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Ⅰ. 임진왜란
  • 4. 왜란중의 사회상
  • 1) 군량미 조달과 농민의 실상
  • (2) 명군 내원 이후의 군량조달
  • 나. 군량미의 국내조달

나. 군량미의 국내조달

 조선정부는 국내 양곡을 조달하는데 있어서 조선 관군보다 명군에게 우선권을 부여했다. 명나라는 자국의 군사가 먹을 군량미를 의주까지 운반하였지만 운반이 부진해서 명군에게 급식할 군량미를 때에 맞춰 조달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부족한 양은 조선의 군량미로 충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국내 양곡을 조달하는 것은 명나라에서 군량을 조달해 제공하는 것 못지 않게 애로가 컸으며 민간인의 희생이 수반되었다.

 ≪宣祖實錄≫에 의하면 난중에 조선에서 군량으로 충당하는 稅源은 作米·收稅·募粟·粟의 네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고 한다.154)≪宣祖實錄≫권 53, 선조 27년 7월 계사. 또한 柳成龍도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오늘날 糧餉을 조치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시급한 일이라 조금도 소홀히 할 수 없다. 양향을 조치하는 길은 또한 다른 계책이 없고 田稅와 貢物作米·屯田所出·奴婢身貢作米에 지나지 않는다(柳成龍,≪懲毖錄≫권 15, 軍門謄錄 移京畿黃海觀察使文).

 이들 두 내용을 종합하면, 군량으로 충당할 수 있는 길은 전세와 공물작미·노비신공작미·모속·무속 屯田所出 등 6조목으로 나눌 수 있겠다. 이 중에서 정부가 필요로 하는 경비를 제한 나머지는 모두 군량으로 충당되었다.

 그러나 전세를 거두어들이는 데는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있었다. 그것은 농민들이 전화로 입은 피해가 커 남은 양곡도 없으므로 경작할 종자를 마련할 수 없어 폐농하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정부에서는 폐농을 막기 위해 각 도에 종자를 수백 섬씩 보내서 파종토록 하였으나 분배과정에 공정을 기할 수 없었으며, 필요한 양에 미치지도 못했다. 이에 비추어 보면 전세수입도 많은 감소를 예상할 수 있다. 또한 임란 다음해에 국한되는 것이지만, “계사·갑오년간은 사람이 사람의 고기를 먹었으며 죽은 자가 태반이었다”155)≪宣祖實錄≫권 75, 선조 29년 5월 정묘.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인원 감소에 따른 경작면적의 감축은 전세수입에도 많은 감소를 가져왔을 것이다.

 공물작미와 노비신공작미는 세부규정이 어떠했는지 해당되는 자료를 찾을 수 없어 자세한 내용을 밝히기는 어려우나, 공물과 노비신공을 작미로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은 국내의 부족한 군량을 해결하자는 의도에서 취해진 조처였다고 하겠다.

 모속에 대해서는 앞에서 말했듯이 선조 25년(1592) 11월에 이미 군공청이 설치되어 납속자에 대한 포상문제가 논의되었고 동년 12월에<糧餉事目>으로 반포되었다. 그 이전에도 납속하여 상직을 받은 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임란초와는 달리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자진하여 납속하는 자가 줄어들고 양곡이 귀하게 되자 부족한 군량미를 조달하기 위한 방법에서 이러한 임시 방편이 마련되었다.

 1차로 발표된<納粟事目>의 상직규정은 다음과 같다. 本官守令으로 1백 섬 이상을 모속해서 운반하는 자는 加資하고, 3백 섬 이상 자는 陞叙하고, 5백 섬 이상 자는 超叙하며, 7백 섬 이상 자는 越二階하여 승서한다. 資窮者는 1백 섬 이상이면 代加하고, 3백 섬 이상이면 2資를 대가하고, 5백 섬 이상이면 아들이나 사위 중에서 參下職을 제수한다. 前啣人으로 1백 섬 이상은 加二資, 5백 섬 이상 자는 복직시키고, 7백 섬 이상 자는 승서한다. 鄕所 이 하 자로 1백 섬을 하면 6품 影職을 주고, 5백 섬 이상을 하면 4품 영직을 주며, 7백 섬 이상을 하면 참하 實職을 제수한다. 또한 서얼이나 鄕吏有役人·公私賤 등으로 1백 섬 이상을 모곡하여 운반한 자는 5년간 면역하고, 3백 섬 이상 자는 10년간 면역하며, 5백 섬 이상을 하는 자는 서얼은 許通하고, 향리와 유역인은 면역을 받고, 공사천은 從良한다는 내용이다.156)≪宣祖實錄≫권 33, 선조 25년 12월 을묘.

 이러한 규정은 다음해인 선조 26년(1593) 2월에 오면 대폭 개정된다. 개정 된<납속사목>에 의하면, 향리로서 3섬을 바치면 3년 면역에 14년에 이르기까지 1섬씩 더할 때마다 加 1年을 하고, 15섬을 바치면 己身免役, 30섬을 바치면 免鄕하고 참하 영직을 주며, 40섬을 바치면 두 아들을 면역시켜 참하 영직을 제수하고, 40섬을 바치면 상당한 군직을 주고, 80섬을 바치면 東班 實職을 준다. 사족은 3섬을 바치면 참하 영직을, 8섬을 바치면 6품 영직을, 20섬을 바치면 동반 9품을, 25섬을 바치면 동반 8품을, 30섬을 바치면 동반 7품을, 40섬을 바치면 동반 6품을, 50섬을 바치면 동반 5품을, 60섬을 바치면 동반 종4품을, 80섬을 바치면 동반 정4품을, 90섬을 바치면 동반 종3품을, 1백 섬을 바치면 동반 정3품을 준다. 또한 본래 관직에 있는 자는 매 10섬당 품계를 올려주고, 자궁자는 30섬을 바치면 당상관에 승격시킨다. 서얼인 경우는 5섬을 바치면 兼司僕 羽林衛 또는 서반 군직 6품을 제수하고, 15섬을 바치면 허통, 20섬을 바치면 前所生도 허통하며, 30섬을 바치면 참하 영직을, 40섬을 바치면 6품 영직을, 50섬을 바치면 5품 영직을, 60섬을 바치면 동반 9품을, 80섬을 바치면 동반 8품을, 90섬을 바치면 동반 7품을, 1백 섬을 바치면 동반 6품을 제수한다는 것이다.157)≪宣祖實錄≫권 35, 선조 26년 2월 신축. 이 개정된 규정은 선조 25년 12월에 정한<事目>에 비하면 납곡량에 비해 납곡자에게 돌아가는 수혜가 월등하였는데, 이는 미곡이 귀하여 모곡이 그만큼 어려웠기 때문이다.

 난중에 이러한<납속사목>은 부분적으로 여러 차례 개정되었지만. 모곡을 위해 마련된 임시적인 변통책은 빈 감투를 면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고,158) 李睟光,≪芝峰類說≫권 3, 君道部 賞功. 납속으로 堂上階에 오른 자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159)≪宣祖實錄≫권 139, 선조 34년 7월 정미. 그러나 이와 같은 자진납곡만으로는 부족한 군량을 충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각 고 을로 募粟官을 파견하여 납속을 독촉하였으나 모속관들은 사복을 채우는 데 에 급급하여 실제 관으로 납부되는 양은 많지 않았다.

 무곡으로 군량의 일부를 충당한 것은 정유재란이 일어난 이후의 일이다. 명나라는 그들 장병에게 급식할 군량미를 미곡으로 보내던 것을 운반상의 어려움이 있자 종전의 방식에서 벗어나 銀子와 靑布·花絨 등의 疋木을 보내와서 그것으로 군량미를 마련케 하였다.160)≪宣祖實錄≫권 93, 선조 30년 10월 무진. 청포·화융 등의 필목은 일반인이 추위를 막는 데 필요한 것이라 무곡이 용이하여 각처에서 곡물과 바꿀 수 있었다. 그러나 은자는 조선 사람에게 익숙하지 않은 데다 화폐가치가 너무 높아서 대개 은자를 가지고 곡식과 바꾸는 것에 응하려 하지 않았다. 따라서 의주에서 江上매매를 하는 것 외에 다른 지역에서의 무곡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 같다.161)≪宣祖實錄≫권 93, 선조 30년 10월 경오.

 선조 31년(1598) 2월에 각 도에 분배했던 필목의 무곡현황은 다음과 같다. 함경도에 15,000필, 전라·강원 2도에 10,000필, 경기도에 5,000필을 보내서 무곡을 하였다. 함경도가 다른 도에 비해서 필수가 많았던 것은 6진에서 무곡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162) 李肯翊,≪燃藜室記述≫권 17, 宣祖朝故事本末 亂中時事摠錄. 그 뒤에도 명나라에서 보낸 필목으로 무곡을 하는 일은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필목으로 무곡한 양이 얼마나 되는 지는 전혀 알 수 없다. 난중에 조선에서 면포 한 필의 값이 겉곡식 1말(斗)이고 말 한 필의 값이 3, 4말에 불과할 정도로 양곡이 귀했던 것을 보면 명나라 청포나 화융이라고 해서 비싼 값으로 무곡이 이루어졌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필목·은자무곡 외에도 煮鹽貿粟이 행하여졌다고 하나163)≪宣祖實錄≫권 75, 선조 29년 5월 정묘. 곡식이 귀한 당시 상황에서 이것이 얼마만큼 성과를 거두었는지는 의문이다. 난중에 둔전을 경작하게 된 것은 명나라 곡물의 운반이나 무곡이 용이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부족한 군량을 조달하기 위하여 취해진 조처었다. 둔전경작은 조선사람뿐 아니라 명나라 군사도 일부 투입되었다. 각 도별 둔전의 현황을 보면, 경상도와 충청도에서 水田播種穀이 각각 300여 섬이었다고 하며, 旱田은 경상도에서 231日耕이고 충청도에서 219일경으로 되어 있어 전체 파종면적이 많은 것은 아니었다.164)≪宣祖實錄≫권 97, 선조 31년 2월 신유. 인력이 부족한 당시로서는 그 이상의 면적은 경작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둔전은 황폐한 토지에 설치하였다. 둔전에서 전라도가 제외되었던 것은 다른 도에 비해 적의 침략을 받은 지역이 적어 황무지가 적었음을 말해준다. 둔전경작이 부족한 군량 마련에 얼마만큼 큰 역할을 하였는지 알 수는 없으나 농지의 황폐화를 방지하는 데는 다소의 기여를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도 조선정부는 군량 결핍의 극복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꼭 필요하지 않은 관원은 감원해서 경비를 줄였고, 당상관 이상 현직자에게 주는 散料도 말(斗)수를 줄이고 조야를 막론하고 검약한 생활을 당부하였으며, 궐내 御供이나 명나라 장수를 접대하기 위하여 필요한 술 이외는 각 아문이나 공사간 술을 일체 금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정부에서 양곡절약을 위해 온갖 힘을 기울였으나 명나라 군사에게나 겨우 군량미를 충당할 수 있었을 뿐 조선 관군은 급식을 제대로 받을 수 없어서 해산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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