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2. 세도정치의 전개
  • 2) 헌종대의 세도정치
  • (2) 헌종 친정기(헌종 7년∼14년)

(2) 헌종 친정기(헌종 7년∼14년)

 김조순이 죽은 뒤 그 가문의 중심인물이었던 김유근이 헌종 6년(1840) 12월에 사망하자 그 위치를 동생인 김좌근이 이어받았다. 그는 관직으로는 헌종 7·8년에 이조참판을 거쳐 왕의 인사 특명에 의해 공조판서·병조판서·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며 그 후 줄곧 각조의 판서직을 옮겨 다녔다. 한편 김좌근이 아직 나이가 많지 않았던 상황에서 그의 6촌 형제인 金興根이 또 적지 않은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김유근이 사망한 뒤로 국정을 가장 적극적으로 주도한 인물은 순조의 유촉을 받은 조인영과 그 세력에 의해 뒷받침된 조만영의 아들 趙秉龜였다. 그리고 헌종 12년에 조병구가 죽은 뒤로는 조득영의 아들 趙秉鉉이 권력의 중심을 이루었다.

 위와 같은 인물들을 중심으로 한 권세가들은 서서히 그 경쟁을 격화시켰다. “헌종이 친정을 시작한 이후 조정이 갈라서게 되었다”는 주장을 조병현이 입에 올렸다는 반대파들의 공격은, 조만영 가문 세력과 김조순 가문 세력의 정치권력을 둘러싼 경쟁 관계가 이 때에 격화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조병현은 헌종 10년 4월 이후 試官으로서 응시자 閔達鏞의 과거 부정에 대한 책임으로 인해 맹렬한 공격을 받아 처벌까지 받은 일이 있었는데 이 때의 조병현에 대한 공격도 단순한 과거 문제로 인한 것이 아니고, 그의 정치적 입지에 대한 공격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민달용이 처벌받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12년 정월에 그 아들 민영직에 의해 억울하다는 격쟁이 일어났고, 당사자 조병현이 나서서 그것을 조정에 보고하는 상황도 민달용 사건이 정치적 문제였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반면에 헌종 10년 8월에는 徐光近·閔晋鏞 등이 역모를 꾀했다 하여 조성된 긴급 상황 속에서, 대신직에서 물러나 있던 조인영과 그 계열 인물인 권돈인이 다시 현직에 복귀하였다. 이 옥사의 처리 과정에서 모의에 참여한 인물들이 김유근·김홍근을 추켰다는 말이 나와 그 가문에 적지 않은 위협을 가하고 김흥근과 김좌근이 한때나마 고향으로 퇴거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조인영은 그 해 정월에 권돈인에 의해 발론된 宋能相을 遺逸로 다시 인정하는 문제에 대해 조정 신하들의 의견을 모으게 하였지만, 김흥근을 비롯한 대부분의 신하들이 의견을 내놓지 않는 방식으로 반대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것 역시 조병현이 공격당하는 등 수세의 입장에 놓여 있던 조인영 세력이 민진용의 옥사 사건을 계기로 공세적인 입장으로 변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김조순 가문 쪽에서는 헌종 6년 9월 이지연 형제를 도태시켰던 이재학이 다시 나서서 새삼 이지연 등의 잘못을 거론하는 등 반격을 가하였으나 오히려 행동이 규례에 어긋났다는 이유로 자신이 방축당하였으며, 다음 달에는 이지연의 아들들에 대한 삼사의 공격이 철회되었다.

 그러나 헌종 13년 10월에 前正言 尹行福이 조병현을 權奸으로 지목하여 공격한 것을 계기로 삼사와 賓廳의 탄핵이 빗발친 끝에 조병현은 유배되었다. 이 때의 죄목은 그 개인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아들들의 진출이 너무 빠른 것이 지적되는 등 가문의 문제로 제기되기도 하였다. 이에 앞서 같은 해 7월에는 중전에게 병이 있다는 이유로 士族 처자를 후궁으로 들이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10월에 光山 김씨 金長生의 후손인 金在淸의 딸이 慶嬪으로 간택되었는데, 이것은 당시 중전의 친정인 남양 홍씨 가문과 권력을 나누어야 할 것을 우려한 조병현의 공작에 의한 것이라는 설명이 있다.385)金澤榮,≪韓史綮≫권 5, 憲宗紀 丁未 13년. 이러한 설명을 받아들인다면, 조병현에 대한 공격은 국왕의 결혼문제를 좌우할 정도로 조만영 가문의 권력 독점이 심화되는 것에 위기를 느낀 반대세력이 그 전 해에 죽은 조만영의 小祥이 지나면서 본격적인 견제 활동을 시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때에는 조병현을 공격하던 李穆淵까지도 그 탄핵의 문구에 허위와 불경이 있다 하여 조병현과 함께 유배되는 등, 두 세력 사이의 대립에 완충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조병현의 축출에 반해 이듬해 7월에는 대사간 徐相敎가 김흥근을 “조정을 주무르고 임금의 권한을 억눌렀다”는 죄목으로 공격하였다. 여기에 대한 다른 신하들의 태도는 그 전년에 조병현 탄핵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던 것에 비해, 헌종이 김흥근 탄핵을 이끌어 내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소극적이었다. 당시 관인들 사이에 김조순 가문 세력이 더 널리 뿌리내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헌종은 신하들의 탄핵을 더 기다리지 않고 김흥근을 삭직하였으며 그 논의를 회피한 대사헌 徐箕淳과 대사간 權大肯을 파직하여 김흥근 세력을 견제하려는 의도를 확실히 보였다. 이 때 헌종의 명령에 대해 계속 위패하다가 李濟達·林翰洙·金昌秀 등이 유배당하고, 趙雲卿도 김흥근 공격을 멈췄다는 이유로 金應夏의 탄핵을 받아 유배당했다.

 나아가 헌종 14년(1848)에 들어서, 국왕은 영의정 정원용을 파직하면서까지 여러 신하의 반대를 무릅쓰고 김흥근을 두둔한 柳宜貞을 처벌하였으며, 전 해에 조병현을 공격하여 유배당한 이목연을 새삼스럽게 압송하여 조사하는 등 김조순 가문 세력의 기세를 누르려는 명시적인 노력을 더욱 크게 기울였다. 그러나 왕실의 구성으로 보나 관인 집단의 역학관계로 보나 어느 일방의 독주가 허락되지 않는 상황에서, 대왕대비 회갑 등의 경사를 이유로 그 해 12월에는 조정 권력 싸움의 초점이었던 조병현·김흥근·김정희를, 이듬해에는 이기연·이학수를 모두 왕명으로 방송하고 이지연의 죄명을 씻어 줄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그간의 정쟁으로 축출당했던 각 세력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풀림으로써 다시 권력의 보합상태를 맞게 되었다.

 한편 헌종은 그 나름대로 국정운영의 주체가 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한 분위기는 그가 19세 되던 헌종 11년경부터 나타난다. 그 해 정월에는 국정에 소극적인 관인들을 비난했으며, 자신의 책임을 강조하면서 전국 국정의 폐단을 모아 대책을 세우라고 지시하였다. 이러한 명령은 순조가 국정 주도를 기도하던 시기에 시행한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헌종 11년 9월에는 선왕들의 업적을 엮은≪羹檣錄≫을 경연의 교재로 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듬해에는 같은 성격의 책인≪國朝寶鑑≫을 읽으면서 역대 왕정의 치적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또 3품 이상 관직자의 수행원을 줄이도록 한 것도 신하들의 위세를 눌러 상대적으로 국왕의 권위를 높이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헌종 12년 윤 5월에 순조와 익종의 초상화를 정비하여 봉안하게 한 것도 우연한 일은 아니었을 것으로 보이며, 나아가 13년 2월에는 정조 연간에 크게 정리된 이후 진전이 없던≪국조보감≫의 증수를 위해 정조·순조·익종에 대한≪三朝寶鑑≫의 찬집을 명하였다. 한편 같은 해에는 규장각 抄啓文臣을 뽑을 것을 명령하여 초계문신제도가 정조 사후 처음으로 운영되었다. 이 때 헌종은 정조의 뜻을 본받는다고 하였는데, 그 제도를 시행한 정조의 목적은 당대의 인재들을 近臣으로 양성하는 데 있었다.386)초계문신제도에 대해서는 鄭玉子,≪朝鮮後期 文化運動史≫(一潮閣, 1988), 149∼160쪽 참조. 이 초계문신은 그 이후 헌종 14년에 한 차례 더 뽑혔다.

 헌종은 자기의 세력 기반이 될 군사력의 양성에도 많은 의욕을 보였다. 11년 무렵에는 궁중에 內營을 설치하여 그 군속을 호위에 동원하는 등, 三軍門이나 총융청과 구분되는 자신의 친위병을 양성하려 하다가 12년 초에 들어 권돈인 등의 반대에 부딪혔다. 그러나 그 해 7월에는 궁중의 경비가 소홀하다는 이유로 摠戎廳을 摠衛營으로 승격하고 그 장관인 총위사에는 2품 이상 문신으로 새로 그 직에 천망된 인물과 군문대장의 직임을 맡은 인물을 교대로 천망하게 하였다. 이후 총위대장을 역임한 자들은 李惟秀·徐憙淳·李應植 등이었다. 이 총위영이 정조의 장용영 설치를 본뜬 것임은 헌종과 신하가 모두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총위영 소속 군병은 경제적으로도 특권을 받아, 그들의 난전 행위를 둘러싸고 설립 직후부터 기존 관서들과 분란을 일으켰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헌종은 기존의 김조순 가문 중심의 세력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자신의 외가인 조만영 가문을 상대적으로 가까이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13년에 일어났던 조병현의 탄핵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소극적인 입장을 취하다 신하들의 줄기찬 공격을 이기지 못하여 그를 유배하였지만 그나마 14년 12월에는 풀어 주었다. 그것에 비해 이듬해 김흥근 탄핵이 일어나자 곧바로 그를 유배하고 신하들의 탄핵을 도출하였던 것이다. 또한 김흥근을 두둔하는 유의정을 정원용 등의 반대를 무릅쓰고 유배하였으며, 전 해에 조병현을 탄핵하다 유배당한 이목연과, 경빈 김씨를 들이는 데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며 중전 홍재룡의 딸을 두둔한 李承憲을 잡아다 선왕을 무핍한 죄를 다시 물었다.

 그러나 위와 같은 헌종의 노력은 전체 국정의 운영에 별다른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예를 들어 헌종 13년 5월에 헌종은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면서 수령과 이서들의 탐학 행위를 방지하기 위해 그들의 부패행위에 대한 처벌을 엄하게 개정하려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수령과 이서의 탐학이 당시 국가의 제일가는 폐단으로 인식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헌종의 기도는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혀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

 이와 같이 헌종이 직접 정사를 행하던 시기에는 김좌근 중심의 김조순 가문 세력과 조인영·趙秉龜 중심의 조만영 가문 세력이 대립하였는데, 후자가 헌종의 후원을 이용하여 우위를 점한 가운데 깊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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