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신수길은 명에서 봉왜사가 나오게 되자 명나라 조정도 자신이 경략부의 강화사에게 제시한 강화약관을 수용한 것으로 생각하고 조선으로부터도 할지의 이양을 확약받으려는 망상에서 소서행장으로 하여금 조선에 통신사를 요구케 하였던 것이다.
소서행장과 심유경은 각각 자신의 정부에 강화조건을 속이고 교섭을 추진시켜 왔으므로 풍신수길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고, 조선의 강력한 반발 또한 무시할 수 없었으므로 조선에 대해서 통신사가 아닌 朝鮮陪臣의 봉왜사 수행을 요구하게 되었다.
선조는 이들의 요구가 있자, 배신의 일본파견을 朝議에 부쳤다. 당시 영의 정 유성룡을 비롯하여 2품 이상 47인의 절대다수는 대의명분상 조선배신의 일본행을 반대하였으며, 다만 權徵과 李希得만이 일본의 요구에 따르자 하였고 朴忠侃과 권율은 통신사가 아닌 다른 호칭의 관원을 일본에 보내는 방안을 제시하였다.114)≪宣祖實錄≫권 71, 선조 29년 정월 경오.
그러나 유성룡 등은 이 문제의 결정에 신중하게 대처할 것을 조신들에게 촉구하고, 선조까지도 일본의 통신사 요구가 왜군의 철병을 조선배신의 도일여부와 연계시키려는 일본측의 간계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여 즉각적인 거부만은 유보시키자고 하였다. 그러므로 조정은 조선사신의 일본파견이 명나라 조정과의 협의사항임을 일본에게 알리고 그 결정은 유보하였다.
과연 소서행장은 조선이 배신을 보내면 왜군을 완전 철병시키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재침하겠다고 위협하였고 또 심유경도 조선배신의 봉왜사 수행을 재촉하였다. 조선에서도 집권남인들은 왜군이 완전 철병을 거부할 명분을 주지 않고, 심유경으로부터도 타결 직전에 와 있는 강화교섭이 조선으로 인하여 격렬되었다는 빌미만 잡히지 않으려고 일본에 사신을 보내자는 의견을 점차 주장하게 되었다.
특히 영의정 유성룡은 당시 조선의 안보현실에 대해 남쪽에서 일본, 북쪽에서 여진의 누르하치로부터 침략위협에 직면하고 있는 위기상황임을 주장하여 일본과의 전쟁재개를 먼저 막기 위해서 일본의 요구를 수용하자고 하였다.115)≪宣祖實錄≫권 74, 선조 29년 4월 기해. 그가 주도하는 비변사도 배신의 일본파견을 적극 찬성하였다. 그러나 대왜강화교섭에 직·간접의 참여를 결사 반대하여 온 선조를 설득시키지 못하는 한 이 문제의 해결은 매우 어려웠다.
이리하여 비변사는 국왕에게도 양보할 수 있는 명분을 세워주기 위해서 통신사의 호칭이 아닌 봉왜사를 수행한다는 뜻의 跟隨陪臣을 일본에 보낼 것을 선조에게 제의하여 선조 29년(1596) 6월 상순에 동의를 얻어냈다. 그러나 三司 등의 반대가 이어지자 선조가 앞서의 동의를 번복하였으므로 조정도 봉왜정사 양방형의 조선배신의 동행 요구까지도 수용할 수 없었다.
한편 명나라 조정과 봉왜사간에도 교섭의 추진절차를 놓고 이견이 노출되었다. 명나라 조정은 조선사신의 도일에 반대하였고 봉왜사의 도일시기를 왜군의 완전철병 후로 지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양방형은 풍신수길이 봉왜사의 도일을 독촉하자, 명나라 조정의 지시를 어기고 封倭誥命과 勅書의 도착을 기다리지도 않고 일본의 완전철병 약속만을 믿고 선조 29년 6월 16일 일본으로 떠났다.
봉왜사가 일본으로 떠나자, 소서행장은 조선의 근수배신이 명사를 뒤따르지 않는다면 왜군을 부산 등지에 잔류시킬 수밖에 없다고 조선을 더욱 위협하였다. 심유경도 왜군의 완전철병을 이행시킬 방도로 근수배신의 명사 수행이 불가피하다고 조정에 촉구하여 왔다. 왜군진영에 있던 護軍 黃愼까지도 조선배신의 도일여부가 일본의 動兵으로 연계될 가능성이 높다고 조정에 보고하여 왔다. 이에 따라 비변사는 적정의 정탐이 긴급하다는 필요성을 들어 무신을 근수 배신으로 차임하고 왜군의 철병이 진행되는 사정을 보아 일본으로 보낼 것을 선조에게 제의하여 다시 동의를 얻어냈다.
반면 명나라 조정은 봉왜사가 왜군의 철병완료를 기다리지 않고 일본으로 떠나자, 일본의 재침을 염려하여 조선에 명군의 출병에 대비할 것을 통보하여 왔다. 이에 선조는 근수배신의 일본행에 제동을 걸고 명에 청병할 것까지 주장하였다.
선조 29년 6월 하순 명나라 조정에서 보낸 봉왜고명과 칙서가 도착하자, 조선조정도 명이 대왜강화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으므로 삼 사 등의 계속된 반대에도 선조의 동의하에 문신인 호군 황신을 跟隨上使, 대구부사 朴弘長을 跟隨副使로 선임하였다. 이에 따른 반대론이 이어졌지만 그 해 8월 상순 비변사의 주장에 따라 그들의 관직을 각각 敦寧府都正 및 掌樂 院正으로 직급을 올려 마침내 근수사 일행은 봉왜사의 뒤를 쫓아 일본으로 떠나게 되었다.
이처럼 조정에서 근수사를 일본에 보내기로 하고 출발시키기까지 무려 2개월이 넘게 걸린 것은 조신들간에 근수사의 일본행을 둘러싼 찬·반론이 치열하였기 때문이었다. 근수사의 일본행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에 섰던 선조와 삼사에서는 대의명분상 침략국에 어떠한 사신도 보낼 수 없으며 국가이해상 근수사를 보내도 일본의 재침을 막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반해 비변사 중심의 찬성론자들은 왜군의 재침시기를 늦추고 적정을 정탐하기 위해서라도 근수사를 보내야 한다고 맞섰다.
그러나 조신 가운데 찬성론자들도 임진왜란 직전의 통신사행의 경험을 통해 근수배신의 도일이 왜군의 완전철병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사실에 인식을 같이하고 있었다.
일본이 書幣를 조선에 요구하였을 때 이를 거부하자는 강력한 반발이 조정 내에서 일어나자, 영의정 유성룡은 선조 29년 7월 호서지방을 휩쓴 李夢鶴의 난으로 국가가 내적으로도 위기에 처해 있으므로 근수사를 일본에 보내는 일이 불가피함을 선조에게 아래와 같이 역설하고 있었다.
통신사를 들여보낸 후에야 나라가 지탱될 것입니다. 이번 역적들의 변란도 또한 왜란으로 인해 일어난 것입니다. 일에는 경중과 대소가 있는 법입니다. 국가의 존망이 뒤따르는 일인데 신하 한 사람을 보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宣祖實錄≫권 77, 선조 29년 7월 경진).
이러한 사실로 보면 조정은 명사의 간청이나 일본의 협박에 못이겨서 근수사를 보냈다기 보다 전쟁의 재개시기를 늦춤으로써 국내의 위기상황을 안정시켜 일본의 재침에 대비하려는 집권남인의 의지가 크게 작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풍신수길은 조선근수사를 기다리지 않고 9월초 명의 봉왜사를 大阪城에서 맞이하여 封王의 의식을 가졌다. 그러나 자신이 요구한 「納女」·「准貢」·「割地」 등의 강화조건이 명나라 조정에 의해서 완전히 무시되자 그는 명과의 강화를 결렬시키려는 목적에서 조선이 보낸 근수사의 도일시기가 지연되었고 근수사가 직급조차 낮은 관인이라는 이유를 들어 조선근수사의 접견을 거절하였다. 풍신수길은 강화교섭을 통해서는 침략목표의 일부나마 조선과 명으로부터 얻어낼 수 없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조선을 다시 침략하기로 결정하고 조선과 명의 사신일행을 일본에서 퇴거시켰다. 4년여 동안 진행된 명·왜간의 강화교섭은 결국 결렬된 것이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