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과 다른 異學體系, 異質文明에 대해 강한 탐구의욕을 가지고 북경에 갈 기회를 얻기에 노력하고 북경에 들어간 후, 그 곳에서 천주당과 흠천감을 방문하여 그 시설을 관찰하였고 서양성직자와 필담을 나눈 직접체험자와, 국내로 반입된 한역서학서를 가지고서 서학을 접한 간접체험자의 서학, 곧 천주학에 대한 반응은 다르게 나타났었다. 간접체험자인 북학론자들이 북경 현지에서 보고 느낀 天主學觀은 어떤 것일까.
북학파의 대표적 인물인 洪大容은 영조 41년(1765)에 군관신분으로 북경에 들어가 東天主堂을 관람하였고, 흠천감을 방문하고 欽天監正 Hellerstein(劉松齡)신부와 副正 Gogeisle(鮑友管)신부와「西學」과「西敎」(천주교)에 관해 문답을 나누었다. 그 문답기록인<劉鮑問答>을 보면 그의 서학에 관한 관심은「理」의 측면인 서양종교나 윤리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器」의 측면인 서양과학과 기술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천주학에 관하여는 “천주학은 무엇을 숭상하는가” 그리고 “천주는 上帝인가”를 물었을 뿐이었다.133)洪大容,≪湛軒燕記≫권 1, 劉鮑問答. 한편 홍대용은 천주교를 다음과 같이 부정적으로 단정하고 있다.
서양의 학(즉 천주학)은 유교의 상제의 이름을 도적질해다가 불교의 윤회라는 말로 치장하였으니 천박하고 좁은 것이며 가소롭다. 그런데도 중국에 와서 보니 이를 숭상하는 자가 많다(洪大容,≪湛軒日記≫권 5, 乾淨筆談).
良吏·善牧으로 이름 높았던 북학론자 洪良浩도 북경에 갔을 때 청국의 석학134)洪良浩는≪英祖實錄≫·≪國朝寶鑑≫·≪羹墻錄≫ 찬수에도 관계한 학자로, 經儒書에 밝았으며 淸國에 使行했을 때 翰林院修書 戴衢亨, 禮部尙書 紀昀과 詩文을 교유한 바 있다. 그 후 조선사신이 북경에 갔을 때 그의 안부를 계속 물을 정도로 중국학계에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紀曉嵐에 서신을 보내어 다음과 같이 천주학을 이단으로 단정하였다.
이른바 서학의 奉天之說은 유학의 昭事上帝에 근거한 것이니 이치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만물의 창조를 예수가 했다고 하니 분수에 넘치는 말을 함부로 하고 常道에 어그러짐이 매우 심한 것이다. 하물며 人道를 끊어버리고 性命을 가벼이 버려 倫理를 손상함이 불교에 비할 바가 아니라 실로 대단한 異端인 것이다(洪良浩,≪耳溪集≫권 15, 書 與紀尙書昀書).
한편 대표적 북학자인 朴趾源은 북경에서 유명한 청나라학자 鵠汀과 천주학에 관해 문답을 주고 받은 바 있다. 이 문답에서 천주교에서 불교의 輪廻說과 天堂地獄說을 믿으면서도 불교를 헐뜯고 물리쳐 원수와 같이 여김을 비난하고 있다.135)朴趾源,≪燕巖集≫ 별집 권 14, 熱河日記 鵠汀筆談. 그는 북경의 서천주당을 방문하여 다음과 같이 천주교를 총평하기도 했다.
천주란 天皇氏·盤古氏의 칭호와 같은 것이다. 다만 그 사람들이 치력에 능하고-그들이 하는 일은 거짓된 일을 끊어버리고 성실하고 믿음을 귀히 여기며 상제를 밝혀 섬김을 교리로 삼고 충효와 자애에 힘쓰며 개과천선에 노력함을 첫걸음으로 삼으며 생사의 큰일에 준비케 하여 근심이 없도록 한다. 마침내는 스스로 窮原溯本之學이라 하나, 그 뜻을 세움이 지나치게 높다. 또 그 주장이 한쪽에 치우치고 교묘하게 하늘을 속이고(矯天) 사람을 속이는(誣人) 죄를 짓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그르치고 인륜을 해치는 잘못에 빠져들고 있다(朴趾源,≪燕巖集≫ 별집 권 15, 熱河日記 黃圖紀略 天主堂).
즉 박지원은 천주학이 내세우는 것은 그럴싸하나 하늘을 속이고 인간을 그르치는 것이라고 보았다. 다만 전교서양인들이「治曆」에 능하다고 하여 서양의 과학·기술의 우수성만을 이해했던 것이다.
박지원보다 뒤의 북학자 朴齊家도 천당과 지옥을 깊이 믿음이 불교와 다를 바 없으나 천주교가 “생활을 넉넉하게 하는 실천의 방도(厚行之具)”가 있어 불교보다는 생산성이 있다고 이해하였다.136)朴齊家,≪北學議≫, 附 丙午所懷.
이상과 같이 북학론자들은 북경에 가서 직접 서학을 체험한 바 있어 북학의식이 강했던 그들에게는 서양의 과학기술은 놀라움의 대상이었을 뿐이고 천주교에 대하여는 매우 부정적인 인식을 가졌었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