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정은 평양수복 후 명군이 대왜전을 주도하자, 分朝(1차 분조)를 해체 하여 선조의 실추된 왕권을 강화시키면서 서울수복을 위해서 급히 남진한 명군이 겪고 있는 군량결핍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뜻에서 선조로 하여금 명군에 대한 조선의 효율적 지원을 직접 지휘케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명군이 여석령에서 패한 후 서울수복전을 포기하였으므로 선조는 명군의 진공작전을 촉구하기 위해서 제독 이여송에 대해 설득교섭에 나섰다.
이 때 선조나 조신들은 앞서 경략부가 대왜전의 수행에 있어서 원칙적으로 조선의 자주국방을 제언하면서 명군은 進攻收復戰을, 조선군은 그 수복지의 自守防禦를 전담하자는 역할분담론을 주장하여 왔으므로 명군이 대왜강화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선조 26년(1593) 3월 상순 선조는 安州 蕭寧館에 나아가서 제독 이여송과 회담하였다(1차 회담). 이 때 이여송은 명군이 서울에서 왜군과 접촉을 계획하고 있으므로 경략부가 일본과 교섭할 의사를 가지고 있다고 비로소 선조에게 시사하였다. 이에 선조는 일본과는 죽기로 싸울 뿐 강화할 수 없다고 결연한 의지를 밝히고, 문서로도 서울의 왜군을 속전속결할 당위성을 제시하였다.
그 후 선조는 명·왜군간의 접촉사실이 점차 공개되자, 이러한 사정을 이미 인지하고 있던 도체찰사 유성룡을 힐책하고 그에게 조선의 將臣이 강화문제를 논의하지 못하도록 엄명하고, 이여송에게 진병을 재차 촉구하기 위해서 3월 하순 평양으로 가서 大同館에서 그와 회담하였다(2차 회담).
그러나 이여송은 끝내 대왜강화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명군의 진공을 결정할 권한이 경략 송응창에게 있다고 책임까지 전가하였다. 이에 선조는 경략부의 대왜강화추진을 저지하여 명군의 서울진공전을 재개시키려고 안주에 있던 경략과의 회담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선조는 제독이나 경략을 직접 찾아나서면서까지 그들이 추진하는 대왜강화교섭에 대왜진공론으로 대응하였다. 그것은 그 자신이 강화교섭으로는 풍신수길의 침략의도를 바꿀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병조판서 李恒福의 예상과 같이 서울을 무력으로 수복하지 못하면 왜군은 무조건 왜란을 종결시키지 않으려 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송응창은 선조의 회담요구가 강화교섭을 저지하려는 데 있다고 파악하여 선조와 회동을 거부하고, 조선에서 강화교섭을 방해하면 명군을 본국으로 철수시키겠다고 위협하면서 조선군의 전투행위까지 금지시켰다. 그는 자신이 그 동안 대군을 지휘하면서도 이에 상응하는 전과를 올리지 못한 책임을 명나라 조정으로부터 추궁당하게 될 것을 매우 두려워하고 있었다. 따라서 송응창은 왜군을 서울에서 일단 철수시키려고 조선의 의사를 완전히 무시하였다.
조선조정은 서울을 떠나는 왜군이 두 왕자의 송환약속을 지키지 않자, 이 를 이유로 송응창에게 왜군의 추격을 강력히 요구하게 되었다 결국 그도 조 선을 회유하려는 의도에서 조·명군의 왜군추격을 뒤늦게 명령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여송이 이 지시를 이행하지 않았으므로 명군은 왜군에게 본국으로 철병을 강요할 기회까지 상실하게 되었다.
명나라 조정이 명군의 단계적 철병을 결정하자, 송응창은 왜군의 재침에 대비하기 위해서 조선과 협력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조선조정에 대하여 일본이 강화를 애걸하였으므로 왜군의 완전철수는 곧 실현될 것이나 조선이 자위력을 길러 일본의 재침을 방어할 수 있게 되기까지 명군의 일부를 잔류시켜 조선의 안보를 보장하겠다고 약속하면서 그 동안 회동을 거부하던 선조와 6월 상순 안주 安興館에서 회담하였다. 이 때 송응창은 선조의 환도와 서울방어를 위한 鳥嶺의 關防施設 및 일본의 재침에 대비한 조선군의 전력강화를 재언하고 일본과의 강화성립을 낙관하였다.
그러나 6월 하순 선조와 조신들은 예상하였던 것처럼 왜군이 진주성의 5, 6만의 군민을 도륙하는 침략행위를 경험하고, 송환된 두 왕자로부터 왜군이 철수할 의사가 전혀 없다는 사실까지 확인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 본의 납관사가 서울로 들어오려하자, 조정은 경략부가 강행하려는 대왜강화교섭을 저지하기 위해서 명나라 조정을 직접 상대로 하는 외교적 대응책을 강구하게 되었다. 선조는 명나라 조정이 송응창과 심유경의 사기행위와 일본의 기만외교에 농락당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조선조정도 왜군의 침략정황을 명나라 조정에 알려 명나라 조신들로 하여금 일본과 강화할 수 없는 현실을 인식케 하려고 7월에 告急奏請使 황진을 명에 보냈다.107)≪宣祖實錄≫권 40, 선조 26년 7월 무오.
이에 송응창이 황진의 告急奏請使行을 적극적으로 저지하면서 조선의 모든 사행을 통제하였으므로, 조선조정과 명나라 조정간의 외교적 접촉은 경략부에 의해서 사실상 차단당하게 되었다. 명나라 조정은 경략부의 대왜교섭의 실상을 알지 못하였으므로 송응창의 허위보고를 사실로 믿고 16,000여 留兵軍을 제외한 명군의 주력을 본국으로 철수시켰다. 9월 중순에는 경략 송응창과 제독 이여송까지 요동으로 귀환하게 되어 명은 조선 내에서 왜군의 철병을 강제할 무력수단을 보유할 수 없게 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전개는 송응창으로 하여금 대왜강화 이외에 선택할 여지를 허용하지 않게 하였다. 그는 조선의 항의를 무릅쓰고 일본의 납관사를 요동으로 들어오게 하였고, 兵部尙書 石星도 일본과 강화하기로 정하여 납관사에게 關伯의 降表를 가지고 오도록 왜군진영으로 되돌려 보냈다.
이후 경략 송응창은 심유경으로 하여금 指揮 譚宗仁과 함께 熊川의 소서행장에게 가서 왜군의 철병을 촉구케 하는 한편 관백의 항표까지 요구하게 하였다. 그러나 웅천에서 회담한 심유경과 소서행장은 관백에게 항표를 요구할 수 없는 실정을 감안하여 위조한 항표를 명나라 조정에 보낼 것에 합의하였다. 이들은 각각 자신의 중앙정부를 속였던 것이다.
한편 경략부는 명군의 주력이 철병하게 되는데 따른 대왜전의 대책으로 조선에 조선군의 훈련·관방시설의 추진 그리고 명 유병군의 군량공급 및 그 주둔경비의 분담을 포괄하는 조선군과 명 유병군의 對倭協守防禦를 요구하여 왔다. 그러나 왜란초부터 대외진공론을 주장하여 온 당시의 집권서인은 경략부의 대왜방어론의 실효성을 의심하고, 관방시설의 추진은 대규모 토목공사가 전제되는 것이므로 전화로 허덕이는 조선의 현실을 감안하지 않은 잘못된 계책이며 주둔경비의 분담요구는 강화에 반대하는 조선을 견제하려는 외교적 압력수단으로 간주하여 그 시행은 물론 협의에 대해서까지 소극적 태도를 취하거나 기피하였다.
송응창은 조선의 태도에 불만을 품고 조선군과 명 유병군의 효율적인 대왜방어를 수행하기 위한 조치라는 명분을 내걸고 선조 26년(1593) 8월 중순 세자 광해군의 下三道 經理案을 조선에 요구하여 왔다.108)≪宣祖實錄≫권 41, 선조 26년 8월 정유. 이는 세자의 撫軍을 요구한 것으로 정치적으로는 세자의 조정인 분조를 촉구한 것이었다. 집권서인은 1차 분조를 주도하였지만 이제 선조의 왕권을 다시 나누라는 경략부의 요구를 공론화하기 매우 어려웠으므로 이를 지연시켜 나아갔다.
집권서인은 송응창의 이러한 요구가 경략이 추진하는 대왜강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려는 선조를 견제하려는 외교적인 수단임을 인지하고 경략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선조의 뜻에 따라 황진의 고급주청사행을 거듭 강행시켰다. 그러므로 조선조정 대 경략부, 선조 대 경략의 외교적 대립과 갈등은 증폭되어 갔다. 이 영향은 국내정치에도 나타나 대왜무력전을 포기한 경략부가 요구하는 대왜방어대책만을 현실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다는 선조와 이에 소극적인 집권서인간의 갈등까지 야기시켰다.
송응창은 자신이 촉구하는 세자의 하3도 경리의 시행을 조선이 지연시키자, 자신이 위계로 추진하는 강화교섭에 최대의 장해가 되고 있는 선조까지 견제하려고 하였다. 그는 선조를 명나라 조정에 음해하여 국왕의 통치자질마 저 의심받게 하고 은밀히 국왕을 교체하려고 획책하며 조선의 사행길을 끊어 조선의 외교권까지 사실상 박탈하고자 하였다.
선조는 집권서인의 대경략외교가 점차 난항에 빠져들자, 극도로 대립상태에 있는 대경략외교에 대처하면서 명나라 유병군의 단계적 철군에 대비하려고 하였다. 선조는 동왕 26년 10월 設險 및 淸野의 대왜방어론을 주장하는 豊原府院君 유성룡을 영의정에 임명하여 남인으로 하여금 정국을 주도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집권남인은 경략부가 요구하는 대왜방어책과 세자의 하3도 경리안 등 경략부와의 외교적 현안문제를 능동적으로 수용하게 되었다.
명나라 조정도 윤11월에 行人 司憲을 서울에 보내 경략부가 촉구하는 세자 의 하3도 경리를 조선이 단행하도록 하고, 대왜강화에 앞서 왜군의 정황을 현지에서 확인케 하였다. 이로써 경략부 통제로 막혔던 조선과 명나라 조정간의 직접적인 외교접촉이 서울에서 이루어졌다. 선조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명나라 사헌에게 일본이 강화교섭에 임하는 정황을 설명하여 경략 송응창이 명나라 조정에 왜군이 이미 본국으로 철병하였다고 보고한 것은 사신과 다른 것임을 다음과 같이 밝혔고, 總兵 劉綎도 선조의 주장을 증명하여 주었다.
(왜군이) 京城에서 달아났는데 自全之計를 꾀하여 교묘히 朝貢을 원한다는 핑계로 … 변방의 성에 물러가 점거하였습니다(≪宣祖實錄≫권 45, 선조 26년 윤 11월 갑오).
명사 사헌은 선조 26년 12월에 귀국하자 “왜적은 떠나지 않고 대부분 조 선의 변경에 머무르고 있다”는 奏本을 올렸다.109)≪宣祖實錄≫권 48, 선조 27년 2월 경오. 이와 같은 보고에 접한 명사 인 조정의 科道官들은 본국의 조정을 기만한 송응창과 제독 이여송 등을 탄핵하였고, 강화교섭을 위계로 강행하여 왔던 송응창 등 명군내 주화파들은 모두 실각되었다. 따라서 왜란의 제일 당사국인 조선의 의사를 완전히 무시한 채 대왜강화교섭을 추진하던 송응창은 조선의 외교적 대응으로 선조 26년 12월에 결국 물러났고, 薊遼保定總督 顧養謙이 경략의 직사를 담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경략 고양겸도 조선내 왜군의 철병을 강제할 무력수단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특히 山東·河南·大江 이북지방에 흉년과 기근이 계속되었으므로 명군을 대규모로 동원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110)≪宣祖實錄≫권 50, 선조 27년 4월 신미. 그러므로 그도 대왜무력전의 재개를 포기하고 전임 경략의 강화교섭을 승계하여 조선의 전쟁상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이 무렵 심유경은 앞서 언급하였듯이 소서행장과 관백의 항표를 위조할 것에 합의하고 선조 27년 2월 상순 서울에 와서 고양겸에게 관백의 항표가 일본으로부터 곧 올 것이라고 허위로 보고하였다. 소서행장도 일본의 납관사로 하여금 위조된 항표를 가지고 재차 중국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일본의 항표가 중국에 도착하자, 고양겸은 대왜강화를 낙관한 끝에 병부상서 석성을 움직여서 조선내 명 유병군의 완전철병을 결정케 하고, 명나라 조정에 일본을 봉공할 것을 종용하는 한편 소서행장이게는 왜군의 완전철병을 재촉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왜군은 봉공을 인준하는 封倭使의 내도와 철병을 연계시켜 경략의 요구를 거부하였다. 명나라 조정 또한 당시 북경에 와있던 조선의 사은사 金 睟가 왜군이 재침할 적정을 들어서 명 유병군의 철수를 유보할 것을 주장하고 명의 대왜강화에 결사적으로 반대하였으므로 전임 경략이 위계로 추진한 강화 교섭을 답습하는 경략 고양겸의 對倭封貢案을 거부하였다. 특히 명나라 조정의 과도관들은 강화를 애걸한 측이 송응창이고 이를 인지하고서도 고양겸은 대왜봉공안을 제기하였다고 논박하고, 일본의 항표 역시 명인이 위조한 문서임을 들어서 그를 성토하며 왜군이 조선의 변경을 점거하고 있는 한 봉공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고양겸은 경략부만이 대왜강화를 추진하여서는 그 동안 누적된 강화교섭에 대한 명나라 조신들의 불신을 해소할 수 없으므로 명나라 조정으로부터 대왜봉공안을 인준받을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대왜강화에 계속 반대하고 있는 조선으로 하여금 명나라 조정을 설득시키게 하려는 목적에서 조선의 협조를 구하게 되었다. 즉 그는 遼東都指揮使司와 咨文으로 다음과 같이 조선조정이 일본을 대리하여 명나라 조정에 請封하여 줄 것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지금 조선이 할 일은 倭奴를 위해서 封貢을 청함으로써 왜노를 속히 철병시키게 하는 일이다(≪宣祖實錄≫권 50, 선조 27년 4월 신미).
이로써 대왜강화를 반대하여 온 조선은 명·왜간에 추진되던 강화교섭에 간접적이지만 참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