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3. 부세제도 개선의 한계
  • 3) 군정이정책과 정책의 추진
  • (1) 군정의 구조적 문제와 이정책 수립

(1) 군정의 구조적 문제와 이정책 수립

 조선 왕조의 軍政은 정확한 軍案에 의거하여 군역을 부과하되, 수시로 양역사정을 실시함으로써 군역민의 부담을 공평히 하려는 방향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人丁에 특정한 역을 부과한다는 측면에서 군역도 분명 중세적 수취체제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16세기 이후 군역은 인정에 대한 신분적·경제적 억압제도로의 성격을 보다 분명히 해 나갔다. 즉 조선 초기에는 명분상으로나마 양반들도 군역 혹은 직역을 부담하였으나, 차츰 군역은 양인만이 지는 역과 동일시되었고, 上番立役을 통해 실현되던 것이 대부분 납포군화된 것이다.491)車文燮,<壬亂以後의 良役과 均役法의 成立>(≪史學硏究≫10·11, 1961). 나아가 18세기 무렵에는 군포가 입역자의 파악을 전제로 수취되지 않고, 각 지역에 할당된 軍摠을 준수 상납하는 총액제로 운영되었다.492)金容燮,<朝鮮後期 軍役制의 動搖와 軍役田>(≪東方學志≫32, 延世大, 1982). 따라서 양역에서 벗어나려는 여러 가지 형태의 피역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면 조금이라도 역가가 가벼운 곳으로 투속하려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군다민소’의 폐해가 초래되었다.493)鄭演植,<17·18세기 良役均一化 政策의 推移>(≪韓國史論≫13, 서울大, 1985).
金友哲,<均役法 施行前後의 私募屬 硏究>(≪忠北史學≫4, 1991).

 영조 26년(1750)에 실시된 均役法은 18세기 중엽 이후 한계점에 도달한 군정의 모순을 대변통이 아닌 소변통의 입장에서 극복하려 한 일시적 개선책이었다. 즉 균역법을 전후한 시기에는 군포를 양반과 양인의 구분없이 戶나 口를 단위로 부과하자는 대변통론의 戶布論이나 口錢論도 대두되었다.494)鄭萬祚,<朝鮮後期 良役變通論에 대한 檢討-均役法成立의 背景>(≪同大論叢≫7, 1977). 그러나 균역법은 양반 不役論을 고수한 상태에서, 연간 2필의 군포를 1필로 줄이고 절반으로 떨어진 군포 수입을 結作米와 海稅·隱餘結稅·選武軍官布에서 보충케 하는 정책이었다.495)鄭演植,≪朝鮮後期 ‘役摠’의 運營과 良役變通≫(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3).

 따라서 균역법이 시행된 지 얼마되지 않아 군정의 폐단은 재현되었다. 재력이 있는 부민과 요호들은 군안에 들어가는 것을 싫어했으며, 결국에는 모든 수단을 강구하여 군역으로부터 빠져나갔다. 유학을 모칭하고 勳裔로 위장하거나 군관이 되어 군역을 피하였다. 군안에 등록되어 자신의 군역뿐만 아니라 피역자의 몫까지 이중 삼중으로 떠맡아야 했던 가난한 농민들도 무거운 역을 피해 각급 관청에 투탁하거나, 양반가의 묘지기나 산지기·행랑살이 등으로 군역에서 빠지고 있었다.

 한편 균역법 실시 이후의 피역 현상은 개인적 차원을 넘어 집단적 차원에서 구조화되는 현상을 보였다. 즉 균역법 이후의 군포 수취는≪良役實摠≫에서 정한 京外 군안의 군액이 점차 고정화되면서, 군총에 의한 총액 징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각종 피역으로 闕額이 증가하고, 군포 수입 가운데 중앙으로 상납되는 비율이 높아지자, 지방 및 각급 관청은 재정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에 지방 및 각급 관청에서는 여러 가지 명목의 세원을 창출하여 독자적인 재원을 마련해 나갔다.496)鄭演植,<均役法 시행 이후 地方財政의 變化>(≪震檀學報≫67, 1989). 校院保率·各廳契房 등은 각 읍 단위에서 私設하였던 재정 보완책이었는데, 부담이 다소 적었기 때문에 정규 군액으로 편성된 군역민이 여기로 모여들게 되었다. 그 결과 한 읍의 궐액이 10중 7, 8에 이르고 군안은 허록될 수밖에 없었다. 여러 형태의 피역과 역가가 싼 헐역으로의 투속은 결국 황구첨정·인징·족징·첩징 등의 폐단을 다시 일으켰고, 가난한 농민들은 군안에 남아 군역을 지는 것을 死地에 나가는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497)≪備邊司謄錄≫24책, 철종 5년 윤7월 13일.

 이렇듯 19세기의 軍弊는 군포 수취의 신분적 성격, 군적의 허실화 그리고 총액제 운영 방식의 모순에서 비롯되고 있었다. 이에 향촌에서는 중앙에 상납하는 군포를 마련하기 위한 공동납적인 군포 납부 체계가 생겨나고 있었다. 한 마을의 上族과 下族 모두가 원금을 마련하고, 그 이자로 군미와 군포를 납부하는 軍布契나 토지를 마련하여 부담하는 役根田의 방식이 나타난 것이다. 또한 모자라는 군역을 전체 洞民이 채워넣으려는 洞布와 토지에 부과하는 형태인 結布制가 시행되기도 하였다.498)方基中,<조선후기 軍役稅에 있어서 金納租稅의 전개>(≪東方學志≫50, 延世大, 1986). 그러나 이러한 군포 납부 방식이 신분제에 입각한 군역 운영의 원리를 완전히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이는 오히려 군역 부담의 지역적 불균을 심화시키고 서리의 농간을 불러 일으켜, 농민층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결국 조선 정부는 철종 13년(1862) 농민 저항에 부딪치면서, 군정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 제시된 군정 구폐책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양역 대상의 연령을 정확히 준수하여 寃徵이 없도록 한다. 둘째, 중앙정부가 파악하지 못하는 募入軍官은 모두 原籍으로 환원시킨다. 셋째, 교원보솔·각청계방은 혁파하고, 모칭유생·가탁훈예는 구별하여 군액에 충당하며, 墓村成戶도 출역토록 한다. 넷째, 原額의 充丁을 기하되 구파(名疤) 혹은 洞布의 이점을 헤아려 군정을 운영한다. 다섯째, 각 읍의 군총과 호수에 따라 군액을 조정한다. 여섯째 폐단 재발시 처벌 규정 등이다.499)≪壬戌錄≫,<釐整廳謄錄>윤8월 19일.

 조선 정부가 제시한 군정이정책은 두 가지 측면에서 요약할 수 있다. 우선 중앙 정부가 파악하지 못하는 歇役 및 避役의 여러 형태를 모두 폐지함으로써 지방 단위로 지속되어 온 ‘군다민소’의 폐단을 시정한다는 것이다(첫째·둘째·셋째·다섯째). 다음은 군역 부과 방식에 있어서 종래 개별 수취를 원칙으로 하는 구파법과 19세기 후반 이미 상당 지역에서 관행화되고 있던 공동 납부 방식으로서의 동포법을 향촌민의 의견에 따라 적용할 수 있는 자율권을 주는 것이다(넷째). 전자는 피역 행위를 봉쇄하고 기존의 군역체제를 재건하려는 것이었으며, 후자는 현실적으로 변동하고 있는 군역 수취방식을 용인하면서 군포 수입의 안정을 꾀하려는 것이었다.

 요컨대 철종 13년(1862) 농민항쟁을 계기로 하여 조선 정부가 제시한 군정구폐의 지향은 명분론 고수와 현실 수용이라는 두 가지 측면을 모두 드러내고 있었다. 지방 재원 확보를 위해 마련되었던 사모속·계방 등 일체 명색을 혁파함으로써, 군정에 대한 중앙 정부의 통제를 강화시키고 각종 폐단을 제거하여 기존의 군역제를 고수하겠다는 것은 전자의 측면이며, 구파법을 부분적으로나마 포기하고 일반민의 군포 납부 대응책으로서 이루어지고 있던 동포법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는 점은 후자의 측면일 것이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볼 때 군정이정책은 군역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려는 것은 아니었으며 민란의 수습책으로서도 불충분한 소변통론적 지향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 동포제의 실시를 공식 인정한 것은 군역이 점차 신분적 부세의 성격을 벗을 수 있는 단초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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