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란 당시 강화도에 들어온 사람 중에는 공무를 띠고 온 사람도 있었으나, 미처 남한산성으로 호종하지 못한 群臣들도 있었고, 그들의 처자로서 피란한 사람들도 많았다. 이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강화도로 밀려드는데도 江都의 수비를 맡고 있던 將臣들은 적이 수전에 익숙하지 못한 것을 믿고 적침에 대비하여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았으며, 명령계통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검찰사 金慶徵이 혼자서 섬안의 모든 일을 지휘 명령하고 대신이나 大君의 말까지도 무시하려 하였다. 이에 강화유수 겸 舟師大將 張紳은 자신이 검찰사의 지휘·명령을 받을 사람이 아니라고 하여 서로 배척하고 알력이 심하였다. 김경징은 강화도를 「金城湯池」로 믿어 청군이 날라서 건너지는 못할 것이라고 호언 장담하면서 걱정하는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또 매일 술만 마시고 피란민을 구제한다는 명목으로 김포와 通津에 있는 곡식을 배로 실어들여 친분이 있는 사람에게만 나누어 주어 민심을 크게 잃었다. 어떤 사람이 와서 적군이 3강(한강·임진강·예성강)에 둔취하여 가옥을 헐어 그 재목으로 작은 배를 만들거나 수레를 만들고 있으니 강화도를 침범하려는 것 같다고 하였다. 그러나 김경징은 손뼉을 치고 크게 웃으면서 강에 아직 얼음이 얼어 있으니 육지에 어떻게 行船할 수 있겠느냐면서 비웃었다고 한다.
인조 15년(1637) 정월 21일 저녁에 通津假守 金頲이 김경징에게 첩보를 전 하여 적이 낙타와 수레에 배를 싣고 甲串나루로 향하고 있으니 밤에 물을 건너려고 하는 것 같다고 하였다. 그러나 김경징은 군정을 요란하게 한다면서 바로 참수하려고 하였다. 그 때 갑곶을 파수하는 장수의 보고가 또 들어왔다. 김경징은 비로소 놀라며 修撰 李一相과 병조좌랑 朴宗阜로 하여금 파수할 계책을 분부하고 화약과 鐵丸을 나누어 주었다. 또 부마 尹新之에게 大靑浦를 지키게 하고, 金昌君 柳廷亮은 佛院을, 전승지 兪省曾은 長零을, 전장령 李坰은 加里山을 각각 지키게 하는 한편, 김경징 자신은 鎭海樓 아래 나아가 갑곶을 지키려 하였다. 鳳林大君이 김경징과 함께 진을 친 곳에 나갔다가 군사 수가 적은 것을 보고 다시 성안으로 들어와서 군사를 수습하여 바다를 지킬 계책을 세우려 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두 도망하여 흩어졌으므로 부득이 작전을 바꿔 성만을 지킬 계획을 세웠다. 승지 韓興一과 전장랑 鄭百亨을 시 켜 성중에 피란한 사람을 거느리고 城堞을 나누어 지키게 하고, 燕尾 서쪽은 豊德郡守 李聖淵, 연미 북쪽은 개성유수 韓仁 및 都事 洪霆이 지키고, 갑곶 아래쪽은 유성증이, 仙源 아래쪽은 유정량이, 廣城 아래쪽은 윤신지가 각각 지켰다. 한흥일·정백형과 호조좌랑 任善伯은 각각 가동을 데리고 남문 위에, 懷恩君은 여러 종친을 거느리고 동문 위에, 閔光勳·呂爾弘 등의 조신은 서문 위에 앉았으며, 북문은 사람이 부족하여 지키지 못하였다. 일이 매우 위급한 데 성첩은 모두 무너져 사면이 완전한 곳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었다. 사람들은 바다의 천연적 참호를 버리고 맨주먹으로 무너진 성안에 돌아와 지키려 한다면서 모두 분개하였다.
한편 청군은 12월 28일 문산에 당도하여 통진으로 직행한 睿親王 多爾袞과 貝勒 豪格, 懷順王 耿仲明의 군사 1만 6천 명은 12월 30일에 강화도 건너 편 언덕일대에 포진하고 강화를 공략할 준비를 서둘렀다. 병자호란 때는 정묘호란 때와는 달리 수전에도 대비하였다. 적에게는 명나라에서 투항한 叛將 경중명이 거느리는 수전에 익숙한 한족 군사가 합세하고 있었으며 紅夷砲를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 통진에 도착한 청군을 바로 강화도를 공격하려 하였으나 강화도와 김포 사이를 가로지르는 염하가 추운 겨울에도 얼지 않아 선척이 없이는 건널 수 없었다. 그리하여 20여 일간에 걸쳐 3강 하류에 산재한 대소 선척을 모아 수리하는 한편, 민가를 헐어 수백 척의 배와 뗏목을 건조하고 수레 수백 대를 제조하여 수레로 배와 뗏목을 염하로 운반하여 정월 22일 새벽에 도하작전을 감행했다.
청군이 나루터에 주둔하여 홍이포를 쏘니 포환이 강을 넘어서 육지 멀리 밖에 떨어졌다. 검찰사 김경징과 부검찰사 李敏求는 겁에 질려 정신을 잃고 府城으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주위의 반대로 들어가지 못했다. 주사대장 장신은 충청수사 姜晋昕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해전을 벌이는 도중에 퇴각하여 싸움을 회피하였고 이 때문에 강화도의 위급은 촌각에 달려 있었다. 청군은 처음에는 복병이 있는가 의심하여 배를 출발시키지 않고 1척만 먼저 보내 7명을 상륙시켰다. 이것을 본 조선 관군은 조총을 쏘았으나 화약에 습기가 차서 불발이었다. 또 화살을 쏘려 하였으나 화살이 없었다. 적병 7명이 해안을 둘러 북 쪽을 두루 바라보아도 사방에 복병이 없어 백기를 흔들어 부르니 많은 청군은 바다를 덮듯이 건너왔다. 中軍 黃善身이 鎭海樓 아래에서 적을 맞아 싸워 3명을 사살하였으나 힘이 다하여 전사하였다. 이 때 강화도 哨官이 모두 장신의 배 안에 있었는데 육지에 내려오는 자가 하나도 없었다.
千摠 姜弘業과 초관 鄭再新은 전사하고, 검찰사 김경징과 부검찰사 ,이민구는 말을 버리고 물에 들어가 나룻배를 타고 주사대장 장신의 배로 가서 그와 함께 달아났다. 이 때 천총 具一元이 장신을 꾸짖고 물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守將이 모두 도망하자 남은 것은 부성 안에 있는 빈궁과 왕자 및 대신들로, 싸움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 뿐이었다. 대신들이 부성을 사수할 것을 결의하고 먼저 성을 빠져나가는 자가 있으면 군령을 행하겠다고 경고했다. 빈궁은 일이 급박함을 알고 통곡하며 궐문 밖으로 걸어나가서 성을 나가 바다를 건너가려 하였으나 備局이 문을 굳게 지키고 열지 않았다. 이에 빈궁은 내관 金仁 등을 불러 원손을 피신시키도록 간절히 부탁하였다. 김인 등은 원손을 안고 성문에 이르러 큰 소리로 원손을 안고 있는데 문을 열지 않으면 문지기를 베겠다고 하였다. 閔光勳이 비로소 문을 열어주어 김인 일행은 바닷가에 나가 배를 타고 수일 후에 喬桐에 이르렀다가 注文島로 옮겨 唐津으로 향하였다.
민광훈 등은 의논하기를 원손이 이미 나갔으니 성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다 따라나갔다. 빈궁은 사세가 어찌할 수 없음을 알고 자결하려 하였으나 내시의 구조로 큰 상처에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이 날이 정월 22일이다. 성이 함락되자 청군은 부성에 들어와 정전에 자리하고 숙의와 빈궁, 그리고 봉림·인평 두 대군 및 대군의 부인을 협박하여 나오게 하고 군사를 놓아 크게 약탈하였다. 또 청군은 관가와 사가를 막론하고 모조리 불사르며 살상을 자행하고 온 성을 도륙한 후에 군병을 몰아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침략군의 행패는 청인들보다 몽고인들이 더욱 심했다. 성이 함락될 기세가 보이자 전우의정 金尙容, 전공조판서 李尙吉 등은 방화 자살하고, 많은 전현직 관료들이 순절하였으며, 순절하는 부녀자 또한 적지 않았다.475) 순절한 사람의 성명은 李肯翊,≪燃藜室記述≫권 26, 仁祖朝故事本末 江華殉節人에 자세히 표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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