈 대상조차 찾아내기 어려워 심각한 군량난에 봉착하게 되었으므로, 왜군지휘부는 서울에서 철수할 것을 결정하고 豊臣秀吉(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허락까지 받았다. 그러므로 왜군은 철군할 때 조·명군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서 조·명측과의 협상을 원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다.103) 金錫禧,<壬辰亂中의 講和交涉에 對한 小考>(≪文理大學報≫9, 釜山大, 1966), 21∼24 쪽.
경략 송응창은 提督府가 대왜전을 회피하면서 명군의 철수론까지 제기하자, 임진강을 지키던 부총병 査大受에게 서울의 적정을 정탐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사대수는 3월 상순 조선인 通事를 대동한 家丁들을 서울에 잠입시켰다.
이 때 소서행장은 명군과 교섭의 단서를 열고자 승려 玄蘇로 하여금 조선인 통사 등을 용산에서 접촉케 하였다. 현소는 이들 편에 명군과 조선의 禮曹 앞으로 강화 요청서를 각각 보내는 한편, 이와는 별도로 忠淸水使 丁傑 앞으로도 같은 내용의 글을 보내왔다. 그러나 都體察使 柳成龍이 정걸 앞으로 보내진 글마저 조정에 전달하지 않고 사대수에게 보냈으므로 이 모든 서장은 사대수의 손을 거쳐 평양의 명군측에게 전달되어 조선조정은 왜군의 뜻을 알지 못하게 되었고 이여송만이 일본이 강화하려는 뜻을 알게 되었으므로 비밀히 그들과 교섭할 것을 송응창에게 건의하였던 것이다.
송응창은 이여송 등의 주장에 따라 서울의 왜군이 전투를 계속할 수 없었던 사정을 알아보려고 하지 않은 채 독자적인 판단에서 대왜교섭의 경험이 있던 심유경을 서울에 보내 왜군과 접촉케 하였다. 심유경은 이에 앞서 2월 중순에 參軍 馮仲纓과 접촉하였던 加藤淸正(가토 기요마사)까지 회담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교섭상대로 割地案을 제시하였던 가등청정을 배제하고 주로 封貢案을 제안하였던 소서행장과 용산에서 회담하였다.
이 회담에서 심유경은 왜군의 점령지 반환과 두 왕자 및 배신의 송환, 풍신수길의 침략행위에 대한 사죄를 제시하고 일본이 이 조건을 이행하면 명나라 조정에 풍신수길의 封王을 주선하겠다고 제의하였다. 소서행장도 명이 講和使를 보내고 명군을 요동으로 철수시키면 두 왕자 등을 송환하고 4월 8일 왜군을 서울에서 철수시키겠다고 제안하였다. 이에 양자는 서로의 조건을 이행하기로 합의하였다.104) 李烱錫,≪壬辰戰亂史≫中(壬辰戰亂史刊行委員會, 1974), 625∼626쪽.
당초 경략부의 대왜접촉은 조선은 물론 명나라 조정에까지 비밀로 추진되었지만 먼저 조선에 접촉사실이 알려졌으므로 조선의 강력한 반대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경략 송응창은 명군이 무력으로 서울을 수복할 수 없는 현실에서 일단 외교전으로 왜군을 서울에서 몰아내려는 의도에서 조선의 반대를 완전히 무시한 채, 4월 상순 심유경을 다시 서울로 보내 왜군에게 합의한 조건의 이행을 촉구하였다. 한편 그는 4월 중순 막료인 謝用梓와 徐一貫에게 參將과 遊擊의 직함으로 명의 강화사로 위장하고 일본에 가서 풍신수길의 降書를 받아오게 하였다.
왜군은 경략부의 강화사가 서울에 들어오자 두 왕자를 인질로 한 채, 4월 19일 서울에서 전군이 철수하여 5월 중순 후에는 본국에서 군량운송이 용이 한 蔚山에서 巨濟에 이르는 남해안가에 주둔하게 되었다.
왜군의 서울에서 철수는 명군과 명나라 조정의 戰局운용에 큰 전기로 작용하였다. 제독 이여송은 대왜강화를 낙관하게 되어 명군의 추격전을 회피하고 조선군의 추격까지 방해하였다. 명군은 왜군이 한강이북에서 물러간 상황을 중국의 안보를 직접 위협하는 위기의 해소로 인식하고 원군으로서 부여받은 임무까지 거의 완수한 것으로 간주하여 한강을 지키면서 강화교섭의 진전상황을 보아 본국으로 철병하려는 조급한 계획까지 주장하였다.105)≪宣祖實錄≫권 39, 선조 26년 6월 임자. 따라서 조선의 왜군추격의 요구를 사실상 거부하고 뒤늦게 송응창이 왜군의 철수를 강요할 목적에서 무력시위용의 왜군추격을 명령하였지만 이마저 이행하지 않았다.
명나라조정도 왜군이 서울에서 철수하자, 경략부의 강화추진을 추인하고 조선내의 명군의 완전철군을 성급히 계획하였다. 이에 경략 송응창은 당황하였다. 강화교섭이 진행중인 상태에서 명군의 일방적인 조기철병은 일본의 협상입지만을 강화시켜 주며 강화에 결사 반대하는 조선의 극단적인 반발을 초래할 가능성이 예상되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는 명나라 조정에 조선은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중국을 지키기 위한 요새지로 반드시 포기할 수 없다고 설득하였다. 그리고 조선이 일본의 재침을 방어할 수 있는 자위력을 어느 정도 갖추게 될 때까지 명군의 일부를 조선에 잔류시켜 그 주둔경비를 조선에 부담시킨다면 명의 국방비를 절감시키면서 일본의 중국침략을 예방할 수 있다고 역설하였던 것이다. 명나라 조정도 왜군을 서울에서 철수시켜 정치적 위상을 높인 송응창의 제안을 수용하게 되었으므로 명군의 철수는 단계적 철병계획으로 변경되었다.
이러한 명나라 조정의 결정은 근원적으로 명의 국내·외 정세가 일본과 전쟁을 계속할 수 없는 국력의 쇠퇴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는 풍신수길이 침략의도를 간파하지 못한 송응창이 왜군의 남해안으로의 철수를 본국으로 철병하기 위한 전제로 믿고, 왜군이 대부분 돌아갔고 그 일부만이 부산 등지에 잔류하여 明帝의 封貢만을 대기하고 있다고 적정을 명나라 조정에 그릇되게 보고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반면 풍신수길은 경략부의 위장 강화사를 맞이하면서도 和·戰 양면의 계책을 견지하여 5월 하순에 진주성의 재공격방략을 왜군에게 하달하고 사용재·서일관 등과도 名護屋에서 회담하였다. 이 회담에서 그는 ① 明皇女의 日後妃 책봉(納妃) ② 勘合貿易의 재개(准貢) ③ 명·왜대신의 誓詞 교환 ④ 조선의 4도 할양(割地) ⑤ 조선왕자 등 인질 ⑥ 두 조선왕자의 송환 ⑦ 조선대신의 誓詞 등 전문 7조의 강화약관을 제시하였다.106) 李烱錫, 앞의 책, 875∼876쪽. 이 약관은 ⑥ 조항을 제외하면 조선은 물론 명나라 조정도 수용할 수 없는 조건으로 풍신수길의 강화교섭 의도를 확연히 나타내는 것이었다.
송응창은 강화사가 돌아와 이를 확인하고 풍신수길의 약관을 명나라 조정에 사실대로 보고할 수 없게 되자, 심유경의 조언에 따라 풍신수길이 봉공만을 원하고 있다고 거짓 보고하여 본국 조정을 기만하였다. 이로써 송응창과 심유경은 본국 조정을 위계로 속이면서 대왜교섭을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왜군은 강화교섭에서 풍신수길이 명측에 제시한 조선의 할지를 관철시키려는 뜻에 따라 2차로 진주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킨 후 호남지역을 점령하려고 하였지만 조선군의 결사적인 항전과 명군의 군사적·외교적인 견제로 남해안의 점거지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일본의 무모한 침략행위로 조선은 물론 명나라 조정도 대왜강화교섭에 대해 큰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제독 이여송은 명군의 출동으로 왜군이 남해안 본거지로 스스로 물러났다고 하여 명나라 조정을 기만하였다. 왜군도 조선의 두 왕자 등을 송환하고 소서행장의 부하인 小西如安(고니시 죠안)을 일본의 納款使로 삼아 심유경의 안내로 서울을 경유하여 명으로 급거 入朝케 하였다. 그러므로 경락 송응창은 조선조정이 일본의 침략행위나 교섭의 실상을 명나라 조정에 알리지 못하도록 조선의 사행을 통제하고 조선의 내정까지 극단적으로 간섭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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