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Ⅰ. 임진왜란
  • 4. 왜란중의 사회상
  • 2) 송유진·이몽학 등의 난
  • (3) 기타 민간반란
  • 다. 김희·강대수·고파 등의 반란사건

다. 김희·강대수·고파 등의 반란사건

 송유진의 난이 처리된 뒤에도 전국에서‘千百爲群’‘百十作群’의 반당들이 계속하여 일어났는데 호남지방이 가장 심했던 것 같다.

 남원 사람 金希·李福·姜大水 등이 東村 楸泂深谷에서 당을 모아 右路의 반적 高波 등과 상응하며 세력을 떨쳤다. 이들은 대낮에도 횡행하며 작당하여 출몰하였고, 母山北村 사람들과 연결하여 자기를 따르지 않는 사람이나 관아에 들어간 마을 사람들을 보면 일당을 시켜 끌어다가 살해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걸어다닐 수 없었으며, 반적의 형세가 날로 성하여 지방관의 힘으로는 금할 수 없었다. 鎭安·長水·雲峰·남원지경은 길이 완전히 차단되었는데, 이 때는 보리가 익어가는 여름이라 반민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빼앗기게 되었고 이를 막으려는 인민들은 잔인한 피해를 입었다.188) 趙慶男,≪亂中雜錄≫권 2, 갑오 5월.

 이에 도원수 권율은 전라병사 金應瑞를 시켜 賊黨을 찾아 잡도록 하였으나 관군이 도리어 패하여 물러났다. 다시 상주목사 鄭起龍을 督捕大將으로 삼아 이복 일당을 베어 죽였으나 장수를 잃은 남은 무리들은 김희 일당과 통합하였다. 이 때를 즈음하여 영남인 林傑年도 무리를 모아 지리산 般若峰에 자리잡고 불시에 출몰하여 형세는 더욱 험악하였다.189) 趙慶男,≪亂中雜錄≫권 2, 갑오 6월. 고파가 그 일당을 이끌고 梨橋店에 몰래 이르자 店人이 이 사실을 남원판관 金瑠에게 와서 알렸다. 김류가 4백여 명의 군사를 출동시켜 店村을 포위하였으나 적당은 이것을 알고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밥을 지어 먹다가 갑자기 뛰어나와 난사하여 도리어 관군을 패주시켰다. 반군은 관군이 돌아가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김류가 이르자 일시에 화살을 쏘아댔고 관군은 뜻밖에 당하는 일이라 앞길을 향해서 도주하였다. 고파 일당이 승세를 타고 계속 추격하여 原川院 아래 이르렀을 때 김류는 고파 일당이 쏜 화살이 요행히 그의 말안장을 맞혀 화를 면하고 성안으로 들어 갈 수 있었다. 이 싸움에서 다친 말이 10여 필이나 되었고 부상한 관군이 많았다.190) 尹衡器(尹得運),≪朝野僉載≫권 44, 갑오 12월.

 또한 김희·강대수·고파 등이 합세하여 약탈을 일삼자 운봉현감 南侃이 이 사실을 독포대장 정기룡에게 몰래 알려서 정기룡이 군사 3백여 명을 이끌고 운봉으로 달려갔다. 반적들은 마침 연회를 베풀고 있었는데 그 속에는 관인과 군졸들이 태반이나 들어 있었다. 반적들은 관군이 달려온 사실을 알고도 점점 흥을 돋구면서 싸울 생각을 하지 않는 듯하다가 새벽에 이르러 고함을 외치며 갑자기 나와 관군을 포위해 패주시키고 安陰으로 향하였다.191) 李肯翊,≪燃藜室記述≫권 17, 宣祖朝故事本末 諸道土賊之起.

 이와 같은 무리들은 김희·강대수·고파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호남과 영남경계에서도 토적들이 모여 관군이 토벌에 나섰으나 수차에 걸쳐서 실패를 거듭했다. 泰仁 回文山에도 많은 적당들이 있어 남원 동촌에 근거를 둔 김희 일당과 서로 내왕하면서 무리를 지어 백주에 출몰하였으나 근처의 관군은 이를 감당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전라감사가 남원·곡성·옥과·순창·임실·진주·금구·태인 등의 관원에게 명하여 회문산에 주둔한 반적들에 대한 토벌을 명했다. 각 고을의 수령들이 명을 받고 각기 수백 명의 군졸을 이끌고 회문산으로 모여들어 산에 불을 지르고 나무를 베면서 사방에서 포위하고 공격하자 적당들은 결국 지탱하지 못하고 무너져 흩어져서 長域으로 향하였다. 이 기회를 포착한 금구·태인·순창 세 고을 수령들이 추격하자 적당들은 곤궁에 처하여 산 정상으로 기어올라 끝까지 버티려 하였다. 그러나 3일이 지나자 굶주림에 지쳐 감히 대항하지 못하였고 관군은 밤중에 사다리를 타고 산 정상을 기어올라가서 굶주린 적당 1백여 명을 참수하였고 이로부터 회문산 길이 뚫려 사람들이 통행할 수 있었다.192) 趙慶男,≪亂中雜錄≫권 2, 갑오 12월. 다음해 1월 김희·강대수 등이 영남관군에게, 고파 등이 장성 사람에게 패하여 죽음을 당하자 오랫동안 두절되었던 호남·영남일대 도로에 비로소 사람들이 통행할 수 있었다고 한다.193) 趙慶男,≪亂中雜錄≫권 2, 을미 2월.
尹衡器,≪朝野僉載≫권 44, 을미 춘.

 토적들은 서울 가까운 지역에도 있었다. 玄夢은 廣州와 利川 산골에 웅거하며 약탈을 일삼았고 李能水는 楊州 산골을 근거지로 삼아 오랜 기간 역시 약탈 행위를 일삼았다. 비변사에서는 邊應星을 방어사로 삼고 成泳을 利川府使로 삼아서 이들 난적을 토벌케 하였다. 그리하여 이능수는 수하 적당에게 참수되고 그 무리들은 투항해 왔는데, 이천의 현몽은 무리들이 항복하여 흩어지자 종적을 감추어 포획하지 못했다.194)≪宣祖修正實錄≫권 28, 선조 27년 12월.

 이 밖에도 호서지방에‘逆亂繼作’이란 기록이 보이는 것으로 보면 송유진의 흩어진 잔당들이 다시 무리를 지어 이몽학의 난 때까지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반란에 가담한 이들은 모두 민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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