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三政」은 정부가 조세의 형태로 민간에서 거두어 들였던 항목 중에서 田結稅를 거두는 문제와 관련한 田政, 軍役稅의 수취와 관련한 軍政 그리고 還穀(혹은 還政)이라 불린 3가지 정책을 하나로 묶어 일컫는 말이다.
조선 후기 부세항목은 삼정 외에도 雜役稅가 있었으나, 삼정은 여러 형태의 부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었다. 18세기 이후 국가가 거두어들인 수입의 대부분은 전결세·군역세·환곡에서 조달되었으며, 세 항목들은 자연스럽게 국가의 중요한 재원으로 인식되었다. 때문에 삼정을 통하여 조선 후기 부세정책의 대체를 살필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436)조선 후기 수취제도의 연구와 관련하여 연구사를 정리한 것으로는 다음의 글들이 있다.
鄭演植,<조선후기 부세제도 연구현황>( 근대사연구회 편,≪韓國中世社會解體期의 諸問題≫, 한울, 1987).
方基中,<收取制度ㆍ民亂硏究의 現況과 국사 敎科書의 敍述>(≪歷史敎育≫39, 1986).
韓榮國,<朝鮮後期 收取制度와 그 硏究>(≪朝鮮後期 社會經濟史硏究入門≫, 民族文化社, 1991).
그런데 부세불균과 과도한 수취로 말미암은 삼정의 파행적인 운영은 광범위한 농민층의 경제적인 몰락과, 유리를 촉진하였으며, 신분제의 동요 현상 등 사회적인 문제도 야기시켰다. 뿐만 아니라 지주·전호 간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농민층은 끝내 정부의 과도한 수취에 대하여 시정 혹은 수취제도의 개선을 요구하면서 농민항쟁을 일으켰다. 이 때 농민들이 내세운 내용은 대체로 삼정의 폐단을 이정하는 데 집중되었다. 이는 조선 후기 부세가 삼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면서, 상호 연관되었으며, 조선 후기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과도 직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세 운영에서 드러나는 문제점들은 18세기 후반 이후 더욱 명확해졌으며, 그로 인한 폐단은 더욱 커졌다. 정부는 그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고, 논의를 주도하였다. 이 때 부세제도를 둘러싸고 다양한 논의가 진행되었으며, 三政釐正이 중심이 되었다.437)이 글은 18세기 이후 19세기 초반까지의 三政을 포함한 부세제도 이정책을 다룬 논문인 金容燮,<朝鮮後期의 賦稅制度 釐正策>(≪增補版 韓國近代農業史硏究-農業改革論·農業政策-≫上, 一潮閣, 1984)에 크게 의존하였음을 밝혀 둔다.
우선 전정의 문란에 따른 이정책은 2가지 측면에서 제기되었다. 量田制와 收稅制가 그것이다. 양전제는 조선 후기 토지 소유의 불균형과 관련하여 토지를 재분배하기 위한 전정 개혁의 중심적인 과제로 등장하였다. 그리고 수세제는 전세 행정을 의미하며, 양전을 한 후 각 지방의 結摠을 확정하고, 그것을 토대로 각 지방의 세를 민에게 배정하고 징수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수세제는 양전제에 기초를 두고 있어서 양자는 서로 연관되었다.
조선의 양전제는 結負制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결부제하에서는 농지의 肥瘠 여하에 따라 같은 면적도 그 결의 실적이 달라졌다. 때문에 공정한 수세를 하기 위해서 자주 양전을 실시하여 수시로 소출과 농지 면적을 파악해야 했다. 양전이 부실할 때 기형적으로 수세제가 운영되거나, 수세하는 과정에서 폐단이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양전의 필요성 내지 양전법의 개정 논의가 제기되었다. 양전의 필요성은 양안의 문제점과 관련되어 제기되었다. 양안을 토대로 세를 부과해야 했으나, 오랜 기간 양전이 실시되지 못하여 田品·地形·地目이 바뀌어 양안은 실제 모습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였다. 또한 양안의 문란과 백지징세의 문제가 발생하였으며, 부세부과가 균평하게 못한 점이 지적되었다. 아울러 隱結·漏結이 많은 점과 농지의 경계와 소유권 분쟁들이 적지 않게 발생하고 있었다. 이외에도 정규적인 결세가 아닌 새로운 형태의 결렴이 부가되면서 농민의 세부담은 한층 커졌으나, 정부는 세입의 감소로 재정상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점들은 양전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하게 하였다.
더욱이 오랫동안 전국적인 규모로 양전이 실시되지 못하고 있었다. 양전의 부실은 전정의 폐단을 심화시켰으며, 삼정의 폐단과 연계되면서 사회 혼란의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게다가 농민들의 저항이 빈번해지면서 정조·순조 연간에는 전정 이정책으로서 양전문제가 진지하게 강구되었다. 이외에도 전반적인 수세문제와 연계시켜 토지제도 개혁을 주장하는 논자들도 등장하였다.
18세기 후반에 추진된 양전 방안은 점진적인 査陳과 改量이었다. 정조 3년(1779)에 양전을 행하지 않더라도 양전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방법이라 하여 점진적인 사진의 방식이 채택되었다. 정조는 이를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수령이 직접 조사하도록 명령하였다. 이 외에도 道臣들에게 일임한 개량의 방법도 점진적으로 시행하려 하였다. 정조대는 해당 지방이 원하는 바에 따라 사진과 개량을 선택ㆍ시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순조대에는 앞서의 방안들을 종합하려 하였다. 도신·수령들에게 시행의 방법을 일임함으로써, 현지의 사정에 알맞는 방안을 모색하여 편한 대로 점진적으로 이정토록 하였다. 이 방식은 부분적인 성과를 걷은 데 그쳤다. 양전의 명령이 내려졌지만 지방에서 시행되지 않은 예가 많았다.
한편 개량이나 사진으로 인한 폐단이 드러나기도 하였다. 이는 결부제하에서 전정의 폐단을 고치려 할 때의 한계였다. 결부제를 개혁하지 않고 효과적으로 양전을 시행하려면 전국적인 규모로 양전을 시행하는 수밖에 없었다.
전국적인 양전 논의는 순조 19년(1819)에 제기되었으며, 그 결과 이듬해에 양전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護軍 李止淵이 양전을 주장하고, 영의정 徐龍輔는 그것을 뒷받침하면서 양전의 불가피성을 강조하였다. 정부 대신들은 원칙적으로 찬성하였고, 양전을 시행하기 위한 방법과 시기를 논의하였다.
전국적인 규모로 양전을 하되 기한을 정하여 점진적으로 시행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그 과정에서도 실시 시기와 관련하여 재정·기강·민정·年事 등이 문제가 되었다. 이에 국왕은 전국적인 양전을 하되 도 단위로 시행하도록 하였으며, 우선 양남에 시행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처마저도 추진 주체들의 퇴진과 시기의 부적당함을 이유로 곧 중단되었다.
한편 전정의 폐단을 근본적으로 검토하려는 논의도 있었다. 이는 부세의 균평을 기하고,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세제의 원칙을 새로이 만들어, 그에 입각하여 운영 방법을 모색하자는 것이었다. 이는 頃畝制에 입각한 양전 시행론으로서 丁若鏞과 徐有榘 등은 대표적인 논자들이다.438)金容燮,<茶山과 楓石의 量田論>(위의 책)에 따르면 茶山 丁若鏞과 楓石 徐有榘의 농정에 대한 立論은 우리의 농업 현실을 바탕으로 체계화되고 봉건적인 경제 체제를 타파하고, 농업 근대화를 위한 논의로서 그 완성을 본 것이라고 하여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 때 제시된 양전책들을 크게 유별하여 따로 다루지 않고 다산의 주장만을 위주로 설명하려 한다. 유봉학,≪燕巖一派 北學思想 硏究≫(一潮閣, 1995)에 따르면 서유구는<擬上經界策>에서 궁극적으로 屯田論을 담고 있는 자신의 농업정책론을 펼쳤다. 그의 농업정책은 田制의 更張, 量田法 講究, 農政에 대한 措處 등이 내용의 큰 틀을 이루고 있다. 그의 논의는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정약용의 지적에 따르면 결부법은 농민에게 공정한 세를 부과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결부제하에서 田品과 年分의 원리가 서로 섞이면서 그 결함들이 중첩되고 있었다 한다. 그는 결부법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농지면적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세액을 부과할 수 있는 경무제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아울러 그는 새로운 양전법으로 전국의 농지를 정방형의 형태로 파악하려는 方量法과 그에 의하여 작성된 지적도를 작성하는 魚鱗圖法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정약용의 구상은 井田制의 시행을 전제로 한 농업 개혁 특히 농지의 재분배를 둘러싼 토지개혁과 관련을 맺으면서 제시되었다. 그의 토지개혁 구상은 삼정 특히 전정의 폐단과 밀접하게 연계되었다. 그의 구상은 17세기 이후의 제반 논의에 대한 종합적인 검토와 비판 위에서 이루어졌다. 이 때 제기된 토지개혁론으로 井田論·均田論·限田論 등이 있었으나, 실시 여부에 대한 당시 논자들의 의견은 크게 달랐다.439)朴贊勝,<丁若鏞의 井田制論 考察-≪經世遺表≫<田制>를 중심으로->(≪歷史學報≫110, 1986), 107∼108쪽에 따르면, 17세기 이래 토지개혁론을 둘러싼 논의와 주요한 논자들은 다음과 같다. 朱子의 井田難行說을 井田不可行으로 이해하고 이를 토대로 부세제도의 제도 개선을 주장한 韓元震·宋時烈 등이 있었으며, 井田制의 실시를 가능하다고 보았던 丁若鏞·李恒老 등을 비롯하여, 정전의 실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그의 취지를 살리는 방향에서 均田制를 주장한 柳馨遠, 토지 매매를 제한함으로써 均田을 실시하려는 李瀷, 토지소유의 상한선을 정한 限田制를 주장한 朴趾源·徐有榘·徐應淳 등이 있었다. 같은 맥락에서 田政의 개혁과 관련하여 17·18세기 토지개혁론을 함께 살핀 연구로는 李哲成,<17·18세기 田政運營 改革案의 理想的 原型>(≪民族文化硏究≫26, 高麗大, 1993)가 있다. 그 중에서 정약용은 이들 논의들을 검토한 후 일차적으로 협동농장제를 구상하여 토지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閭田制를 제시하였다.440)愼鏞廈,<茶山 丁若鏞의 閭田制土地改革思想>(≪奎章閣≫7, 서울大, 1983). 이후 그는 조선사회의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걸쳐 새로이 체제 개혁을 구상하여 정전제를 제시하였다. 그는 정전제를 현실적인 제약은 있다 해도 실시 불가능한 제도로는 여기지 않았다. 그는 점진적인 방법으로 정전제를 실시할 수 있으며, 이로써 토지소유관계의 변동을 꾀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당면문제인 삼정 중 전정의 문란을 해결하기 위해 정전제의 원리인 九一稅法을 도입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은 토지문제, 농업문제, 조세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었고, 궁극적으로 정전제를 실시하려는 것이었다. 그의 토지개혁론은 19세기 후반 농민항쟁기의 책문에 답한<應旨疏>에서도 유사한 대책, 혹은 같은 유형의 대책이 제시될 만큼 후대에 영향을 끼쳤다.
다음으로 군역제의 동요에 따른 이정책을 들 수 있다. 임란 후 군사제도의 변동에 따라 군역제의 내용도 변하였다. 조선 후기 군역제는 군역대신에 포를 거두었으며, 재정적인 측면에 중점이 주어져 군역의 개념이 변질되면서 많은 폐단을 낳았다. 이는 조선 후기 사회의 혼란을 초래하고, 농민들의 저항을 일으킬 만큼 심각한 상태에 도달하였다. 위기 의식을 느낀 지배층은 새로운 대책을 마련하려 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수습 방안이 논의되었다.
이 때 지배층들은 크게 3가지 방향에서 수습 대책을 제기하였다. 우선 피역행위를 봉쇄하고 규정을 고쳐 기존의 군역제를 유지, 재건하려 하였다. 다음은 현실적으로 모순이 많고 불합리한 군역제를 전면적·근본적으로 변혁하여 새로운 제도를 마련하려는 것이었다. 마지막은 현실적으로 변동하고 있는 군역제를 인정하고, 폐단을 최소화하여 수세의 안정을 꾀하려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군정이정책은 개혁론의 차원에서 제기되었으며, 戶布(錢)論·結布(錢)論·口錢論(丁布論)·游(儒)布論이 주류였다.441)良役變通論ㆍ均役法을 중심으로 한 그간의 연구 성과는 대략 다음과 같다.
朴廣成,<均役法施行이후의 良役에 대하여>(≪省谷論叢≫3, 1972).
車文燮,<壬亂以後의 良役과 均役法의 成立>上·下(≪史學硏究≫10ㆍ11, 1977).
鄭萬祚,<朝鮮後期의 良役變通論에 대한 檢討-均役法 成立의 背景->(≪同大論叢≫7, 1977).
―――,<肅宗朝 良役變通論의 展開와 良役對策>(≪國史館論叢≫17, 國史編纂委員會, 1990).
金容燮,<朝鮮後期軍役制 釐正의 推移와 戶布法>(≪省谷論叢≫13, 1982).
金鐘洙,<17세기 軍役制의 推移와 改革論>(≪韓國史論≫22, 서울大, 1990).
金玉根,<조선시대의 군역과 균역법>(≪한국의 사회와 문화≫18,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91). 숙종대를 거쳐 경종과 영조대에 이르면 군정의 폐단은 더욱 심해지고, 그것을 수습하는 문제가 한층 절박해졌다. 앞서의 개혁안들은 관료들의 반대로 실행할 수 없게 되자, 소극적인 개량책인 減疋均役論을 이은 균역법이 최종적인 안으로 채택되게 되었다.
군역제는 균역법 제정 이후<良役實總>과 <均役事目>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이 조치들은 額內의 국역과 사모속의 역가를 동일하게 하여 歇役으로 투속함으로써 발생하는 역폐 및 피역과 부세불균의 현상을 제거하려는 것으로 일시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양역실총>과<균역사목>은 각각 수포군의 정액과 수포의 균일화에 주력한 것이었고,442)鄭演植,<17·18세기 良役均一化政策의 推移>(≪韓國史論≫13, 서울大, 1985). 한편으로 국가의 세입을 보장하는 선에서 마련된 것이었다. 따라서 피역을 근본적으로 막지 못하였으며, 부분적으로 피역자를 사출하는 효과를 거두는 데 그쳤다.
이후 사모속의 폐해는 다시 광범해졌고, 민의 역부담도 늘어갔다. ‘軍多民少’라는 편중된 부세부과 현상을 극복하지 못하고, 첩징의 폐단도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균역법 이후에도 피역현상과 첩징과 같은 군역제의 폐단은 철저하게 제거되지 못하였다. 군역을 진 양인의 고통은 전과 크게 다를 바 없었고, 군정의 폐단이 커지면서 오히려 고통을 가중시켰다. 이로써 군정문란 현상은 다시 재연되었다.
균역법은 역을 고르게 하여 모든 양인의 역부담을 균등히 하지도 못하였으며, 수포의 균일화를 추진하면서 1필로의 경감 조치를 취한 조치였지만, 이러한 것도 점차 무너져 버렸다. 실질적으로 군역세가 증가하여 군역을 진 농민들의 부담은 늘어났으며, 그로 말미암아 농민 경제는 파탄상태였다. 다산 정약용의 詩<哀絶陽>도 이 시기 군정의 폐단을 극렬하게 비판한 것이었다.
균역법 이후에도 정부가 양역 이정문제를 당면 정책으로 삼지는 않았으나, 삼정을 비롯한 각종 부세문제와 관련하여 관심을 보이고 있었으며 농민층의 동향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 정조·순조 연간의 농정에 대한 求言敎·詢問·民隱에 대한 조사 보고서의 지시 등과 정조 10년(1786)의≪所懷謄錄≫, 정조 22년의<民隱疏>, 정조 22·23년의<農政疏>, 순조 9년(1809)의<各道民弊冊子>, 순조 11년의<各道陳弊冊子>등은 그러한 측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암행어사를 자주 파견하여 실제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행정을 감시·파악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순조 초 함경도 端川의 농민항쟁은 군정의 폐단과 관련하여 발생한 사건이었으며, 순조 11년 평안도 지역에서 발생한 농민항쟁도 군정을 포함한 삼정의 문란이 중요한 원인이었다. 그러나 군정의 폐단에 대한 정부의 대책은 기존의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폐단이 심한 곳을 대상으로 호포론을 제기하거나 혹은 지역에 따라 부분적으로 실시하는 정도였다. 이것마저도 제도 내에서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허용되었다. 같은 맥락에서 軍布契·軍役錢 등의 편법도 제도의 근간을 무너뜨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정부가 묵인하였다. 이는 미봉적인 대책이었으나, 삼정이정책에서 口疤 혹은 洞布制를 제시하는 토대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환곡의 이정을 둘러싼 논의를 들 수 있다. 환곡은 18세기에 들어와 환곡의 양이 급격히 늘어나고, 운영의 문제와 관련하여 그 폐단들이 거론되었다. 이 때 기존의 운영 방식을 개선하려는 논의도 있었으나, 보다 근본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새로운 제도를 모색하려는 움직임들이 나왔다. 이 때 새로운 제도로 거론된 이정책은 조선 초 이래 자주 거론된 社倉制·常平倉이었다.
조선 후기 진대를 위해 이용되던 환곡이 재정에도 사용되면서 환곡 운영에 따른 폐단이 발생한 것 외에도 감사·수령·이서 등이 운영 과정에 개입하고 있었으므로, 환곡의 운영은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환곡 운영 과정에서 수많은 형태의 부정행위들이 나타났다.
환곡의 폐단은 취모보용과 환총제에 따른 환곡 부담의 증가, 환곡의 면제·頉還에 따른 환곡 부담의 편중, 곡물과 함께 화폐를 이용하는 것 등이 원인이었다. 이러한 문제점들은 환곡의 비정상적인 운영을 초래하였으며, 그에 따른 폐단을 가중시켰다.
18세기 중후반에 이르러 지역마다 환곡을 보유한 양이 크게 차이가 났다. 이와 관련하여 환곡이 많은 곳이나 적은 곳은 물론하고 환곡의 분급과 관련된 문제들이 늘 지적되었으며, 아울러 환곡의 移轉·移貿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특히 정조 연간에는 환곡 운영의 문제가 광범하게 논의가 될 만큼 환곡의 폐단이 더욱 커졌다. 전정·군정의 문제와 함께 환곡의 폐단이 사회적인 문제로 떠올랐으며, 국왕은 거의 모든 구언교·윤음 등에서 그러한 문제를 언급하였다. 특히 정조 19년의 還餉策問은 환곡의 폐단이 심화되자, 왕이 단일 항목에 대한 대책을 집중적으로 묻는 것이었다. 정조대의 응지농정소는 광범위한 대책을 논한 것이었으나, 그 중에 환곡도 주요한 항목으로 등장하였다. 이외에도 개별적으로 환곡의 이정을 논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환곡의 이정은 오랜 기간 크게 2가지 방향에서 논의되었다. 환곡제도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혁하려는 것과 현행 환곡제를 유지하면서 문제되는 부분을 개선하려는 방식으로 나뉘었다.
우선 환곡제의 이정방안으로 토지개혁을 전제로 한 平糴(常平)制·社倉制의 실시를 주장하는 자들이 있었다. 평적제는 상평창제도를 개편하여 환모수입에 대한 급대방안을 마련하고, 구전이나 호포 등 별도의 조치를 취하자는 것이다. 사창제를 주장하는 측은 환곡제는 혁파하고, 급대방안으로 정부가 출자하여 衙屯·營屯 등을 설치함으로써 세를 거두어 환모의 수입을 대신하자는 것이었다. 이들 방안은 피폐해진 농민경제를 안정시키고 농민을 구제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한편 소변통의 방안은 환곡제의 기능을 살리면서 기존의 폐단만을 고치는 방안이었다. 환모수입이 이미 국가재정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대변통의 방식은 급대방안이 문제였다. 따라서 환모 수입을 보전하면서 운영하는 방식에서 해결점을 찾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환곡 문란의 원인으로 지적되는 수많은 환곡 구관아문을 호조로 일원화하고, 穀名도 통합하여 합리적으로 경영하는 방안을 대책 중의 하나로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제안들은 그야말로 논의에 그쳤으며, 어떠한 조치도 이끌어 내지 못하였다. 때문에 환곡의 이정문제는 여전히 남게 되었다.
순조대에도 여전히 부세문제에 대한 대책들이 강구되어, 구언교에 대답하는 형식의 時務疏를 제출하도록 하거나 혹은 陳弊冊子를 작성하기도 하였다. 그 중에 환곡의 이정방안도 포함되었다. 한편 순조 4년(1804)과 5년 사이에 대변통의 하나로 제시된 사창제를 실시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우의정 李敬一이 朱子의 사창제와 조선의 환곡제를 종합하여 취모를 하는 사창제를 제언하였다. 이는 정조대에 진행되던 논의를 일보 전진시킨 것이었다. 사창절목을 만들어서 논의를 거치고 정부는 이를 시험적으로 양남·양서에서 실시키로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의견은 감사들의 반대에 직면하였다. 관이 주도권을 향촌민들에게 넘겨줄 때 수많은 폐단이 발생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관이 관장하던 운영권을 넘겨주었을 때, 鄕君子들은 사창을 빙자하여 小民들을 핍박하게 되며, 관의 명령을 어기는 폐단이 발생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민정을 내세워 반대하기도 하였다. 대소의 민정이 엇갈려서 강제로 실시하는 것은 어렵고, 흉년인 때를 당하여 斂民을 논할 때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질적인 이유는 사창을 실시할 때 환곡에 의존하던 지방 관아의 재정수입이 감소하게 되고 생활 수단의 하나로 삼고 있던 지방관청의 이서들의 이해가 엇갈리게 되는 까닭이었다. 이 논의 또한 철종조까지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
한편 소변통은 좌의정 徐邁修에 의하여 제기된 것으로 기존의 논의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들이 지적한 환곡의 폐단은 당시의 폐단으로 들어지는 모든 내용을 포괄하였다. 환총을 둘러싼 지역간의 불균, 환곡 분급 대상의 선정과 그에 따른 불균, 상정가 등의 운영의 불합리, 운영상의 부실 등이었다. 말하자면 환곡의 폐단은 환곡의 불균과 운영의 불합리화에 있다고 파악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환곡의 폐단을 근본적으로 고치는 것보다 지엽적인 현상을 치유하는 정도에 머물고 있어서 문제는 여전히 남았다. 우선 곡총과 호총을 비교하여 균평하게 하고, 京司에서 필요한 경비는 穀在邑에서 ‘從實作錢’해야 한다는 것이었으며, 穀簿의 명색은 간소화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방안은 현상적으로 드러난 환곡의 폐단을 제거하려는 소극적인 방법이었다.
특히 환곡 운영의 폐단과 관련한 농민들의 소요가 점차 현실적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순조 11년 谷山지역 농민들의 항쟁은 대표적인 예이다.443)金容燮은 谷山의 농민항쟁을 軍政의 폐단과 연관지었으나, 韓相權은<1811년 황해도 곡산지방의 농민항쟁>(≪역사와 현실≫제5호, 한국역사연구회, 1991)에서 농민항쟁의 주요한 원인으로 還穀의 문란을 들고 있다. 이후에도 환곡의 폐단은 여전하였으나, 정부는 처방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으며, 논의마저도 제대로 추진하지 못하였다. 철종조 초반에 환곡의 減摠에 대한 언급과 환곡의 폐단을 고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이것도 부분적으로 문제를 고치는 수준에 그쳤다. 이러한 상태에서 환곡의 폐단은 더욱 커졌다.
한편 이러한 환곡의 폐단과 관련하여 종합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논한 자로서는 정약용을 들 수 있다.444)丁若鏞의 환곡에 관한 개혁론을 다룬 연구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愼鏞廈,<丁若鏞의 還上制度改革思想>(≪社會科學과 政策硏究≫3-2, 1981).
韓相權,<18·9세기 還政紊亂과 茶山의 改革論>(≪國史館論叢≫9, 國史編纂委員會, 1989).
鄭允炯,<茶山의 還上改革論>(≪茶山의 政治經濟思想≫, 창작과비평사, 1990). 그의 환곡에 대한 개혁론은 還上論, 還餉議,≪經世遺表≫의<倉廩之儲>,≪牧民心書≫의<穀簿>를 통하여 그의 환곡에 대한 인식의 변천이 잘 나타나 있다.445)이외에도 정약용의 환곡에 대한 인식을 살펴볼 수 있는 것으로는<應旨農政疏>
<公州倉穀弊政><夏日對酒>등이 있다. 정약용의 환곡의 인식에 대한 변화는 韓相權, 위의 글에서 자세히 다루었다. 그는 환자론과 환향의에서는 원칙적인 측면에서 환곡을 논의하였고,<倉廩之儲>에서는 환곡과 상평창제도를 골격으로 삼아 부분적으로 사창제를 보완하는 내용으로서 이상적인 환곡 개혁을 주장하였다. 한편<穀簿>에서는 현실적인 측면에서 환곡 운영을 개선하려는 의도하에 수령의 환곡 관리를 우선하였다.
한 개인에게 있어서도 환곡 운영에 대한 대책의 방향이 달라질 만큼 18·19세기 환곡 운영은 크게 변화하고 있었다. 정부는 이러한 변화를 쫓아가지 못하고 부분적으로 절목을 마련하거나 혹은 암행어사를 파견함으로써 감시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앞에서 살핀 바와 같이 조선 후기 논자들은 사회의 제반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것을 분석하여 개혁의 방향을 세웠다. 이 논의들은 조선 후기 사회 개혁에 대한 대안으로 자리를 굳혔으며, 개혁론으로 유형화되었다. 당시의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폐단에 대한 논자들의 지적은 거의 유사하였다. 그러나 동일한 사회현상에 대하여 사회를 진단하고 처방을 내리는 것은 각기 달랐다. 이는 사회 개혁에 대한 입장의 차이로 나타났다. 이는 부세제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보다 근본적인 처방을 요구하는 大變通(大更張)의 측면과 부세제도에서 폐단을 일으켜 문제가 된 부분에 한정하여 처방을 하는 것이 별 무리가 없다고 주장하는 小變通(小更張)의 방식으로 나뉘었다. 이로써 각각의 방식에 따라 조선사회의 개혁에 대한 가능성과 그 한계는 규정되었다. 이 중 어떠한 논의도 각각 한계를 지니고 있었으며, 그 한계는 곧 조선 후기 제한된 범위 내에서 사회 개혁을 추진하려는 지배층들이 지닌 역량의 한계이기도 하였다.
한편 농촌사회는 농민층 분화의 촉진으로 크게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신분제의 해체 과정에서 새로운 사회계층들이 등장하고, 농민계급이 재구성되었다. 그들은 사회적·경제적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심각한 계급적 대립을 일으키고 있었다. 지주와 전호, 부농층과 빈농층, 雇主와 피고용자층의 알력과 대립의 심화가 그것이었다. 이러한 측면은 抗租로 집약되었고, 나아가 농민항쟁 내지 농민전쟁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정약용이나 서유구의 농업개혁론은 19세기 전반 조선사회의 전반적인 틀에 대한 검토를 거쳐 완성되었다고 하겠다. 그들은 사회의 모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면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농업개혁론은 실천으로 옮기지는 못하였다. 결과적으로 농민경제의 파탄과 계급간의 대립은 수습되지 못하였다. 19세기 중엽 이후 사회 모순이 폭발하게 되었으며, 전국적인 농민항쟁과 농민전쟁이 일어났다.
19세기 중엽 이후 농민항쟁이 자주 발생하게 되면서, 농민경제의 안정과 농업 개혁에 대한 요구는 더욱 커졌다. 정부는 철종 13년(1862)의 농민항쟁과 관련하여 그 수습책을 구체적으로 강구하기 위하여 三政策問을 제기하였으며, 위정자와 지식인들은 그에 대한 응지삼정소를 수집하고, 그를 바탕으로 三政釐正廳의 대책을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논의된 개혁 방식은 앞서 제시한 두 가지 방향으로 나뉘었다. 이 때의 개혁 방안은 단순히 前代의 정약용이나 서유구 등의 방안을 적용하려는 차원에서 벗어나 나름대로의 방안을 마련하려 한 것이었다. 물론 이들이 제시한 개혁 방안은 논자들이 당시 사회에 대한 진단, 그리고 자신이 처한 정치적·사회경제적인 처지에 따라 달라졌으며, 토지제도 및 그와 관련한 경제제도·신분제도 등에 대한 논의도 다양하게 제기되었다.
특히 19세기 초반 삼정운영이 극한 문란상을 보이는 상황에서, 삼정의 폐단을 극복하기 위한 개혁책들은 이미 산발적으로 제기되었다. 미봉책이긴 하지만 정부도 폐단을 일으키거나 혹은 심각한 문제로 제기된 것에 대해서는 부분적인 수정을 가한다든지 아니면 어사를 파견하거나 수령으로 하여금 그 원인을 조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이러한 조처에도 불구하고 19세기는 ‘민란의 시기’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전국 각지에서 농민항쟁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이 시기의 농민항쟁의 원인으로 지목된 것은 삼정의 문란이었다. 따라서 정부는 그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에 직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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