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27년(1594) 4월 하순 경략 고양겸은 참장 胡澤을 서울에 보내 조선조 정이 일본을 위해 대리로 請封하여 줄 것을 직접 설득하였다. 그는 왜군이 재 침할 경우 명은 원병이나 군량을 지원할 수 없는 처지이므로 왜군의 철병이나 전쟁의 재발을 늦추려면 일본이 원하는 봉공을 명나라 조정에서 얻어내는 길 외에는 방도가 없다고 하면서 조선조정이 이 일을 도와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서 조선조정도 경략부의 요청에 응할 것이냐 거부할 것이냐, 즉 경략부가 추진하는 강화교섭의 협소 여부를 놓고 찬·반론이 대립되었다.
당시 조선의 정치구조는 선조 26년 12월 상순 명의 강요로 세자의 분조가 법적으로 출범하게 되어(2차 분조) 국왕의 조정과 병존하였고, 조정은 대왜방 어를, 분조는 대왜진공을 주장하여 대왜응전전략도 이원화되어 있었다.
특히 분조에서는 진공론자인 서인의 좌의정 尹斗壽가 分備邊司의 후신인 撫軍司를 주도하였으므로 선조 27년 정월 명 유병군인 吳惟忠軍의 철수를 앞두고 조선군의 독자적인 대왜진공작전을 전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조선군의 전력으로 보아 독자적인 대왜전의 수행이 불가능하다는 집권남인의 반대에 따라 선조도 이 작전을 유보하였으므로, 그 후 조선군의 대왜전략은 집권남인이 주장하는 산성고수 및 청야전의 방어론을 기본으로 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집권남인의 대왜전략에는 대외적으로 명이 산동 등지의 참혹한 기근으로 왜군을 응징할 수 있는 규모의 명군을 재출병시킬 수 없다는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또 그것은 국내적으로도 계속된 전쟁으로 말미암아 국가 재정이 탕갈되고 인력마저 고갈되었으며 선조 26년과 27년에 전국을 휩쓴 큰 기근과 전염병으로 「人相殺食」·「父子兄弟亦相殺食」의 참상이 연출되어 급기야 宋儒眞의 난을 초래하였으므로111) 李章熙,<壬辰倭亂中 民間叛亂에 對하여>(≪鄕土서울≫32, 서울特別市史編纂委員會, 1968), 43∼46쪽. 조선의 경제·사회현실이 붕괴의 직전에 있다는 판단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집권남인은 명나라 조정을 일본과 전쟁할 수도 봉공할 수도 없는 진퇴양난에 빠뜨린 책임의 일부가 서인이 집권했을 때 대왜진공론만을 견지하고 대명 외교를 소홀히 한 외교적 실책에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대왜전의 재개가 국가의 파탄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 현실에서 경략부가 대왜봉공안으로 왜군을 조선에서 철병시키려는 계책은 실현 가능성이 적지만 이에 간여할 이유는 없다고 여겼다. 따라서 조신들은 표면상 선조의 강화 결사반대의 명분론에 순종하면서도 내면적으로는 대왜강화의 현실적 필요성을 점차 인식하게 되었다.
한편 왜군과 대치하고 있던 일선에서는 선조의 강화반대의 뜻이 이미 무너지고 있었다. 도원수 권율은 총병 유정의 권유로 승려 惟政으로 하여금 울산의 가등청정과 접촉하게 하였고, 梁山郡守 邊夢龍은 자정을 정탐한다는 이유로 사사로이 왜군에게 글을 보내 사통하는 일까지 자행하였다.
호택이 조선에 代理請封할 것을 요청하자 조정 내에서는 지금까지 금지되어 왔던 대왜강화에 대한 논의가 불가피하게 되었다. 선조와 분조의 윤두수 등은 대왜강화교섭에 조선이 직·간접으로 참여하는 것에 반대하였지만 영의정 유성룡 등 남인은 은근히 이를 수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조신들은 선조의 의사에 반하는 대왜강화론을 감히 거론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 때 전라감사 李延馣은 일본과 강화할 것을 선조에게 건의하였다. 그는 대외적으로 명군의 완전철병이 확정되어 그들의 재출병은 불가능한 상태이고 왜군은 철병할 의사조차 없다고 하였다. 또한 대내적으로 왜군의 재침을 방어할 인적·물적 기지인 호남이 3년간 계속된 전쟁 및 그 지원으로 여력이 이미 소진하여 전면전이 재개되면 백성들은 싸우기도 전에 먼저 붕괴될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조선은 일단 일본과 화친하여 왜군을 철병시킨 후 후일을 도모하여야 한다고 역설하였던 것이다.112)≪宣祖實錄≫권 57, 선조 27년 5월 기해.
선조가 죽음을 무릅쓰고 대왜강화론을 주장한 이정암을 실성한 인물로 지목하자, 三司에서 이정암이 대의를 저버렸다고 참수형에 처할 것을 극론하기에 이르렀다. 집권남인들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 서인인 牛溪 成渾은 이정암이 절개를 지켜 義 앞에 죽고자 대왜강화론을 주장하여 조신들의 숨은 뜻을 대변하였다고 그를 극력 변호하고 나섰다.
당대의 거유인 성혼이 宣陵(성종의 능)과 靖陵(중종의 능)을 도굴한 일본과 강화하자는 의견을 지지한 것은 조선이 직접 일본과 강화교섭에 나설 것을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것은 이정암의 뜻과 같이 조선의 현실이 일본과 전쟁을 재개할 수 없는 형편이므로 명·왜간의 강화교섭을 측면에서 협조하여 시간을 벌어 조선의 재기를 도모하자는 의견이었던 것이다.113) 李章凞,<牛溪 成渾에 關한 史的考察>(≪亞洲大學論文集≫11, 亞洲大, 1989), 196쪽.
선조는 성혼을 간사한 인물로 매도하고, 이정암과 앞서 왜군과 사통한 변몽룡을 엄벌할 것을 희망하였지만 조정은 이정암을 전라감사에서 잠시 면직시켰다가 다시 전주부윤으로 재기용하였고 변몽룡은 변방에 충군케 하였다.
이와 같이 조신들 사이에서 대왜강화에 대한 현실상의 필요론이 대두되고, 호택 또한 조선의 집요한 반대를 예상하여 전임 경략 송응창이 강력하게 통제하던 조선의 敵情에 관한 奏本을 경략부가 차단하지 않겠다는 외교적 양보를 약속하였으므로, 조선조정도 2개월 넘게 끌던 협상 끝에 마침내 그의 요구에 동의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조·명간의 외교적 통로가 다시 정상화되었다.
조선조정과 경략부가 조선의 대리청봉문제로 협상하는 동안 북경에 머물고 있던 사은사 김수는 왜군이 조선에서 철병하지 않고 있는 실정을 명의 조신들에게 호소하였다. 경략 고양겸은 그의 대왜봉공안에 반대하던 과도관들의 계속되는 논박을 받아 스스로 경략부에서 자퇴할 것을 제의하였고, 명나라 조정도 兵部右侍郎 孫鑛을 신임 경략에 임명하였다.
명이 경략을 빈번하게 교체하여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이나 외교적 영향력을 거의 행사하지 못하는 데다가 유병군까지 완전히 철병하기에 이르자, 조선조정은 선조 27년(1594) 정월 명의 강요로 설치된 분조(2차)의 해체에 합의하고 이원화되었던 정치구조나 대왜응전체제를 선조 중심으로 일원화시켰다.
한편 손광은 경략의 직사를 맡았으나 그 역시 왜군을 응징할 수 있는 무력 수단을 보유하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대왜봉공안으로 왜란을 종결시키려고 하였다. 선조 27년 9월 조선에서 對倭奏請使 許頊이 북경에 가서 명이 일격에 봉공하여 줄 것을 대리로 요청하자 명나라 조정도 10월에 풍신수길에게 封王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명나라 조정은 납관사 소서여안에게 ① 왜군의 조선에서의 완전 철수 ② 貢市의 요구포기 ③ 일본의 조선침략의 영구포기 등을 강화조건으로 제시하였다. 소서여안이 명나라가 일본에 봉왕하면 조선에서의 왜군철수를 맹세하였으므로 명나라 조정도 선조 28년 정월 都督僉事 李宗城을 封倭正使로, 都指揮 楊方亨을 封倭副使로 삼아 심유경의 안내로 조선에 입국케 하였다.
왜군은 명의 봉왜사가 조선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심유경으로부터 확인받고 풍신수길이 철병명령을 내려 비로소 대부분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종성 등 봉왜사 일행은 11월 하순에야 부산의 왜군영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왜군은 봉왜사의 도일을 대기한다는 이유로 전면철병을 유보한 채 심유경을 통해 朝鮮通信使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 문제를 둘러싼 조선과 일본간의 외교적 공방전으로 봉왜사의 도일은 지연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소서행장은 이 사실을 풍신수길에게 보고하려고 봉왜사의 도일에 앞서 심유경과 함께 일본으로 갔다.
그 동안 일본진영에서 머물고 있던 봉왜정사 이종성은 심유경의 귀환이 늦어지고, 풍신수길이 「割地」·「納女」의 강화조건이 포함되지 않는 명의 봉왕을 거부할 것이라는 정보에 접하자 선조 29년 4월 3일 부산의 일본진영에서 야음을 틈타 탈주하였다.
이 돌발적인 사건으로 명·왜간의 강화교섭은 결렬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일본의 주화파 소서행장은 일본에서 급히 돌아와 사건의 확대를 막고, 명나라 조정에서도 신속히 양방형을 봉왜정사로, 심유경을 봉왜부사로 삼아 대왜강화의 속행을 왜군에게 분명히 밝혀 그 위기는 해소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명나라 조정에 일본의 재침에 대비하여야 한다는 경종이 되었으므로 명도 그 준비를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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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