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종이 재위 16년째인 1849년 6월에 후사없이 죽자, 순조비 순원왕후의 명령을 받드는 형식을 통하여 사도세자의 후손 全溪大院君의 셋째 아들로 강화도에 거주하던 19세의 李元範이 즉시 왕위를 이어받았다.387)이원범이 국왕으로 선택된 배경에 대해서는 洪順敏,<19세기 왕위의 승계과정과 정통성>(≪國史館論叢≫40, 國史編纂委員會, 1992), 31∼33쪽 참조. 동시에 순원왕후가 헌종 초년에 이어 거듭 수렴청정하게 되었다.
그 후 오래지 않아 김조순 가문과 조만영 가문간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철종이 즉위한 다음 달에 그들 대립의 초점인 조병현에 대한 공격을 姜漢赫이 다시 시작한 이후, 李廷斗·李景在 등의 삼사 관원들이 조병현 일파를 극렬히 비난하였다. 죄목은 “위력을 보이고 은혜를 베푸는 국왕의 권한을 몰래 농간하고, 재화를 탐하고, 조정을 위협하여 제약하고, 국왕을 업신 여겼다”는 것이었다. 특히 이경재는 전년에 조만영 가문의 입장에서 김조순 가문의 김흥근을 탄핵했던 徐相敎와 그를 사주했다는 윤치영을 함께 공격함으로써, 자기들의 정치 행위가 김조순 가문과 조만영 가문의 대립임을 노골적으로 표출하였다. 그러한 공격에는 전·현직 대신인 정원용·金道喜 및 승정원과 의금부 관인까지 참여하였고 성균관 유생들은 捲堂을 일으켰다.
이 때 윤치영·서상교 외에도 금위영 대장 申觀浩를 비롯한 李應植·李能權·金鍵 등 4명의 武將이 조병현의 무리로 지목되어 함께 공격받았다. 신관호는 헌종의 약을 마음대로 짓게 하였다는 점이, 이응식은 철종을 모셔 올 때 먼저 연락하고 군사를 동원하여 직분에 어긋났다는 것이 죄목이었다. 권돈인도 신관호의 행위에 연루되어 자신의 무고함을 상소하고 고향으로 퇴거해야만 했다. 결국 대왕대비는 조병현을 유배하였다가 위리안치의 절차를 거쳐 8월에 사사하였고, 윤치영·서상교·이응식·신관호·이능권·김건 등도 유배하였다. 조병현 사사에 대한 죄명은 궁궐에 멋대로 출입하면서 임금의 덕에 누를 끼쳤고 백성의 피폐함을 초래했다는 것이었다.
반면에 비슷한 죄목으로 헌종대에 유배당했던 김흥근은 12월에 방면되어 판윤에 임명되었다. 또한 대왕대비는 순조대 윤상도 옥사의 배후 조정자로 결론이 났던 김양순에 대하여 奴戮의 처분을 내릴 것을 요구하던 삼사 언관들에게 그 주장을 그칠 것을 명령하여 철종 원년(1850) 10월에는 그 뜻을 관철하는 등, 자기 친정 가문을 위한 정치 활동을 노골적으로 전개하였다.
이리하여 김좌근과 김흥근을 중심으로 한 김조순 가문의 독주가 심화되었다. 헌종이 말년에 국왕권의 강화를 위해 추진했던 정책은 계승될 수가 없었다. 헌종이 궁중의 경비를 강화한다는 명분으로 승격시킨 摠衛營이 헌종이 죽은 다음달에 바로 摠戎廳으로 환원되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철종 2년 헌종에 대한 탈상을 앞두고 제기된 전례문제는 김조순 가문이 자기들의 권력 독점에 방해가 되는 세력을 몰아내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 사건은 철종이 왕통으로는 헌종의 뒤를 이었지만 家統으로는 순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까닭에 나타난 문제였다. 즉 영조의 다음 왕으로 추존된 眞宗이 왕통으로는 새로 즉위한 철종의 5대조가 되므로 종묘의 二昭二穆에 모셔 제사지내던 중에서 遷廟해야 할 것이지만, 가통으로는 3대조가 되어 천묘하는 것이 부당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권돈인은 이미 헌종의 국장 당시, 魂殿 祝式에 밝혀야 할 헌종과 철종의 관계를 논의하면서 그것이 예가 없는 경우라는 것을 지적하였거니와 이 때에는 廟數에 구애되지 말고 진종을 그대로 모시자는 의견을 개진하였다. 이러한 권돈인의 주장은 헌종이 죽은 뒤 그 후사를 순원왕후의 아들로 들이기 위해 헌종의 아버지뻘인 순조의 아들 항렬에서 선택한 김조순 가문 세력 및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처사를 典禮에 어그러진다고 비판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388)崔完秀,<秋史實紀-그 波瀾의 生涯와 藝術>(≪韓國의 美 17-秋史 金正喜-≫, 中央日報社, 1984), 211쪽. 결국 제왕의 가문은 가통보다도 왕통의 統序를 중시한다는 중론에 의해 진종은 천묘되었고 권돈인에게 극렬한 공격이 가해졌다.
이것은 단순히 전례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김조순 가문의 권력 독점에 대한 견제세력을 제거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권돈인에 대한 공격은 전례문제만이 아니라 평소 행적으로 비화되었다. 나아가 조병현의 심복이었다는 신관호 등의 무장과, 권돈인의 절친한 친구인 김정희의 형제, 나아가 吳奎一과 趙熙龍 부자 등 그 친지들에 대한 탄핵이 빗발쳤다. 특히 김정희에게는 권돈인을 중심으로 붕당을 형성하여 불법적으로 조정 일에 간여했다는 죄목이 붙여졌다. 그리하여 권돈인은 철종 2년(1851) 7월 강원도 狼川에 중도부처된 후 10월에는 경상도 順興에 유배되었으며, 같은 해 7월에 김정희는 북청에 유배되고 그 동생 金命喜·金相喜는 향리에 방축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김조순 가문의 독주는 더욱 심화되었다. 철종 2년 12월에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마치고 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으나, 그것에 앞선 윤 8월에 이미 김조순의 7촌 조카인 金汶根의 딸이 왕비로 책봉되어 있었다. 권돈인이 축출당한 뒤로 김조순의 조카인 김흥근이 한때 정사를 주도하였지만, 3년 4월에 우의정을 거쳐 4년 2월에 영의정에 오른 김조순의 아들 김좌근이 국정을 오로지 하게 되었다. 김좌근은 철종 즉위 이후 문반쪽의 관직뿐 아니라 원년 4월의 총융사, 10월의 금위대장을 거쳐 2년 4월에는 훈련대장에 임명됨으로써 군사력의 최고 실권을 장악하기도 하였다. 그 후 철종 만년까지 김좌근과 그 가문의 절친한 협력자인 정원용을 제외한 다른 사람은 한 명도 영의정에 오를 수가 없었다.
이후 중앙정국에서의 김조순 가문이나 김좌근 세력에 대한 견제 내지 비판의 움직임은 철종 11년 11월 慶平君 가 일으킨 논란 정도가 발견될 뿐이다. 경평군은 “국가의 기둥과 주춧돌이 되는 신하를 욕하며 헐뜯고 국가와 더불어 기쁨과 슬픔을 같이하는 지위의 사람을 얽어 무함하였다”는 내용을 중심 죄목으로 하여, 대신들의 건의에 의해 작호를 빼앗기고 이름도 고에서 世輔로 바뀌고 전라도 薪智島로 유배당했으며 그 양부 豊溪君과의 부자관계도 끊겼다. 그의 비판이 누구를 대상으로 하였는가는 구체적으로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김조순 가문 인물들의 발언과 동향을 볼 때 그들의 독주를 견제하거나 비난한 언행이 문제되었음에 틀림이 없다.389)이세보의 생애와 비판의식에 대해서는 진동혁,≪이세보 시조 연구≫(집문당, 1983) 참조. 그가 김조순 가문의 세력이 퇴조하는 고종 즉위 직후에 풀려난 것에서도 그 점이 확인된다고 하겠다. 경평군 공격에는 김문근·김좌근 등 최고 권력의 인물들이 직접 나섰으며, 비변사까지 새삼스러이 동원되어서 경평군이 부당하게 모았다는 재산을 피해자들에게 돌려주는 일을 맡았다. 그리하여 김조순 가문의 세력에게는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일과성 사건으로 지나갔다. 판중추부사 김좌근, 영돈녕부사 김문근, 훈련대장 金炳國, 어영대장 金炳冀, 도승지 金炳弼, 정언 金炳陸 등이 사직하고 물러났으나 언관과 대신의 전폭적인 두둔속에 철종의 간곡한 타이름을 받고 직위에 다시 나오는 것으로 마무리지어졌던 것이다.
당시의 집권세력은 철종 13년의 전국적인 농민항쟁 속에서도 오히려 정치적 공작을 이용하여 반대파를 제거함으로써 권력을 공고히 하는 방법을 썼다. 그 해 7월에 金順性 등이 역모 혐의로 처형되는 과정에서 完昌君 時仁의 아들인 종실 李夏銓이 그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기로 되어 있었다는 이유로 제주도에 유배당하였다가 사사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헌종이 죽은 후 철종을 추대할 때에 김조순 가문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원용에 맞서 권돈인이 후사로 내세웠던 이하전을 김좌근 등의 권력가들이 제거하여 후환를 없애려 한 것이라고 평가되어 왔다. 高宗이 즉위하고 興宣大院君이 집권하자 이하전이 곧 신원된 것을 볼 때, 이른바 김순성 등의 역모 사건과 이하전 제거가 김조순 가문의 집권세력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공작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철종은 별다른 역할을 할 수 없었으나, 국왕의 권한을 행사하려는 최소한의 움직임은 없지 않았다. 재위 10년경에 이르러서는 나이도 들고 정사를 본 경험도 쌓임에 따라 관리들의 부정을 공격한다든가, 신하들의 근무 상황을 신칙한다든가 하는 비교적 적극적인 정치 행위를 보였던 것이다. 철종 10년(1859) 3월에 지방관의 탐학하고 비루함을 탄핵하지 않는 대각 관원은 모두 파직하겠다는 비교적 강경한 명령을 내렸고, 執義 丁載榮이 현직 감사와 병사 5명을 포함한 관리를 무더기로 탄핵하자 모두 처벌하라는 답을 내린 후, 그를 일거에 대사간에 올려 쓴 것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그러한 움직임은 文臣講製의 제도를 다시 실시하는 것과 짝을 이루고 있었는데, 그것은 정원용의 건의를 받아들이는 형식을 띠고 있었으나 새로운 신료세력에 대한 철종의 비교적 적극적인 관심을 반영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나아가 12년 11월에는 김병국을 비롯한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훈련도감의 馬步軍과 別技軍 군사를 이용하여 武監局을 가설하고 궁궐의 숙위를 엄히 하려고 시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들도 별다른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철종대 조정의 큰 사건으로는 曺夏望의 문집 간행을 둘러싼 논란을 들 수 있다. 이 사건은 경상감사로 재직 중이던 曺錫雨가 자기 조부인 少論 조하망의 문집을 간행하였는데 그 안에 노론의 명분을 어기는 내용이 있어서 논란이 일어난 것이다. 즉 철종 5년 11월 진사 趙鍾植이 조하망 문집 중에 尹拯에 대한 제문이 ‘효종을 침핍하고 송시열을 무욕하여’ 그것을 간행한 것이 ‘斯文世道의 일대 변괴’라는 비판을 한 뒤, 李遇永을 필두로 한 성균관 유생들은 문집 판본을 못쓰게 만들고 조석우를 처벌하라는 요구를 하였다. 이후 논란은 전국으로 확산되어 宋時烈과 尹宣擧의 갈등 등을 둘러싸고 영남 및 8도의 유생들 사이에 한 번의 상소에 몇 천명씩 참가하는 대대적인 상소 논쟁이 일어나고, 조정에서도 삼사의 관원들은 물론 고위 관직자들이 대거 참여하는 논란이 벌어졌다. 이 논란은 조석우가 유배당하고, 정원용마저도 조석우 등에 대한 공격에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죄명으로 한때 不敍의 처분을 받는 사태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당시의 집권세력은 김좌근이 새삼스레 송시열의 華陽洞書院에 국왕의 은혜를 내릴 것을 주장하는 등 노론의 입장을 지켰다.
그 밖에 철종 6년 3월에는 호군 柳致明이 상소하여 사도세자에 대해 합당한 전례를 올릴 것을 주장하였다가 유배당한 것을 시작으로 사도세자에 대한 명분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었다. 유치명에 대한 비판은 그의 주장이 정조가 공식적으로 행한 바에도 위배되므로 의리에 어긋나고 선왕의 죄인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치명의 주장은 같은 해 5월에 李彙炳을 비롯한 10,432인의 경상도 유생들이 사도세자의 재회갑을 맞이하여 사도세자를 군주로 추숭할 것을 주장하면서, 정조의 뜻도 거기에 있었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린 것으로 이어졌다. 조정에서는 護軍 權載大 등과 같이 사도세자 추숭에 찬성하는 인물도 있었으나, 반대 의견이 주류를 이루어서 권재대에게는 즉시 유배의 처벌이 내려졌다. 반대파들의 논리는 대사헌 兪章煥의 비판에 나타나듯이 왕통은 眞宗에게 있는데 사도세자를 추숭하면 왕통이 둘이 되며, 정조도 사도세자에게 尊號를 올리는 것만은 줄곧 거절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앞 시기의 노론과 소론의 의리, 또는 노론 벽파와 남인 중심의 명분을 이어받아 붕당세력을 바탕으로 한 이러한 분란들은 전국적인 규모의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나 정작 조정에는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고 일시적인 사건으로 지나갔다. 사도세자를 높일 것을 주장하다 유배당한 유치명과 권재대가 논란이 채 가라앉지 않은 상태에 있었던 철종 6년 12월에 풀려나는 것에서도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정원용도 조하망 문집의 논란이 가라앉자 철종 7년 정월에 바로 서용되었고, 6월에는 논란의 와중에서 처벌받은 유생들도 사정에 따라 용서받았다. 조석우는 철종 8년 정월에 방송되었고, 이듬해 10월에는 조하망도 복작되었다. 현실적으로 조정의 권력은 노론세력 중 극소수에 의해 실권이 장악되어, 기층세력이나 그들의 주장과는 이미 괴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논쟁에 긴밀히 영향을 받을 여지가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국가 권력에 도달한 사람들의 수가 극도로 축소되고 기층사회와 괴리된 상황속에서 사회 통합은 급속도로 해체되어 갔다. 단편적으로 나타나는 자료들만을 보더라도 철종 12년에는 민심이 혼란해지고 소동이 일어나서 조정의 관인 중에도 낙향하는 자가 있음이 임금과 정승간에 논의되었으며 일본어 통역의 개인적 편지가 민간에 전파되어 민심을 흉흉하게 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철종 13년에 전국에서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난 농민항쟁은 그와 같은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를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이 사태는 광범위한 사회 변화 속에 중앙정부가 딛고 있던 위치의 약화를 그대로 드러나게 한 것이었으나, 중앙 정국의 권력 관계에 커다란 변화를 불러오지는 않았다. 그것 또한 중앙 정국의 움직임이 사회의 전반적인 변화에 대해 전 시기보다도 훨씬 괴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결정적 타격이 가해져 모든 통치체제가 와해되기 전까지는 오히려 사회의 격동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대왕대비의 선택에 의하여 불시에 왕위에 오르게 되었던 철종의 재위기간에는 대왕대비의 친정인 김조순 가문이 경쟁세력을 도태시킴으로써 헌종대 후반의 위축을 만회하고 앞 시기에 비해 훨씬 더 권력을 독점하였다.
<吳洙彰>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