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Ⅰ. 임진왜란
  • 4. 왜란중의 사회상
  • 1) 군량미 조달과 농민의 실상
  • (2) 명군 내원 이후의 군량조달
  • 다. 군량의 부족과 전투력의 저하

다. 군량의 부족과 전투력의 저하

 난중에 군량미를 명나라 장병에게 제때에 보급하지 못하여 조선의 높은 관원들이 명나라 하급관원이나 하급무장에게 곤욕을 당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명나라 원군은 조선땅에 들어온 지 수개월이 지나지 않아서부터 군량미의 결핍을 이유로 들어 더 이상 진격할 수 없다면서 소수의 장병만 잔류하고 나머지는 모두 본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사를 공공연히 표명하여 조선정부를 불안하게 하였다. 서울을 수복하기 이전에 이와 같은 언사가 명나라 장병 입에서 나오게 된 것은 명나라 제독 李如松이 碧蹄館 부근 礪石嶺싸움에서 대패하면서부터였다. 이 싸움에서 패배한 심적 부담을 지니게 된 그들은 군량이 제때에 조달되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적극적인 싸움을 기피하였다.

 명·일간의 강화를 조건으로 선조 26년 4월 서울에 주둔한 왜군이 철수하기 시작하여 강원도·충청도에 주둔한 왜군도 모두 남쪽으로 철수하였지만, 명나라가 강화교섭을 촉진하게 된 것은 일본과 다름없이 조선이나 명나라의 군비사정이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수 없는 난관에 봉착하였기 때문이었다. 선조 27년(1594) 4월 告急使 李廷馨이 요동에서 보고한 내용을 보면 조선에 보낸 군량의 대부분이 山東産 양곡이었다고 한다.165)≪宣祖實錄≫권 50, 선조 27년 4월 신미. 많은 군량미를 이곳에서 조달하여 남은 것이 없는데다 흉년이 겹쳐서 강화를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명나라 입장이었다.

 이여송이 선조 26년 8월 대부분의 장졸을 이끌고 요동으로 철수하게 된 것은 和議교섭에 따른 명·일간의 휴전성립에 기인한 것이었지만 휴전을 서두르게 된 이면에 군량부족이 크게 작용했던 것만은 틀림없다. 조선의 중신들 가운데에도 화의자체를 찬성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군량결핍과 아사 상태에 있는 국내 실정을 감안하여 화의의 불가피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러한 논의가 중앙정계에 미친 파급은 컸으며, 이로써 군량결정에서 오는 戰局의 파멸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만하다. 모든 양곡을 명군에게 우선하여 보급해 조선관원이 무너져 흩어지는 일이 많았고, 관군진영인 군졸들 중에는 굶어죽는 자가 속출하였다. 이러한 관군에 대한 급식사정의 악화는 養兵을 하는 데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도원수 權慄의 종사관 李慶涵이 왕이 불러 뵙는 자리에서 “도원수가 훈련시키는 군사가 몇 명이나 되느냐”고 묻는 말에 대답하기를 “糧餉이 떨어져서 군사를 키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도원수가 이끄는 군사는 매우 적으며 겨우 수십 명이 牙兵이 있을 뿐입니다. 호남지방에서 糧米를 싸가지고 온 자도 다 지쳐서 특별히 교련하는 일이 없습니다”166)≪宣祖實錄≫권 50, 선조 27년 4월 기유. 라고 한 것을 보면 군량결핍이 양병에도 큰 장애요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왜란이 종반으로 치달은 선조 31년 6월에 오면 관군의 수가 대폭 감소한 다. 이는 난중에 일선에서 크게 활약한 몇몇 장수들이 거느리고 있던 군졸의 다음과 같은 실상에 잘 나타나 있다.

金應瑞가 모은 군사는 8백여 명에 이르렀으나 이제 남아 있는 수는 겨우 1백 명 남짓하고, 高彦伯이 거느린 군졸은 7백여 명에 이르렀으나 지금 수하에는 하나도 없고 자식·조카와 친척붙이 약간 명이 도원수 진영에 의탁해 있을 뿐이다. 鄭起龍이 관장하고 있는 군사도 7, 8백 명이었으나 이제 남아 있는 것은 1백 명도 차지 못했다. 그 밖에 成允文·權應銖 등이 이끄는 군졸은 몇 명인지 파악되지 않는다. 대개 김응서·고언백·정기룡군의 軍料가 또 감삭되어 成軍할 수 없으며, 남쪽 巨鎭들도 수개월 내에 감삭이 이와 같아서 放軍하게 될 것이니, 이것은 다른 이유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다 군량결핍으로 인해서 부득이 해산시키게 된 것이다(≪宣祖實錄≫권 101, 선조 31년 6월 병인).

 왜란중에 도체찰사와 영의정의 중책을 맡고 있던 유성룡은 “싸우고 지키는 大要는 4조에 지나지 않는다. 첫째는 양식이요, 둘째가 軍兵이요, 셋째가 城池요, 넷째가 무기이다”167) 柳成龍,≪懲毖錄≫권 16, 軍門謄錄 移京畿巡察使文.라고 하려 군량을 첫째 조건으로 꼽았다 전라좌의병장 任啓英도 왜군을 막아내는 방법은 세 가지로 “첫째가 軍餉이요, 둘째가 무기요, 셋째가 전사이다. 군향을 마련하지 못하고 어떻게 전사를 먹일 수 있겠는가”168) 趙慶男,≪亂中雜錄≫권 1, 계사 5월.라고 하여 군량의 확보를 왜군을 물리치는 데 첫째 조건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만큼 군량미 확보는 절실했던 것이며, 군량결핍이 전투력 저하에 결정적인 악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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