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제사 이순신의 함대가 해전에서 극적으로 승리하자 육상에서 왜군의 전면적 후퇴를 계속 강요하게 되었다.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이순신은 왜수군이 남원성전투에 동원되었다가 해상작전의 임무로 복귀한 직후인 8월 18일 長興 會寧浦에서 배설의 패전선 12척을 인수받아 통제사의 함대로 재편하였다.
한편 왜수군은 등당고호 등이 연합함대를 편성하여 왜육군의 북상에 부응하기 위해서 조선수군을 찾아 함대수색에 나섰다. 그러나 이순신은 8월 28일 海南 於蘭浦에서 왜수군의 정찰선대와 접전하여 적선 8척을 격퇴시키고, 수적으로 우세한 왜연합함대와의 조우전을 피해 통제영을 珍島 碧波津으로 옮기 고 왜연합함대가 진도 서쪽해역으로 진출하는 것을 鳴梁에서 막고자 하였다.
명량은 속칭 울돌목이라는 해협으로 최소 폭이 약 200m이며 만조 때 최대 유속은 11.5노트로 적은 수의 함선으로 많은 수의 적 함대와 결전할 수 있는 천혜의 해전장이었다. 이곳을 이순신은 조선수군이 왜수군과 대결할 장소로 선택한 것이다.
200여 척의 일본 연합함대는 이순신의 함대를 쫓아 9월 7일 어란포로 향하였다. 50여 척의 선발함대는 어란포로 원접하는 가운데 돌격함 10여 척이 이순신의 함대에 근접하려 하였지만 심한 풍랑으로 실패하고, 그날 밤 야습까지 감행하여 왔지만 이를 예상한 이순신의 대처에 의해 격퇴되었다.
9월 14일 이순신은 왜함대를 명량으로 유인하기 위해서 휘하 선단을 벽파 진에서 다시 우수영으로 옮기고 다음날 명량에서 싸울 것을 결심하여 제장회의를 소집하고‘옛 병법에 결단코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 하면 죽는다’라고 수군장병의 결전의식을 고취시켰다.
9월 15일 등당고호·來島通總(구르시마 미치후시) 등이 이끄는 130여 척의 연합함대가 명량으로 진입하여 오자, 이들의 동정을 계속 감시하여 왔던 이순신은 휘하 함선을 鳴梁峽中에서 대기하게 하였다가121) 金一相,<鳴梁海戰의 戰術的 考察>(≪壬亂水軍活動硏究論叢≫, 海軍軍史硏究室, 1993), 197쪽. 이들 12척의 함선을 진두지휘하면서 순조를 타고 峽水路로 진입하는 왜함대를 화포와 총통으로 공격하면서 접전하였다.
이순신은 조류가 조선함대에 순조로 바뀌자, 총공격을 감행하여 선체가 약 한 왜선을 31척이나 격파하고 적장 내도통총을 전사케 하는 일대 승리를 올 렸다(명량대첩). 이로써 이순신은 12척의 함선으로 130여 척의 왜함대를 무찌르는 세계해전사의 신화를 남기게 되었다. 이 후 왜수군은 조선수군과 해전을 기피하고 더 이상의 서쪽 진출을 포기하였으므로 조선수군은 남해의 제해권을 다시 장악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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