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4. 공론정치의 형성과 정치 참여층의 확대
  • 1) 공론 수용기구의 정비

1) 공론 수용기구의 정비

 권력구조가 바뀌고 정치 충원 방식이 바뀌면서 정치 참여층이 확대되는 현상도 나타났다. 정치 참여층의 확대는 정치의 질적인 변화의 일면으로, 이 시기 이러한 양상을 잘 보여주는 것이 공론정치의 형성이었다. 이는 사림이 재야에 있으면서도 공론을 통해서 정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압력 집단이 되는 현상이었다. 공론정치의 형성은 공론 수용기구와 형성층의 양면이 갖추어져야 가능한 것이었다. 먼저 공론 수용기구의 정비 과정을 살펴보자.0441)崔異敦,<16세기 公論政治의 형성과정>(≪國史館論叢≫34, 國史編纂委員會, 1992).
―――,<사림언론과 중앙정치>(≪역사비평≫ 37, 역사비평사, 1997).
金 墩,≪16세기 전반 政治勸力의 변동과 儒生層의 公論 형성≫(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3) 참조.

 당시의 관념에서 공론은 一國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여론으로 人心이 결집되고 天心이 반영된 것이었다. 따라서 공론은 國是였고 공론에 의해서 정치가 되어질 때에 국가가 바르게 다스려지는 것으로 이해되었다.0442)南智大,<朝鮮 成宗代의 臺諫硏究>(≪韓國史論≫12, 서울大, 1985). 공론은 인심이 결집된 것이므로 국가의 구성원 모두를 포함하는 기반을 가져야 할 것으로 이해되었으므로 ‘一鄕之人宜有公論’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이었고, 국가에서는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鄕士와 庶民에게 의논한다”는 인식이 형성될 수 있었다. 따라서 국가에서는 이들의 공론을 받아들일 수 있는 체제를 갖추는 것은 당연하게 여겼고, 일반 民들에게도 上言의 길이 열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상언의 길은 현실적으로 제한되었고 이들이 공론의 구성원이라는 것은 이념에 불과하였다.

 현실에서는 공론은 왕·재상·언관에 있었다. 代天理物하는 자로 인식되는 왕은 天心에 따라서 통치해야 하였고, 天心과 人心은 공론으로 반영된다고 인식되어, 왕은 공론을 수용하고 공론에 따라 일을 결정하는 공론의 주인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공론의 수용 여부는 왕이 하늘을 대신한다는 명분이었으므로 통치의 정통성과 연결되는 것이었다.

 재상들은 국사를 왕과 논의한다는 입장에서 공론을 유지하는 명분을 가졌고, 공의를 왕에게 건의해야 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실제적으로 재상들은 議政府 署事制 등을 통해서 국가의 각종 사안에 대하여 직접·간접으로 간여하였고, 署事制가 폐지된 후에도 收議를 통해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공론 형성층이 분명하지 않았던 당시에 재상의 공론은 재상들의 공통된 의견이라는 좁은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들에게 있어서도 공론은 왕의 경우에서와 같이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이념에 불과하였다.

 통치에 대한 명분적 수식에 불과하였던 것과는 다른 성격의 공론을 대간에서 찾을 수 있다. 대간은 왕의 耳目으로 인식되고 있었고, 이목의 역할은 公議를 거두어서 왕에게 이르게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입장에서 대간은 지위가 낮았지만 국정을 논하는 위치를 부여받고 있었다. 따라서 대간의 언론은 공론이었고 대간 언론의 폐지는 공론의 폐지로 인식되었다. 이들의 의견은 국가의 다스려짐을 위해서 절대적인 것으로 인식되었고, 각종 정책과 인사를 결정하는 경우에 대간들은 자신들의 견해를 밝히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였다.

 그 임무에도 불구하고 조선 초기에는 대간들의 정치 구조적 지위가 취약하였고, 공론의 바탕이 되어야 할 공론의 형성층이 형성되지 못하여, 대간의 언론은 표방과는 달리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심지어 언론이 언론기관의 공통된 의견이라는 인식마저도 형성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언관의 언론이 문제되는 경우에 그 사안을 入啓한 자, 혹은 그 사안을 먼저 발언한 자는 다른 대간들로부터 분리되어 처벌되는 경우도 많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간은 一國民의 공의를 대변하는 기능을 못하였고, 공론 수용기구로서의 의미도 약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의 실질적인 공론의 형성층은 주로 대신들이었고, 이들의 收議가 공론을 수렴하는 자리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성종대에 사림이 중앙정치에 등장하여 성종의 지원을 받아 언론 기구를 중심으로 서용되면서 언론 활동이 강해지기 시작하자, 대간들은 부여된 임무에 상응한 역할을 위해서 노력하였다. 먼저 대간들은 圓議制를 강화하여 언론이 대간의 합의된 의견이라는 인식을 확보해 가고 있었다. 또한 대간 발언의 근원인 言根을 캐물음으로 언사가 위축되기 쉬운 문제를 ‘不問言根’이라는 관행을 확보함으로 언론을 활성화하였다. 이러한 성과를 통해서 양사의 언론 기능이 강화되고 있었고 따라서 공론 수용 기능은 활성화되고 있었다.0443)南智大, 위의 글.

 성종 중엽부터는 홍문관이 언론 기능을 하게 되면서 새로운 변화를 야기하였다.0444)이하 서술은 崔異敦,≪朝鮮中期 士林政治構造硏究≫ (일조각, 1994) 참조. 홍문관은 경연을 통해서 君德을 輔養하는 것을 임무로 하였고 그러한 입장에서 중요한 일에는 疏를 올려 의사를 표현할 수 있었다. 이러한 홍문관의 언론 활동이 점차 강화되어 갔는데, 이것이 성종과 대신·대간들에 의해서 인정되면서 성종 22년(1491)경에는 홍문관이 언관기관으로 인정되었다.

 그 위에 홍문관은 대간의 언사를 규제하는 ‘臺諫彈劾權’을 확보하게 되었고, 홍문관원이 대간직으로 진출하게 되면서 이 양자의 관계는 유기적인 조화를 이루게 되었다. 이는 홍문관을 중심으로 하는 언권의 강화로 기존의 양사 중심의 언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변화였다. 언론 기능의 강화는 언론의 당연한 의무였던 공론을 수용하는 기능을 원활히 수행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이로서 홍문관을 중심으로 하는 언론 삼사가 공론 수용기구로서의 역할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다.

 성종대의 홍문관을 통한 공론 수용 기능이 활성화된 위에 중종대에는 낭관들도 공론 수용 기능을 수행한다. 낭관들은 각 曹의 장관인 堂上官을 보좌하는 역할을 하였으나 중종대에는 삼사와 밀접한 연결을 가지면서 自薦制를 통한 인사의 자율성 확보를 기반으로 낭관권을 형성하면서 각 부서에서의 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낭관들은 자신들의 의견이 공론에 바탕한 것이라는 점에서 낭관권 행사의 명분을 찾고 있었다. 각 曹에서의 일이 공론에 따라야 한다는 인식은 낭관들의 인사 원칙인 자천제의 이념에서부터 나타났다. 능력보다는 인품을 강조하는 새로운 인사 이념에서 실시된 자천제는 인품은 동료들이 잘 안다는 인식과 더불어 이 방법이 다수의 의사를 수용한 공론에 의한 인사라는 인식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은 “吏曹郎官은 極遷의 자리이므로 천거된 자가 物望에 합당한 연후에 천망된다”라는 사간원의 지적에서 잘 나타난다.0445)≪明宗實錄≫ 권 24, 명종 13년 정월 임자. 이는 자천제가 물망 즉 공론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임을 잘 보여준다.

 공론에 의한 천거인 자천제로 인선된 낭관들은 당연히 각 부서의 일을 공론에 입각하여 처리해야 했다. 그 한 예로 명종 13년(1558)에 보이는 이조 낭관들이 “外議가 이 사람은 이 직에 가하다 하고 저 사람은 저 직에 불가하다”0446)위와 같음.라고 외의, 즉 공론에 따른 인선을 위해서 당상관들과 다투는 기록은 그러한 낭관들의 노력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낭관들의 공론 수용 태도에 대해서 당상관들은 비난도 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공론에 의한 결정을 바람직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중종 39년(1544) 吏判 申光漢이 贊成 擬望을 놓고 “이 일은 마땅히 衆論을 두루 얻어야 하는데 중론을 모르니 어찌해야 하는가”0447)≪中宗實錄≫ 권 104, 중종 39년 8월 기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그 대표적인 예였다. 여기의 중론 역시 공론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낭관들이 공론 수용의 기능을 하자, 李珥는 “淸議가 낭료에게 있고 장관에게는 없다”라고 표현했다.0448)≪宣祖修正實錄≫ 권 16, 선조 15년 정월. 이러한 표현은 낭관들이 삼사와 더불어 공론을 수용하는 기능을 하고 있음을 잘 지적하고 있다.

 결국 낭관들은 낭관권을 토대로 공론 수용 기능을 하고 있었다. 이는 삼사가 공론을 수용하여 이미 결정된 사항에 대해서 견제를 가하는 것이었는데 비하여, 낭관들은 실무의 결정 과정에서 공론을 반영하는 것으로 한 단계 진전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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