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2. 양반서얼의 통청운동
  • 2) 서얼통청운동의 확대
  • (1) 18세기의 서얼통청운동

(1) 18세기의 서얼통청운동

 18세기는 여러 분야에 걸쳐서 한국사상 하나의 전환기로 이해되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전세기의 극심하였던 당쟁이 외형상으로나마 끝나자 노론 일당의 전제정권이 확립되었고, 경제적으로는 移秧法과 畎種法의 보급에 따른 농업생산력의 증대와 화폐의 유통 등으로 인한 상업활동의 활성화로 근대자본주의의 맹아가 나타나고 있었다고 일반적으로 인식되어 왔다. 또한 문화적으로는 實學의 영향으로 주자학적 세계관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사회적으로는 중간계층의 신분상승 욕구가 충만하고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서얼들은 양적인 힘의 증대와 법적 지위의 향상에 따라 陞班運動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특히 모계가 한미한 후궁의 아들이었던 영조가 즉위하면서 그들의 소통운동은 활기를 띠었다. 영조 즉위년(1724) 12월 大駕가 동문으로 나섰을 때 서얼 진사 鄭震僑 등 260여 인이 국왕에게 상소하였는데 그 내용을≪영조실록≫에 의거하여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182)≪英祖實錄≫권 2, 영조 즉위년 12월 병술.
≪癸史≫권 1, 영조 원년조에 의하면 鄭震僑 등 5,000인이 노상에서 상소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英祖實錄≫의 기사에 따랐다.

① 夏·殷·周·漢·唐·宋·明 등 역대 중국의 정통 황조에서는 서얼인 將相이 많았고, 고려 이전의 取人之規도 중국과 같았다. 그러나 조선 태종 때 右代言 徐選이 ‘서얼자손을 顯職에 임용하지 말도록’건의하였고 姜希孟이≪경국대전≫을 편찬하면서 서얼들의 과거와 벼슬길을 막아버렸다.

② 선조 초에 申賁 등 1,000여 명이 上章하여 원통함을 부르짖었는데 선조가 ‘葵藿向日 不擇旁枝 人臣願忠 豈必正嫡’이라 하여 그들을 동정하였다. 그 무렵 先正臣 李珥가 국경의 변고에 대한 대비책으로 서얼들을 허통하여 과거의 길을 열어주자고 건의하였다.

③ 인조 때 부제학 崔鳴吉은 玉堂의 동료 沈之源·金南重·李省身·李景容 등과 함께 서얼통용을 힘써 청하여 말하기를 ‘하늘이 재능 있는 자를 낳음에 귀천간에 차이를 두지 않았고 王者가 사람을 씀에 門地에 구애하지 않음은 천리상 당연하고 百王이 이를 바꿀 수 없다’고 하였다. 張維·金尙容·李元翼·尹昉·吳允謙 등 모두가 같은 뜻으로 서얼통용을 건의하였으며 몇 사람이 이의를 제기하였을 뿐 2품 이상 여러 신하들은 의견이 같았다. 일찍이 영부사 이원익이 홍문관의 箚子에 의하여 서얼이 등과한 후 요직은 허락하되 청직은 불허할 것을 아뢰어 왕의 재가를 받아 일대의 법률로 되었으나 그 후 잘 시행되고 있지 않았다. 그 때에 요직을 허용한다고 한 것은 戶·刑·工曹의 낭관 및 각 사의 장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 辛喜秀·沈日運·金宏·李慶善 등이 형조와 공조의 낭관으로 임용되었을 뿐 그후 40∼50년간은 숙종 때 李礥 한 사람만이 겨우 호조의 낭관으로 임명되었으나 여럿이 일어나 이를 배척하여 결국 체직되고 말았다.

④ 성종대 이후 걸출한 서얼들이 많았다. 예컨대 朴枝華·魚叔權·曺伸·李達·鄭和·林芑·梁大樸·權應仁·金謹恭·宋翼弼형제·李山謙·洪季男·劉克良·權井吉 등이다. 그러므로 서얼들을 뽑아서 쓰는 길을 넓게 열면 수백 년 동안 원한을 품고 죽어간 많은 사람들의 혼백도 감격할 것이다. 중국에서는 서얼차대가 그 몸에 그칠 뿐이나 우리 나라에서는 한번 庶派가 되면 비록 수십 대가 지나도 벗어나지 못한다.

 이와 같은 서얼들의 상소에 대하여 영조는 다음과 같이 批答을 내렸다. 우리 나라가 본래 좁은데도 사람을 쓰는 길 또한 매우 넓지 못하여 개탄스럽다. 서얼들의 주장이 근거는 있으나 서얼금고는 오래 전에 한 것이므로 갑자기 바꿀 수 없어서 서서히 대책을 강구하여 처리하겠다. 다만 호조·형조·공조의 낭관에 서얼들을 임용하는 일은 인조 때 내린 명령대로 행하라고 하였다.

 이러한 서얼통청운동에 대하여≪영조실록≫편찬에 참여한 史臣들은 다음과 같이 우려하였다.

柳子光 이후 서얼통청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이 때 이르러 여러 서얼들이 통청을 스스로 청하니 조정의 기강이 날로 무너짐을 알 수 있다(≪英祖實錄≫권 2, 영조 즉위년 12월 병술).

 서얼들의 통청운동을 조정의 기강이 문란해진 탓으로 돌리면서 중세적 신분질서가 동요하고 있음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영조가 통치한 반세기는 서얼통청운동의 난숙기로서 많은 서얼들이 문과와 생원·진사시험에 합격하였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관료로 진출하였다. 그러나 일부 관료들의 반대와 지방 舊儒들의 서얼배척이 또한 심각하였다. 영조 48년(1772) 12월에 경상도 서얼유생 全聖天 등 3,000여 인은 통청된 후에도 구반들의 반대로 향안에 들어가지 못한 점을 들어 상소하였다.183)≪英祖實錄≫권 119, 영조 48년 12월 무자.
≪葵史≫권 1, 영조 48년 임진 12월 조에서는 그 때 영남진사 全性天 등이 鄕校와 鄕所·書院 등의 儒案에 입록되도록 하여줄 것을 상소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영조는 서얼들을 가련하게 여겨 비답을 내려 향안입록을 허용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蔡濟恭이 “영남의 향안은 防限이 심히 엄하여 비록 조정의 명령이 있다고 하더라도 유림들이 반드시 순종하지 않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혼란이 생길까 두렵다”고 반대하였고 이에 영조는 관여하지 않기로 하였다.184)≪英祖實錄≫권 119, 영조 48년 12월 무자. 그러나 이 때 서얼허통론자였던 영의정 金相福은 영조에게 통청된 서얼들을 문무관으로 임명할 것을 건의하여 윤허를 받았다.185)≪葵史≫권1, 영조 48년 임진 11월·12월.

 이듬해인 영조 49년 정월에도 경상도 업유 黃景憲이 상소하여 향학에 입록할 것을 허통하여 나이 순서대로 앉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을 청하였다. 그 무렵 영조는 延和門에 나아가 태학생들을 불러 “서얼들이 이미 통청되었는데 太學에서 나이 순서대로 앉는 것(序齒)을 허락하지 않음은 무엇 때문인가” 라고 물었다. 그 때 陰竹人 金植은 서얼은 늙은이라도 양반 밑에 앉아야 한다고 대답하였다가 ‘君父의 앞에서 감히 양반을 칭한’죄로 제주도 大靜縣으로 유배되고 庶人으로 강등되었다.186)≪英祖實錄≫권 120, 영조 49년 정월 을묘·정사. 또한 영조는 무반 청직인 선전관으로 서얼을 거의 임명하지 않고 단 1명만 임용한 것은 임금의 명령을 경시한 것이라고 하면서 宣薦담당인 行首선전관 白東浚을 決棍 15도하여 巨濟로 보내 충군하고 그의 추천 권행사(圈點)를 하지 아니한 선전관들도 모두 면직·충군시키도록 하였다.187)≪葵史≫권 1, 영조 49년 정월.

 그로부터 5년 후인 정조 2년(1778) 8월 경상·공충·전라 3도의 서얼유생 왕경헌 등 3,272인이 상소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188)≪正祖實錄≫권 6, 정조 2년 8월 무오.

 나라의 법전에 처와 첩 모두가 아들이 없을 때에만 입양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도 양자로서 대를 잇게 하여 서얼들은 아비의 뒤를 잇지 못한다. 또한 존비를 가리지 않고 재능만으로 관료를 임용하는 것이 만고에 통하는 규범인데도 서얼들은 벼슬길이 막혀 임금을 섬길 수 없게 되었다. 나이 많은 사람이 존경받는 것은 나이가 하늘이 내린 벼슬이기 때문인데 서얼들은 늙어도 나이대접을 받지 못한다. 명분보다는 인륜을 앞세워야 하며, 이 나라 인구의 반을 차지하는 서얼을 금고한 지 300년이나 되는데 그 동안 서얼 중 일부 인사는 대군사부(曺伸)·참판(鄭忠信)·참의·수사·목사·부사 등을 거쳤으나, 많은 사람이 뜻을 펴지 못하였다. 선조 이후 여러 대를 거쳐 국왕과 대신을 포함한 고위관료들이 서얼소통을 주장하였으나, 경향의 반대론자들 때문에 잘되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같은 서얼들의 상소에 대하여 정조는 이미 庶孼許通節目을 반포하였다는 것과 연령순은 유림간의 일이므로 해당기관으로 하여금 처리하도록 하겠다고 하였다. 정조 원년의 서얼허통에 관한 절목은 영조 말년의 그것보다도 사실상 후퇴한 것으로서 인조 때의 요직은 허용하되 청직은 불허한다는 조치를 재확인한 것에 지나지 앉았다.189)≪正祖實錄≫권 3, 정조 원년 3월 정해. 初入仕에 있어서도 서얼이 문과에 급제하면 교서관에 분관하고 무과에 급제하면 수문장과 부장으로 추천한다는 것과 지방관으로는 부사와 목사까지만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190)≪大典通編≫권 1, 吏典 限品敍用 註에 正祖丁酉節目을 등재하였다. 그리하여 서얼들은 위와 같이 집단적으로 상소운동을 전개하여 세 가지 抱寃을 호소하는 데 이르게 된 것이었다.191)세 가지 抱寃이란 繼後·仕路·序齒 등에서 배척 내지 차별받는 데 대한 원한을 의미한다.

 집단적이며 지속적인 소통운동에도 불구하고 큰 효과를 기대할 수 없자 서얼 중 일부는 명분론을 지상으로 삼아서 자신들을 차별하는 주자학자 내지 주자학적 사상체계에 반감을 품고 새로운 신앙세계를 찾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정조 11년 8월 서얼허통론자였던 金鍾秀의 말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즉 逆獄事件에 左道의 무리(천주교도)가 많이 연루되었고 오랫동안 열성조의 어진 정사를 베풀어 나라를 원망하는 무리가 없었는데 逆孼·凶徒가 여러가지로 권유하여 그렇게 되었으므로 그들의 울분과 원한을 풀 수 있도록 벼슬길을 열어주어 그들이 역적의 무리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김종수의 주장에 대하여 영의정 金致仁이 동조한 외에는 많은 대신과 대장들이 신중론을 폈으므로 결론이 없었다.192)≪正祖實錄≫권 24, 정조 11년 8월 을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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