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비해 율곡 이이의 理氣不相離說 내지 心主氣說을 고수하는 田愚(艮齋)·宋秉璿(淵齋) 등의 주기론은 그 당시 주리론과 논쟁을 벌이는 가운데 매우 보수적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곧 心主理說이 마음에서 도덕적 근거와 주체성을 확인하고 있음에 비하여, 심주기설은 마음에서 선악의 양면성을 지닌 인간의 도덕적 조건을 확인함으로써 성 곧 이에서 객관적 도덕근거를 인식하게 된다. 따라서 심주리설이 개별적 주체의 능동성과 주체적 판단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준다면, 심주기설은 객관적·사회적 규범근거를 추구하며 인간의 수동적 순응을 요구하는 성격을 보여주게 된다.
성리설에 있어 전우의 기본적 입장은 성품을 理라 하고 마음을 氣라 규정하여 율곡 이후 기호학파의 전통적 입장을 고수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기호학파의 이항로(화서)는 본심을 이로 파악하는 심주리론을 제시했고, 기정진(노사)은 기호학파의 전통을 벗어나 이발만을 인정하는 유리론을 전개하는 주리론적 입장을 제시했으며, 또 영남학파의 이진상(한주)은 心卽理說을 제기하여 퇴계의 성리설을 재해석함으로써 전통적 해석으로부터 탈피하는 등 한말에 이르러 성리학은 심의 주리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확산되는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여기서 전우는 본격적으로 이들을 공격하여 논쟁을 일으키면서 자신의 성리학적 입장을 선명하게 하는 과정을 통하여「心本性說」·「性師心弟說」·「性尊心卑說」 등 독특한 명제들을 제기하고 있다.
먼저 그는 61세 때(광무 5년:1901)<心本性說>을 저술하여, “이단은 마음을 주장으로 삼고 性을 주장으로 삼지 않는다”090)田 愚,≪艮齋私稿≫ 전편 권 13, 雜著 忄本言 一.고 함으로써, 마음이 성품을 근본으로 삼는다는 ‘心本性’의 명제에 근거하여 성품을 근본으로 삼는 것이 유가의 정통적 입장이라 인식하고, 이와 상반된 것을 이단으로 규정하였다.
‘性에 근본한다(本性)’는 것은 심을 딸리게 하는 것이니, 心이 性 속에 있는 것이지만, ‘마음을 근본으로 한다(本心)’는 것은 곧바로 心으로 주장을 삼고 다시 性에 근본하지 않는 것이니, 이를 따른다면 輕하고 重함이 없어져 天地가 뒤집어지고 綱常이 무너질 것이다(田 愚,≪艮齋私稿≫전편 권 13, 雜著 忄本言 一).
그는 심주리론을 인륜의 기준을 파괴하는 것으로 파악하여 배척하고 있다.
전우는 일찍부터 심성관계에서 ‘性卽理, 心卽氣’의 개념체계에 따라 성을 심의 주재이자 근본으로 파악하는 性理心氣論의 입장을 확립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스승과 벗들 사이의 토론을 거치면서 자신의 성리학적 과제로서 성을 높이고 심을 낮추는 존비의 계층으로 인식하는「性尊心卑說」을 제기하였으며, 이를 다시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비유하여「性師心弟說」으로 확인하게 된다. 그는 ‘성사심제’의 네 글자를 자신이 처음 지어낸 말임을 강조하며 경전의 전체를 이 한 마디로 一以貫之할 수 있는 것이라 지적하고 몹시 기뻐서 어쩔줄 몰라 하였음을 언급하고 있다.091)田 愚,≪艮齋私稿≫ 후편 권 19, 雜著 性師心弟. 따라서 그는 “性이 尊位에 있고 心은 이를 따르며 존중하는 것이 儒者의 학문이요, 心이 性을 존중하지 않고 自尊하면 異端의 학문이다”라 하여 성을 높이고 심을 낮추는 상하관계를 정통주의적 신념에서 확인하고, 심을 이로서 높이는 것을 이단으로 철저히 배척하였다.092)田 愚,≪艮齋私稿≫ 전편 권 13, 雜著 忄本言 一. 이러한 전우의 성리설은 기본적으로 율곡 이후의 기호성리설을 계승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가 자신의 독자적인 성리설의 이론체계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전우의「성존심비설」 및「성사심제설」은 성품(性)과 마음(心)을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비유하여 파악함으로써,「성품」(보편적 도덕성)을「마음」(개별적 주체)보다 높여야 할 것으로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전우의 성리심기설은 심의 주체가 객관적 표준인 성을 따라야 하는 수동적 성격을 띤다. 따라서 한말의 국권상실기에 있어 ‘擧義掃淸’이나 ‘致命遂志’와 같은 현실에 대한 능동적 참여보다는 물러나 도를 지킨다는 ‘去之守舊’ 혹은 ‘入山自靖’의 소극적인 태도로 나타났다. 이에 비해 한말 성리학의 심주리설은 개별적 주체성을 강조함으로써, 역사적 격동기에 능동적으로 판단하고 적극적으로 실행하는 자세를 뒷받침하면서 이 시대 성리학에 새로운 활력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인식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난세를 맞아 유교이념을 철저히 실천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점에서는 양자가 일치한다고 하겠다.
한편 전우는 자신의 성리설의 정당성을 확신하는 가운데 그 때 자신을 둘러싸고 있었던 심주리론의 다양한 입장들093)李恒老는 本心卽理說을 제시하고 李震相도 心卽理說을 주장하여, 두 입장이 心主理論임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奇正鎭은 이에 비해 心개념이 복합적이다. 그는 “心은 비록 氣에 속하는 것이지만 性을 갖추고 있다”(<納凉私議>), “마음은 氣의 靈處로서 衆理를 갖추고 萬事에 응하는 體用이니, 氣로만 온전히 할 수 없다”(<答問類編>), “精(血之靈)과 神(氣之靈)을 기반으로 하여 그 속에 衆理를 갖춘 것을 心이라 한다”(<答景道>)고 하여, 心合理氣說의 입장과 유사성을 보이고 있지만, ‘氣發이 근원적으로 理發’(<猥筆>)이라 인식하는 그의 철저한 主理論的 입장을 전제로 하면 心主理論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본다.을 공격하여 全方向으로 논쟁을 벌였으며, 여기서 한말 성리학계를 뜨겁게 달군 심성론의 논쟁이 전면적으로 전개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전우를 중심으로 형성된 간재학파와 심주리론의 입장들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의 전개과정은 다음의 몇 가지 단계로 나누어 정리할 수 있다.
먼저 전우는 33세(고종 10년:1873) 때부터 이항로의 제자인 유중교와 전후 14년간에 걸쳐 성리설에 관한 往復論辨을 벌여 이항로-김평묵계열의「本心卽理說」에 대해 조목별로 비판적 검토를 제시하였다. 그는 이항로 문하의 ‘心說正案’을 변론하면서 이항로가 심이라는 물건의 이치를 ‘心之道’라 하고, 심은 기이지만 이 기에서 덕을 가리킨 것이 이라 하여 심주리설을 제시한 데 대해, 心爲氣性爲理를 유가의 종지라 하여 心之理·心之德 등의 개념설정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나아가 그는 기본적으로 理無爲氣有爲說에 따라 사려·지각의 작용이 있는 심을 작용이 없는(無爲) 이와 동일시 할 수 없음을 지적하고,094)田 愚,≪艮齋私稿≫ 전편 권 2, 書 與柳穉程. 동시에 성은 이이지만, 명덕은 이의 總會處로서 이를 포함하는 것이기는 해도 결코 곧바로 이라고 말할 수 없음을 제시함으로써095)田 愚,≪艮齋私稿≫ 전편 권 2, 書 答柳穉程別紙. 본심즉리설 내지 명덕즉리설을 부정하였다.
다음으로 그는 62세(광무 6년:1902) 때에<猥筆辨>·<納凉私議疑目>을 저술하여<외필>과<납량사의>에 서술된 기정진의 유리론적 성리설을 조목조목 비판하였다. 여기서 그는 기정진이 기의 모든 작용은 이의 명령에 따른 것일 뿐, 기 스스로 작용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하여 율곡의 ‘機自爾說’을 부정한 것에 대해 주자와 율곡의 이론에 위배되는 것이라 하여 정면으로 배척하고 있다.096)田 愚,≪艮齋私稿≫전편 권 14, 雜著 猥筆辨. 이처럼<외필변>에서 기정진의 성리설이 율곡의 성리설과 어긋난 점을 지적하여 비판하자, 기정진의 문하에서 정재규가<猥筆弁辨>·<納凉私議辨辨>을, 孔學源(道峰)이<辨猥筆辨>을 각각 저술하여 전우의 비판을 반박하였고, 이에 대해 전우도<猥筆後辨>·<猥筆記疑>를 저술하여 비판을 심도있게 함으로써 반박과 재반박이 거듭되며 논쟁이 확산·심화되어 갔다.
마지막으로 전우가 벌인 대규모의 성리학 논쟁은 영남의 한주학파와 벌인 논쟁이다. 곧 그는 71세(1911) 때<李氏心卽理說艮齋條辨辨>을 지어 영남학파의 한말 성리학을 대표하는 한주 이진상의 심즉리설을 조목별로 비판하고 있다. 특히 그는 心卽性을 내세운 불교의 견해와, 心卽理를 주장한 陸象山·王陽明의 견해를 한주의 심즉리와 대비시켜 동일시함으로써 배척하였다. 또한 이진상이 “吾心의 天理는 태극의 전체이다”라 하여, 자신의 심즉리설이 불교나 왕양명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을 변론하는 데 대해서도 왕양명과의 일치점을 들어 거부하고 있다.097)田 愚,≪艮齋私稿≫후편 권 19, 雜著 心擬似. 이처럼 전우는 그의 비판영역을 영남학파에까지 확대시킴으로써, 당시 대표적 심주리설을 빠짐없이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전우의 심주리설에 대한 비판은 한주학파의 반박을 야기하였다. 이진상의 제자 곽종석은 洪思哲에게 보낸 편지에서 퇴계가 心合理氣를 말하니 영남의 후학들이 심의 본체까지도 합이기라 하는 폐단에 빠지고, 율곡이 심즉기라 하니 기호의 후학들이 심의 전체를 기라 보는 폐단에 빠진다고 지적하여, 전우의 심즉기설이 이이의 이해 내용과도 다르다고 지적한다. 또한 곽종석은 심을 質에서 말하면 ‘血肉’이요, 기에서 말하면 ‘精神’이요, 이에서 말하면 ‘性情之妙’라 하여, 심개념을 3단계로 분석하면서 심즉리라 하여야 본체가 수립된다고 자신의 입장을 확인하고, 전우의 심즉기설은 심개념의 한 단계일 뿐이라 규정하고 있다.098)郭鍾錫,≪俛宇集≫권 111, 書 答洪成吉. 곽종석의 제자 김황도<寒洲心卽理說條辨>을 통해 전우의 심즉리설에 대한 비판을 치밀하게 반박하고 있다.
이처럼 전우는 心宗家 또는 心理家로 일컫기도 하는 한말의 대표적 성리학자들인 이항로·기정진·이진상 및 그들의 제자들과 주리·주기의 문제를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성리설 논쟁들은 한말까지 조선조 성리학이 축적해 온 제반 이론적 성과가 결집되고 전면적으로 재검토되는 사상적 결산이자, 위기의 시대에 처한 도학자들의 이념적·현실적 대응방안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성리학의 자기모색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