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4. 향촌자치체계의 변화
  • 2) 관 주도 향촌지배질서의 성격
  • (2) 사족에 대한 견제와 향전금지

(2) 사족에 대한 견제와 향전금지

 「鄕戰」은 조선 후기, 특히 영조대 이후 체제를 위협하는 요인으로 간주되었던 각종 향촌사회 내부의 쟁단을 지칭하였던 것으로서 지배층 내부의 향권쟁탈전적 성격이 강한 것이었다.

 16∼17세기에는 사족이 자신들의 결속을 바탕으로 향권을 장악하고 일향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함으로써 군현단위에서 자신들의 이해를 관철시킬 수 있었지만, 18세기를 전후하여 관의 통제책이 강화되는 가운데 향권이 사족의 수중을 떠나 관권을 배경으로 한 이향층에 넘어감에 따라 향권의 의미도 사족의 일향지배권이란 의미를 상실하고 「향임층의 권한」 정도로 그 의미가 축소되는 변화가 일어났다.638)金仁杰, 앞의 책, 157∼200쪽. 18세기 이후 향촌사회 내부에서는 위와 같은 조건의 변화를 배경으로 하여 향권을 둘러싼 각 사회세력간의 대립이 표출되고 있었는데, 영·정조대에 집중적으로 문제가 되고 영조 8년(1732)의<受敎>639)≪受敎輯要≫권 5, 刑典 推斷.에 근거하며≪속대전≫640)≪續大典≫권 5, 刑典 禁制.에까지 반영된 「향전」이 바로 그것이었다.

 향전은 「鄕中爭端」641)≪正祖實錄≫권 32, 정조 15년 3월 기축. 즉 향촌사회 내부의 각종 분란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영·정조대에는 일반적으로 校·院任이나 향임을 차지하기 위한 분쟁을 의미하는 것으로 쓰여졌다. 그러나 그 내용을 검토하면 이 때 분쟁의 의미는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표출되는 양상도 다양하였고 그에 참여하는 자들의 성격도 지역에 따라, 또 시기에 따라 일정한 차이가 있었다. 여기에서 향전이 갖는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향전이 영·정조대에 집중적으로 거론되고 있었다는 점을 주목한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향중쟁단은 조선 전시기를 통해 그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닐 뿐만 아니라, 영조 8년 형조의<수교>에 의해 제정된 향전률은 이 시기의 특수한 사정을 반영한다고 파악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숙종·경종대에도 영조대 이후 향전으로 지목되었던 현상과 유사한 양상들이 있었지만, 같은 양상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향전으로 표현되지는 않았다. 이를테면 경종 원년(1721) 榮川의 土民 李台翊사건은 영조대에 향전으로 지목된 사건과 유사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지만 당시 기록에 향전으로 표현되지는 않았다. 이 사건은 교체를 앞둔 군수가 환곡을 분급하려 한 데서 발단이 되었다. 토민 이태익 등은 교체를 앞둔 수령이 환곡을 분급하려는 것에 불만을 품고 일향에 통문을 돌리고 새 군수가 도임한 후에 분급해도 늦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각 면으로 하여금 환곡을 받아가지 말 것을 알렸다. 환곡 분급날에 주민들이 그 통문 내용을 군수에게 알리고 환곡을 받아가려 하자, 이태익 등은 무뢰배들을 이끌고 창고뜰에 돌입하여 향임과 주민들을 내쫓았다. 그 모습이 마치 전쟁터와 같았다. 일향이 다 모였어도 누구하나 어찌하지 못하고 관속들도 위축되어 앞에 나가지 못하니 이같은 변은 예전에 없었던 일이었다.

 위와 같은 사정을 경종에게 보고한 영의정 金昌集은 “근래 國綱이 해이해지고 民習이 흉패해져, 수령을 욕뵈는 일이 비단 泰仁과 懷仁 두 읍만이 아닌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번에 또 榮川에서 이같은 일이 일어났다”는 점을 지적하고 죄수들을 잡아 즉시 효수할 것을 건의하였다.642)≪承政院日記≫531책, 경종 원년 6월 5일. 그리고 또 몇 해 뒤인 경종 4년에는 조정에서 서원의 폐단이 논의되는 가운데 ‘無識士子들’이 이를 빙자하여 서로 다투어 서원이 ‘鬪鬨之場’이 되었다는 지적이 있었다.643)≪承政院日記≫562책, 경종 4년 정월 11일. 이 논의과정에서도 향전이란 표현은 보이지 않았다. 그 표현은 영조대 기록에서부터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향전의 한 전형을 보여주는 沔川鄕戰의 경우를 통해 향전의 성격을 살펴보기로 하자. 영조 7년(1731)에 있었던 면천향전은 면천유생들의 향교이건 움직임에서 발단이 되었는데, 면천유학 林泰(太)登 등의 상소에 의해 중앙에 알려졌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근래 토호들이 향교를 빙자하여 수령을 쫓아내는 것이 고질적인 폐단인데, 본군유생 尹學海 등이 갑자기 聖廟(鄕校)를 옮기려는 계획을 세워 본군수 鄭潤先이 도임한 후 이건을 주장하였습니다. 潤先이 허락하지 않자 이들이 불만을 품고 수령을 욕하며, 禮山유생 成元 등에게 부탁하여 太學(成均館)에 통문을 돌리고 이곳 수령을 성토하도록 하니 윤선이 불안하여 말미를 얻어 상경하였습니다. 이에 감사가 엄히 다스리겠다는 狀文을 올리니, 학해의 무리들이 도망하고 나타나지를 않았습니다. 청컨대 학해가 土主(守令)를 무함한 죄를 엄히 다스리고, 윤선으로 하여금 돌아와 飢民을 보살피도록 해주십시오(≪英祖實錄≫권 30, 영조 7년 9월 갑자).

 상소를 올린 유학 임태등은 향임이었는데, 그는 유생들이 인근 유생과 같이 수령을 핍박하고 있는 점을 들어 그들을 처벌해 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영조는 감사에게 지시를 내려 수창자를 극변에 귀양보낼 것을 지시하였다. 선비의 풍습이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아직까지 이를 향전으로 지목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 사건은 이른바 토호의 수령에 대한 저항이라는 성격을 갖는 것만이 아니었다. 위의 지시에 의해 충청우도 유학 金濈 등 105인이 다시 상소하고, 이를 조정이 크게 문제삼는 과정에서 이것이 향전으로 파악되었다. 이 사건은 당시 군수 정윤선의 비호를 받고 있던 향품이 유림(유생)과 대립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면천유생을 포함한 호서유생들의 상소는, 이 사건이 수령의 ‘護鄕·陷士’, 즉 수령이 향임·향족을 비호하고 士(儒林·儒生)를 저해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영조는 유생들의 상소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이 사건을 향전으로 지목하여, 소두를 유배시키고 그 소장을 들인 승지를 推考시켰다.644)≪承政院日記≫730책, 영조 7년 9월 6일.

 이 면천향전에서 당시 향전이 기존의 향론을 주도했던 유림과 향권을 쥐고 있던 향족들간의 대립현상이었다는 점과, 향족·향품들은 관권의 비호 아래 유림·유생과 대립하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때 단순히 유생들이 수령을 모해하는 것만을 향전이라고 하지는 않았다. 실제 이 곳 유생들은 감사가 ‘儒林辨誣事’, 즉 유림 내부의 시비를 가지고 자신들을 향전으로 엮으려 한 데에 대해 부당하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관 주도하에 향권을 통제하려는 정책과 배치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면천향전과 관련하여 영조가 지금 외방의 향전이 고질적 폐단이라는 점을 들어 그 소장을 들인 승지를 견책한 사실은 향전금지 조치가 큰 정치적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는 점을 알게 한다. 즉 그 시기는 바로 영조 4년(1728)의 「戊申亂」 이후이고 李麟佐 등이 재지사족 및 향족을 끌어들여 거사했기 때문에, 정부에서는 사족을 개입시켜 그 난을 무마시키려 했으면서도645)≪慶尙道戊申倡義事蹟≫(奎章閣圖書 9739). 그들 재지사족에 대한 견제를 게을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구체적으로 재지지배층의 중앙정권에 대한 반발을 향전과 관련하여 이해하고 있었던 점은 안동의 金尙憲書院 건립을 둘러싼 재지세력간의 대립에서 확인할 수 있다.646)鄭萬祚,<英祖 14年의 安東 金尙憲書院 建立是非-蕩平下 老·少論분쟁의 一端->(≪韓國學硏究≫1, 同德女大, 1982). 영조 14년 건립된 이 서원은 이 곳 남인들에 의해 부서졌는데, 영조 17년의 재건 움직임이 다시 큰 반발을 일으켰다. 당시 이러한 재지세력의 반발을 가리켜 감사 尹陽來가 “安東의 향권은 조정에서도 억누를 수가 없다”고 지적한 것,647)李樹健,<17, l8세기 安東地方 儒林의 政治·社會的 機能>(≪大丘史學≫30, 1986), 225∼231쪽. 영조 21년 慶尙道審理使로 내려갔던 金尙迪이 “지금은 인심이 경박해져 점차 옛같지가 않고, 土豪鄕戰이 고질적인 폐가 되었으며 독서인이 없어진지 오래 되었다”고 지적한 것648)≪英祖實錄≫권 61, 영조 21년 5월 정축. 등은 바로 탕평정국하에서 중앙정권의 조치에 대한 재지세력의 반발을 향전률이란 명목으로 견제하였음을 이해하게 해준다.

 여기에서 특히 주목되는 점은 위의 김상헌서원 건립시비가 기본적으로는 당시 중앙의 노·소론간의 대립과 연결된 안동사족 내부의 대립현상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김상헌서원의 건립은 그 뜻이 「圖執鄕權」에 있는 것이었고 여기에 “軍保나 校生으로서 양반이 되고자 하는 자 또한 가세하여 다투어 붙으려 한다”고 하는 사실이다.649)鄭萬祚, 앞의 글. 즉 영남 남인들의 근거지인 안동에 서인세력을 부식시키고자 한 중앙권력의 의도를 배경으로 하여 기존 향론에서 배제되었던 층들이 양반이 되고자 하는 세력을 끌어들이면서 향권장악을 겨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안동의 경우에는 위 「新論者」들의 움직임이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영남에서의 이러한 사정은 영조 23년 盈德鄕戰에서 더욱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데, 이 사건 역시 안동의 경우와 그 기본성격에서는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다만 영덕의 경우에는 향전이 있은 후 오히려 문제가 되었던 新安影堂650)新安影堂에서는 朱子를 主享으로 모시고, 영조 6년(1730) 宋時烈을 追享하였다. 인조 6년(1628) 新安洞에서 출발하여 숙종 28년(1702) 본격 창건되었으며, 盈德鄕戰이 있던 바로 다음 해 邑村 근처로 옮겨졌다(≪列邑院宇史跡≫·≪盈寧勝覽≫에는 ‘新安書院’으로 등재되어 있다).이 읍 근처로 옮겨졌는데, 이른바 신향들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강했기 때문에 그 같은 결과가 가능했다는 점에서 안동의 경우와는 차이가 있었다.

 이 문제에 관해 영조가, “이 獄事는 향전에서 나온 것인가”라고 묻자, 사건의 조사책임을 맡았던 어사 韓光肇가 답한 다음의 말은 당시 중앙에서 거론되었던 향전의 의미를 더욱 분명히 보여준다.

盈德의 古家大族은 모두 남인이며, 소위 新鄕은 모두 胥吏·品官之子이고 자칭 서인이라고 하는 자들입니다. 근래 서인이 향교를 주관하면서 舊鄕들과 서로 마찰을 빚더니, 朱子畵像이 비에 손상되자 신향배들이 혹 구향들의 성토를 두려워하여 남인들을 옭아맬 계획을 가지고 그(朱子와 尤齋) 화상을 숨기고 … 말하기를, ‘남인들이 尤齋 宋時烈의 화상을 봉안하는 것을 꺼려하여 야음을 틈타 화상을 훔쳐갔다’고 하였습니다. … 당시 수령이 鎭營에 그 뜻을 알리자, 진영에서는 將校 譏捕를 내었는데 徐哥 성을 가진 장교는 과연 신향들의 청탁을 받은 자였습니다. 7인을 붙잡아 여러 해 동안 조사하는 가운데 刑問亂杖이 참혹하고 상당수가 매맞아 죽기도 하였습니다(≪承政院日記≫1,017책, 영조 23년 6월 15일).

 이른바 신향들은 모두 ‘吏胥品官之子’, 즉 이향층으로서 자칭 서인이었으며, 이들이 향권을 주도하고 과거 대대로 남인이었던 ‘古家大族’인 구향들과 다투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구향은 호서에서의 「儒」 즉 유림에 해당하는 층이었다고 이해된다. 중앙에서 그들을 구향이라고 지칭했던 것은 신향과 대비시켜 설명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지만, 이들이 이미 향반화하였던 점과 이 지역에서는 호서와 달리 儒·鄕이 현격하게 나뉘지 않은 전통 때문이었다고 판단된다. 이 영덕향전은 당론의 문제와 깊이 연결되면서, 향권장악을 둘러싼 신·구세력의 대립이 서원이나 사우를 둘러싸고 이루어지기도 하였던 영남향전의 단면을 보여준 것이었다.

 호남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영조 36년(1760) 새로 順天府使로 제수된 申大修를 대면한 자리에서 영조가, “순천에 향전이 있다고 하는데 너는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라고 묻자, 대수가 “마땅히 그 시비를 가려 처리하고 自斷할 수 없으면 감영에 보고하여 처리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니, 영조가 “너는 틀렸다. 향전은 두쪽 다 다스려야 한다. 어찌 시비가 있을 수 있느냐. 이 말 또한 黨心의 소치이다”라고 말한 뒤 신대수 파견을 철회시켰다.651)≪承政院日記≫1,188책, 영조 36년 12월 20일. 그런 후 영조는 “대수가 자못 재주가 있다고 하여 향전에 대해 물어 보았는데, 그가 시비를 가려 처리하겠다고 말한 것은 역시 당심에서 나온 것이다. 어찌 심하지 않은가”라고 심정을 피력하였다. 이는 향전을 당론과 연결하여 이해하고 있던 국왕의 입장을 보여준 것이었다.

 그 점은 영조 38년 潭陽향전의 경우에서 자세히 파악할 수 있다. 담양의 향전은 향족(향품)간의 싸움에서 왕을 향한 「不道之說」이 드러나는 바람에 중앙에 알려진 것이다.652)≪英祖實錄≫권 38, 영조 38년 7월 경진. 이 사건은 남인으로 자처하던 좌수 李弘範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던 자칭 노론 宋錫殷이 이홍범의 ‘二字(四字) 凶言’653)담양향전 사건을 정부에서 戊申·乙亥餘孼의 행위로 파악했다는 점에서 ‘二字’·‘四宇’凶言은 辛壬士禍(義理)와 연결된 것으로서<乙亥二月 日 逆賊尹志等推案>에 나온 ‘奸臣滿朝’란 기록과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을 고변함에 따라 문제가 된 것인데, 관련인들의 심문과정에서 대신들과 왕이 취한 태도에서 향전이 「黨色」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즉 영조가 이홍범의 아들 能學에게, “너희 아비와 錫殷은 同論이냐 異論이냐”고 묻자, 능학이 “下鄕品官이 어찌 色目이 있겠습니까마는 이 몸의 아비는 남인이고 석은은 노론입니다”라고 답변한 데 대해, “이 놈은 제 아비보다 더하구나, 생각하고 답하는 것이 수상하다”라고 말한 것, 또 이홍범이 남인이라고 말한 데 대해, “지금 남인이라고 말한 것을 들으니 그것이 향전에서 나온 것임을 가히 알 수 있다”라고 말한 것, 영조가 “乙亥 이후 黨이란 한 자는 오늘날 縉紳士夫도 감히 입에 올리지 못하거늘 미천한 鄕曲土班輩가 그 풍습을 뉘우치지 못하고 이같을 수가 있는가. 그 말을 생각컨대 정신이 아득하다. 그 풍습을 징벌하기 위해서는 엄히 다스리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라고 하교한 것 등은654)≪承政院日記≫1,208책, 영조 38년 7월 19일. 향전이 재지양반층 내부의 당론분열과 깊이 연결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향전이 당론과 연결되어 있었음은 18세기 목민서의 하나인≪居官大要≫에서 수령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外邑의 향전은 마땅히 금지해야 할 것이다. 금지할 겨를이 없이 官長이 되는 자가 혹 그 色目에 따라 올리고 내리는 일이 없지 않은데,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겠는가. … 반드시 경중에 따라 양쪽의 首倡者를 먼저 다스려서 진정시키고 없애는 것을 위주로 하는 것이 가하다. 吏胥 중에서도 한쪽 당에 치우친 자가 있으니, 또한 마땅히 首吏를 엄칙하고 임명할 때에 어느 한쪽 사람을 치우쳐 쓰지 않는 것이 옳다(≪居官大要≫, 學校;內藤吉之助 編,≪朝鮮民政資料≫, 267쪽).

 이러한 사실은 향중의 쟁단이 왕권에 위협적인 요소로 전개되었던가, 또는 쟁단을 통해 왕권에 위협적인 요소가 드러나고 그것이 또한 쟁단을 심화시켜 나갔기 때문에 중앙에서 문제가 되었음을 알게 해준다.

 그러나 향전을 금한 이후로도 그것은 그치지 않았고 향전의 폐는 날이 갈수록 심해져 갔으며, 그 향전의 내용은 재지사족 내부의 당론분열에 따른 쟁단으로 간주되었지만 실은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향임이나 교·원임을 차지하고자 하는 자들간의 대립이 그것이었다. 실제 영조 7년 長城지방에서도, “당초 분열이 비록 偏黨을 칭하지만, 그 다투는 근원을 따지면 鄕堂(鄕任)·校宮(齋任)에 있음을 알 수 있으니, 이른바 편당은 본래 이름만 빌린 것일 뿐 제사를 지내고 난 후에는 버려버리는 짚으로 만든 개에 불과한 것이다”655)≪長城鄕校誌≫, 一鄕契約文.라고 하여, 그 쟁단의 근원이 향임이나 유임자리를 둘러싼 자리다툼에 있음을 지적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향전을 빌미로 관권·수령권에 의한 향권천단의 소지가 마련되는 것이었고, 중앙정권에 대해 반발하는 재지사족 견제용으로 기능하던 「향전률」이 이제 수령의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데 이용되었던 것이다. 실제 향전은 그 양상이 각 지역·지방의 사정에 따라 여러 모양이었고 시기가 내려옴에 따라 그 성격도 달라지게 되었다.

 여기서 향전이란 왕권강화에 저해되는 것으로 인식되었던 각종 향중쟁단으로서, 그 기본성격은 향권장악을 목적으로 한 신·구세력의 대립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향전의 양상은 그것에 참여하는 주체의 측면에서 본다면, 기존 향권을 장악해 왔던 사족의 분열에 따른 그들 내부의 대립, 사족(儒林)과 향품(鄕族)과의 대립, 그리고 아직까지는 크게 부각되지 않고 있었지만 이들 지배층과 신분·계급적 성격이 다른 층들의 향권참여에 따른 구지배층들과의 대립 등으로 요약해 볼 수 있겠는데, 그 어느 경우든 기존의 향권을 장악하고 있던 구세력과 새로이 향권에 접근하고 있던 세력간의 대립이라는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

 한편 향전의 유형은 그 원인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나누어 볼 수 있지만,656)李樹健은 조선 후기 도처에서 발생한 ‘재지세력간의 각종 향권쟁탈전’인 鄕戰을 그 유형상 ㉠ 향안입록과 향청 임원의 선임문제를 둘러싸고 야기되는 경우, ㉡ 서원·祠廟의 配享·追享 및 位牌의 序次문제를 둘러싸고 야기되는 경우, ㉢ 향권과 관권과의 충돌에서 야기되는 경우, ㉣ 조상의 학통과 師友淵源문제, 문집간행과 문자상의 시비 등을 두고 야기되는 경우, ㉤ 전답·墓山의 소유와 사용권문제, 堤堰과 洑(川防)의 축조·수리·사용권을 둘러싸고 씨족·촌락간에 야기되는 분쟁, ㉥ 이상의 제문제와 무관하지 않지만 사회신분과 계층간의 대립과 갈등, 嫡庶와 士族·吏族간의 대립 분쟁에서 야기되는 향전 등으로 나누고 있다(李樹健, 앞의 책, 1989, 352∼353쪽). 앞에서 검토한 내용을 기초로 할 때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하나는 기존에 향론을 주도하면서 향권을 장악해 왔던 구지배층과 관권의 비호 아래 실질적인 향권을 장악해 나가고 있던 세력간의 대립으로서 儒·鄕간의 대립, 즉 사족의 후예인 유림과 향품세력간의 대립이 그것이다. 영남의 경우 유·향의 분기가 현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은 신·구향의 대립으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이는 초기 향전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향권이 사족의 수중에서 관권의 비호 아래 향품층으로 넘어가는 추세 속에서 나타난 향권쟁탈전이었기 때문에, 여기서 향전은 사족과 관권과의 마찰이란 의미를 갖게되는 것이다. 향전률은 바로 이같은 향전에서 사족을 견제하고 관권을 뒷받침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제정된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이미 과거 사족들에 의해 주도되던 넓은 의미의 향권이 사족의 수중으로부터 관권에 예속된 상황 아래서 생기는 좁은 의미에서의 향권, 즉 실질적인 향촌지배기구의 직임이 갖는 향권을 둘러싼 대립현상으로서, 유·향임을 차지하기 위한 신유·구유, 신향·구향간의 대립이 그것이다. 이러한 대립이 같은 향전으로 표현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그 각각을 「儒戰」과 「鄕戰」으로 구분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두번째 유형의 향전이 18세기 후반 국가가 파악한 향전의 전형이었다. 삼남지방 가운데서는 향임에 나아가도 그것이 중앙관계 진출에 큰 장애가 되지 않았던 영남에서 두드러진 것으로 파악되며, 모두 토호향전으로 이해되었다. 호서지방의 경우 유림간의 대립으로, 신유·구유의 대립으로 표현되기도 했는데,657)≪正祖實錄≫권 34, 정조 16년 3월 계미. 이 경우 역시 수령을 얽어 해치고자 하는 것으로 파악해 향전률로 다스려지고 문제를 일으킨 자 역시 토호로 규정되었다.

 위의 두 가지 유형의 향전은 18세기 중반 이후 서로 중첩되어 나타나지만, 대체적인 추세는 첫번째 유형의 향전이 크게 위축되고 두번째 유형이 향전의 주류를 이루어 나갔다. 정조대 중앙에서 파악하고 있던 향전의 중심 내용도 바로 후자의 유형이었다.

 결국 향촌사회 신구세력간의 대립은 기존 사족들이 누려 왔던 넓은 의미에서의 향권이 관권에 의해 부정되는 가운데, 관권 주도의 향촌정책 및 관의 비호하에 향권에 접근하고 있던 향품층에 대해 사족들이 반발하는 성격을 갖는 것으로 파악된다. 향전률의 목표는 바로 이같은 사족의 반발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향전의 원인은 사족 내부의 분열, 즉 향론의 분열에도 있는 것이었지만, 보다 큰 원인은 그들 재지사족에 대한 관권의 견제와 이를 이용하여 향권에 접근하고 있던 세력들의 도전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른바「향품」·「신향」으로 표현되었던 층은 지역과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고 판단되지만, 이들은 구래의 사족의 통제에서 벗어나 관권의 비호하에 실질적인 향권을 장악해 나가면서 과거 사족들이 누렸던 지위까지를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새로 향권에 접근하고 있던 층들에 대한 기존 사족의 반발이라고 할 수 있는 유·향대립, 또는 구향과 신향의 대립은 관권에 의해 철저히 통제되고 관련자들은 처벌되었다. 주로 처벌된 대상은 문제를 일으킨 구세력이었다. 관 주도의 향촌통제책을 강화하는 가운데 기존 사족들이 향유하였던 향권은 장애요인이 되었고, 새로이 향권에 접근하고 있던 층들은 관권에 의해 비호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볼 때, 사족의 이같은 조건에 대한 반발은 관권에 저항한다는 의미를 갖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향전률은 이와 같은 재지사족의 견제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고, 초기 향전이 문제가 되었을 때 주로 그 대상이 된 것도 바로 위에서 검토한 바처 럼 첫번째 유형의 향전이었다. 그러나 이런 유형의 향전은 이후에도 부분적으로 지속되었지만, 이제 18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그 의미를 상실해 갔다. 보다 직접적으로 향권을 장악하기 위한 유·향임을 둘러싼 대립으로 향전의 양상이 옮겨져 간 때문이었다. 정조 7년(1783)<暗行御史齎去事目>에 실린 향전의 중심내용이 「爭任」이었다고 하는 사실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유·향임을 둘러싼 대립 역시 첫번째 유형과 관련하여 관권을 배경으로 하여 전개되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이 시기 향전의 또 하나의 특징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같은 향임을 둘러싼 쟁단의 경우는 이제 향전으로 표현되면서도 점차 「賣鄕」 혹은 「賣任」의 현상으로 파악되는 변화를 발견하게 된다. 이같은 변화는 재지사족의 향촌자치체계의 붕괴와 짝하는 것이었고, 일면 자치체계의 붕괴를 가속화시키는 것이기도 하였음을 보여준 것이었다.

 18세기 후반에 오면 위와 같은 정치적인 요인 위에 수령의 매향이 향전 발단의 요인으로 파악되기에 이른다. 이는 지방재정과 결부된 경제적인 요소가 깊이 개재되었던 것을 말하는 것으로서,658)≪正祖實錄≫권 29, 정조 14년 3월 갑진.
영조 50년(1774) 成川府使로 나갔던 任聖周는 西北에서 貨賂를 통해 鄕任으로 임명되는 것이 百年痼弊라고 지적하였다(任聖周,≪鹿門先生文集≫권 25, 公移 鄕任變通節目).
여기서 더욱 주목되는 것은 그같은 조건을 배경으로 하여 이제까지는 향임을 지낼 수 없었던 층들이 참여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단순한 수령의 勒賣가 계기가 된 것으로 파악되어질 수만은 없는데 거기엔 경제력을 가지고 신분을 상승시켜 나갔던 세력들의 꾸준한 상급신분에의 도전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매향 등과 관련된 향전금지조항과 관련해서는 향전을 야기시킨 수령이 같이 처벌되었다. 이는 그와 같은 쟁단을 일으키는 주체의 하나가 바로 수령이었기 때문으로서, 첫번째 유형의 초기 향전에서 관권이 철저히 보호되고 있었던 것과 현격한 차이가 있는 것이었다.

 향촌사회에서 벌어졌던 각종 쟁단들은 종래 지배신분층이라 할 수 있는 사족·유림들에 의해서 스스로 해결될 수 없었고, 문제는 또한 향촌사회 지배층내부의 분열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라 전체 향촌사회의 분화, 그리고 중앙정국의 변화와 밀접히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매우 복잡한 것이었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향권은 관권(수령권)과 밀착되어 전개되어 갔던 것을 살필 수 있었으니, 거기에는 경제적인 측면이 모두 반영된 것이었다.

 이제까지 향론을 주도하며 향촌사회에서 지배세력으로서 기능을 다했던 사족의 향론은 수령과 수령의 비호를 받는 향임·이서층에게 향권이 넘어가는 추세에 적합한 것이 이미 아니었다. 영조대부터 심각해져 갔던 향전은 향권에서 소외되어 나갔던 사족(유림)과 왕권의 비호 아래 서서히 성장해 가던 품관층과의 불가피한 대립으로서, 그 대립이 일당전제 체제하에서 집권층의 보수화에 따라 빚어진 모순의 결과라 한다면, 그 종식은 향촌사회 내부에서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한기 전까지 양반지배층의 자율성 상실을 의미한다. 이것은 곧 왕권이 상대적으로 취약해지는 勢道政治期의 향촌사회 모습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위와 같은 변화 속에서 사족들의 반발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으니, 그 반발은 자연 관권을 비판하는 성격을 갖는 것이었고, 따라서 이를 금지시키기 위하여 향전률이 제정되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이 향전금지조치와 함께 「黜鄕」 금지조치가≪속대전≫에 실리고 있다는 점이다. 출향은 사족들에 의해 주도되었던 향회의 최고 罰目으로서, 그것은 사족중심의 향촌지배체제에 저해되는 자들을 통제하기 위한 목적을 가진 것이었다. 이 향전률이 기존 사족들이 행사해 왔던 향권을 부정한다는 의미를 갖는 것이었음을 확인해 주는 내용이다. 이전 시기까지만 하더라도 중앙의 정치세력은 지방에 근거를 가지고 활동하고 있었고, 이같은 의미에서 지방세력 역시 일정한 자치적 영역을 확보하고 있었다는 점과 관련시켜 보았을 때, 18세기 중엽 이후 향전이 발생되고 그것이 관권에 의해 철저히 금기시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사족의 향촌자치체계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후 수령을 중심으로 지방통제책은 더욱 강화되었는데, 수령중심의 관주도통제책, 즉 왕권에 위협을 줄 수 있는 모든 사건은 철저히 금지되고 관련 사회세력은 통제되었다. 영조는 향전에는 시비가 있을 수 없고 향전에서 시비를 가리려는 것 역시 당심에서 나온 것으로 여기고 있었으며, 그러한 당심은 농부가 잡초를 뽑아 없애듯 완전히 제거해야 할 것으로 생각해 각 도의 향전을 철저히 금지시켰다. 향전은 이후 조정에서 간섭할 필요가 없는 것이란 점이 표방되었고, 정조 역시 그같은 정책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향전을 금한 이후로도 그것은 그치지 않았고, 향전의 폐는 날로 심해졌다. 심지어 향전률이란 명목하에 감사와 수령의 천단이 야기되기도 하였다.

 수령을 중심으로 한 관 주도의 향촌통제책 자체가 이향층을 매개로 한 것이었는 바, 이향직에로의 진출이 수령에 의해 천단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향촌자치구조의 취약성에 기인한 것이었다. 따라서 옛 지배층과 새롭게 향권에 도전하고 있던 세력간의 향권장악을 둘러싼 대립이 지속되는 한 향전은 확대·심화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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