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2. 상품의 유통
  • 1) 농촌장시의 발달
  • (3) 농촌장시의 발달과 시장권 확대

(3) 농촌장시의 발달과 시장권 확대

 농촌장시는 농촌의 소상품생산자가 상품유통을 매개하는 출발점이고, 또한 장시가 포괄하는 주변 촌락이 생산권이자 소비권인 재생산권으로서 기능하였다. 대체로 농민들은 교통관계 등을 고려하여 항상적으로 출입하는 장시가 정해져 있었고, 각 장시는 이러한 고객들이 거주하는 한정된 지역을 포섭하고 있었다.

 이러한 장시는 17세기 이후 상품화폐경제의 성장에 따라 더욱 발달하였다. 17세기 후반 이후에는 열흘장이었던 장시가 대부분 5일장으로 바뀌어, 전국의 장시는 한 달에 여섯 번 열리는 5일장체제로 단일화되었다. 또한 장시가 개설되지 않은 벽지에도 장시가 신설되었다. 이와 같은 장시의 발달은 정부의 장시에 대한 정책을 변화시켰다. 초기에 장시를 금압했던 정부는 점차 지방관의 차원에서 이를 허용하고 場稅를 거두어 지방재정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또한 지방관청에서 장세를 걷는 방식도 17세기까지는 현물로 받았으나, 18세기 이후에는 화폐로 받는 변화가 나타났다.

 이처럼 장시가 5일장체제로 단일화되면서 장시간에 연계관계도 자연적으로 생성되었다. 전주의 경우를 예로 들면 전주부 내의 大場인 南門外場·西門外場은 2·7일에, 小場인 北門外場과 東門外場은 4·9일에 각각 개시되었으며, 전주 부근의 參禮場은 3·8일, 鳳翔場은 5·10일, 仁川場은 2·7일, 石佛場은 1·6일, 上牙場은 3·8일, 利城場은 1·6일, 沃野場은 4·9일에 각각 열렸다. 여기서 보듯이 전주부 내의 장시와 전주 부근의 장시들은 서로간에 개시일을 달리하면서 장시간 연계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0963) 金大吉,≪朝鮮後期 場市에 대한 硏究≫(中央大 博士學位論文, 1993), 135쪽. 통상 한 군현 내에서 設場日을 달리하는 장시 사이는 하루안에 오고 갈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개별 장시는 비록 닷새에 한 번 장이 서지만, 한 군현 전체에서는 매일 장이 서는 형태로 각 장시망이 운영되고 있는 것이다. 장시망 운영형태를 이렇게 파악한다면, 18세기 후반 확립된 5일장체제는 미약하지만 한 군현 내에서 상설시장의 기능을 어느 정도 수행하고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장시 유통권의 형성 즉 5일장체제의 형성은 적어도 한 군현의 범위에서 교환이 일상적으로 진행되는 군현단위의 시장권이 형성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장시시장권은 18세기 이후 점차 확대·강화되어 갔다. 즉 군현을 단위로 한 시장권을 넘어 몇 개 고을을 묶는 시장권이 형성되고, 일부는 지역적 시장권을 벗어나 전국적 범위로 시장권을 확대해갔던 것이다. 예컨대 모시산지인 충청도 한산·서천·庇仁·藍浦·扶餘·鴻山·定山·임천의 장시는 褓負商들이 각기 하나의 시장권을 형성하여 교역했던 장시유통망이었으며, 전주 읍내장에서는 중국과 일본의 상품이 유통되어 나라 안의 ‘鉅市’라고 일컫고 있었다.

 장시간의 연계망이 확대되어 지역적 시장권이 형성됨에 따라 장시간에는 흡수·통합·신설·폐지라는 장시시장권의 변동이 나타났다. 18세기말 19세기초 경상도지역의 장시망 변동을 살펴보면, 大邑에서는 장시수가 감소하였고, 中小邑에서는 장시가 증가하였으며, 殘邑에서는 별다른 증감이 없었다. 대읍의 장시가 감소한 것은 1830년대 大場이 형성되면서 주변장을 흡수하였기 때문이고, 중소읍에서 장시가 증가한 것은 신설장시가 시장권 형성이라는 형태로 나타났기 때문이다.0964) 韓相權,<18세기말 19세기초 場市發達에 관한 基礎硏究-慶尙道地域을 중심으로->(≪韓國史論≫7, 서울大, 1981). 이러한 장시망의 변동은 경상도만이 아니라 영조 46년(1770)∼순조 30년(1830)의 전라도지역에서도 확인되며, 충청도지역에서도 동일한 변동양상이 확인된다.0965) 李憲昶,<朝鮮後期 忠淸道地方의 場市網과 그 變動>(≪經濟史學≫18, 1994).
金大吉, 앞의 책.

 또한 도시시장의 발달에 따라 도시시장을 연결하는 중간지점에 장시가 새로 생겨나기도 했다. 18세기 이후 교통발달로 인해 사람과 물자의 유통이 활발해졌고, 그 결과 주요 교통로에는 여행객들이 묵고 가는 店幕이 발생하였다. 이들 점막의 주된 이용자가 상인이었기 때문에 점막도 단순한 숙박시설에서 벗어나 상품교환이 행해지는 시장의 기능을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점막들 중에서 대도시 시장을 연계하는 중간지점의 점막들은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대부분 장시로 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대표적인 곳이 서울-원산 간을 잇는 대로변인 포천의 松隅店과 양주의 樓院店이었다. 점막의 장시화만 아니라 후술하듯이 해상교통의 발달에 따라 한강연안에 물자의 유통이 활성화되면서, 한강 상류를 오가는 배(水上船)가 수심이 낮은 여울을 통과하는 기간에 부정기적으로 열렸던 갯벌장이나 한강 하류의 포구들도 점차적으로 정기적인 장시로 발전하였다. 대표적인 곳이 남한강 연안의 白崖村, 북한강 연안의 홍천장·인제장, 그리고 한강 하류의 덕은장이었다. 이와 같은 점막의 장시화, 갯벌장·포구의 장시화현상은 결국 농촌 잉여생산물의 처분의 장으로서 성격을 지닌 농촌장시 외에 새로운 성격의 장시가 출현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즉 농촌만을 대상으로 한 장시가 아니라 대도시 시장을 연계하는 매개시장으로서의 장시가 18세기 후반 이후 주요 간선도로변에 발생하고 있었던 것이다.0966) 高東煥,<조선후기 京畿地域 場市網의 확대>(≪金容燮敎授停年紀念 韓國史學論叢 韓國古代·中世의 支配體制와 農民≫, 지식산업사, 1997). 이와 같은 새로운 성격의 장시의 출현으로 인해 18세기 후반 이후 전국의 장시시장권은 더욱 확대 발전할 수 있었다.

 한편 각 도별 장시 사이에서 유통되는 물품을 살펴보면, 각 도별 시장권의 결합 정도에 일정한 차이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표 2>는≪林園經濟志≫에 기록된 규모가 큰 장시 325개소에서의 거래물종을 전국 각 군현단위로 통합하여 비교한 것이다.<표 2>에서 알 수 있듯이 전국적으로 유통되는 상품 중에서 가장 많은 장시에서 유통되는 것은 미곡·면포·어물이었다. 그 다음으로 마포나 牛犢, 연초, 斗·牟·麥 등 잡곡류도 전국적으로 유통되었다. 이러한 미곡이나 면직물류에 비해 솥(釜鼎) 등 수공업제품의 전국적 유통은 상대적으로 비중이 낮았다.

 또한<표 2>에서 보면, 같은 도 내부에서라 하더라도 각 장시에서 교환되는 상품은 지역적으로 큰 차이가 있었다. 영남, 호남 등지에서도 이러한 편차는 나타난다. 그렇지만 평안도 장시에서 거래되는 물품은 거의 모든 장시에서 예외없이 교환되고 있었다. 또한 거래되지 않는 물품은 평안도의 대부분 장시에서 거래되지 않았다. 이는 평안도 내 장시에서의 상품교환의 내용이 상당한 정도 동일성을 보이는 것으로서, 평안도지역 내의 장시가 유기적인 연결망에 의해 하나로 통합되고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평안도지역이 단지 對淸貿易의 통로라는 대외무역시장으로서의 특성 외에도 평안도지역 자체 내의 튼튼한 시장권이 이미 성립되어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즉 평안도 내에서의 교환은 영·호남과 달리 군현이라는 자연경제의 울타리를 크게 벗어나 평안도라는 도단위의 지역적 시장권을 단위로 행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유통되는 물품도 대부분 수공업 생산품과 곡물, 그리고 연초라는 소비제품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평안도의 유통경제가 농업과 수공업생산에 기초한 부를 기반으로 형성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경기 호서 호남 영남 관동 해서 관서 관북
장시수
(가)
92
34
157  
59(6)
187  
55(2)
269  
72(1)
51
26
109
23
145
42
42
14
1,052  
325(9)



34
6
6
6
21  
14  
6  
6  
55  
24  
18  
19  
70  
65  
55  
54  
11
-
-
-
23
22
22
22
42
39
39
39
4
4
11
10
260  
175  
157  
156  
綿 花
綿 布
麻 布
苧 布
5
32
19
-
12  
10  
8  
6  
28  
41  
24  
19  
32  
68  
50  
20  
6
24
21
-
19
23
15
3
32
42
-
1
2
14
13
-
136  
254  
150  
49  
魚 物
牛 犢
煙 草
28
20
18
24  
13  
23  
29  
18  
15  
62  
56  
45  
20
11
4
21
23
22
39
32
41
14
12
13
237  
185  
181  
鐵 物
釜 鼎
鍮 器
紙 地
瓷 器
土 器
10
5
4
2
-
-
5  
-  
2  
1  
-  
-  
15  
1  
4  
18  
16  
30  
16  
5  
26  
18  
30  
24  
11
2
-
3
-
1
3
3
6
1
8
9
41
-
35
3
-
-
5
2
4
-
-
-
97  
16  
81  
46  
54  
64  

<표 2>19세기 전반 거래물품별 장시현황

*출전:≪林園經濟志≫倪圭志 권 4, 貨殖 八域場市(李永鶴,≪韓國 近代煙草業에 대한 硏究≫, 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89, 52쪽에서 재인용).
 비고:
  1) (가)항은 장시 가운데 거래물품이 기록된 장시수이다.
  2) (가)항의 ( )는 한 지역의 2개의 장시에서 거래물품이 적혀 있는 곳이다.

 이러한 사정은 평안도가 하나의 지역적 시장권을 중심으로 통합됨을 보여주는 것임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지역적 시장권을 침해하는 제세력으로부터 공동으로 대응할 수 있는 사회세력이 존재함을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19세기 전반 평안도에서는 全道的 규모의 지역적 시장권이 성립되고 있었고, 이는 순조 11년(1811) 발생했던 洪景來 주도하의 평안도 농민전쟁에서 군현이라는 고립적이고 분산적 통치단위를 넘어서서 전도적으로 주도층을 조직화시킬 수 있었던 중요한 조건이었다. 또한 평안도 농민전쟁 당시 농민군이 제시한 ‘西北民 차별철폐’라는 구호는, 당시 농민군들이 인식했든 안했든 간에, 단순한 정치적 차별철폐라는 슬로건을 넘어서서 평안도라는 지역적 시장권을 방어하려는 평안도지역의 제세력의 공동대응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0967) 高東煥,<1811∼12년 평안도 농민전쟁>(≪한국사≫10, 한길사, 1994), 69∼71쪽.

 이처럼 18세기 초반 장시개설이 지역적으로 확산되고, 장시간의 연계가 강화된 결과,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지역적 상품유통의 거점인 大場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인 대장이 경기 廣州의 沙坪場·松坡場, 安城의 邑內場, 交河의 恭陵場, 恩津의 江景場, 稷山의 德坪場, 전주 읍내장, 南原 읍내장, 昌原 馬山浦場, 平昌의 大化場, 兎山 飛川場, 黃州 읍내장, 봉산 銀波場, 博川 津頭場, 德源 元山場 등이었다.0968)≪萬機要覽≫財用編 5, 各廛.

 이처럼 대장의 출현과 더불어 지방장시에는 坐商들이 경영하는 상설점포가 광범하게 발전했고, 일부 장시가 순상업중심지 또는 상업도시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주요장시에는 매점업자이자 고리대업자인 旅客主人層들이 출현하였다. 이 여객주인들은 장시의 폐쇄성과 경제적 분산성을 극복하고 전국적인 국내시장 형성을 위한 전제조건을 조성하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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