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후기의 불교계를 대표하는 것은 西山대사 淸虛休靜(1520∼1604)의 사상인데 그가 제시한 수행관은 禪敎합일이었다. 대체로 선 위주의 사상체계를 보이기는 하였지만 ‘선은 부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의 말씀이다(禪是佛心 敎是佛語)’라는 한마디에서 집약된 서산의 禪敎觀은 중·후기의 불교계에 미친 그의 절대적 영향에 따라 전체 불교계를 지배하였다. 이에 더하여 서산이 제시한 自性彌陀의 정토관 역시 크게 영향을 미쳐서 이 시기의 승려들은 看經과 참선과 염불을 복합 수행하는 것을 일반적인 경향으로 여겼다. 그래서 종합수도원인 叢林에는 講院·禪院·念佛院이 갖추어졌다.
서산의 제자들도 그와 유사한 경향을 보였다. 泗溟대사 松雲惟政(1544∼1610)은 서산의 禪敎會通觀을 계승하여 선과 교를 같은 차원에서 중시하였는데, 송운은 교학의 근거로 법화경과 화엄경·미타경 등 경전을 거론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교학에 의미를 부여하였다. 송운은 염불에 대해서도 일념으로 염불하면 48願의 자비로 無量光佛이 중생을 구제한다는 절대 他力信仰을 표명하여 서산의 자성미타보다 본격적인 정토신앙의 수용을 보여주었다. 鞭羊彦機(1581∼1644)는 서산의 제자 중에서도 문중이 가장 번성하였는데 교학에 대한 소양이 더욱 풍부하였다. 편양은<禪敎源流尋劒說>에서 敎門은 中根과 下根을 위해 마련한 것이며 敎外別傳인 禪門은 上根機를 위해 시설한 것이라고 구분하면서, 이러한 교와 선의 구별은 법의 차이가 아니라 수행자의 根機에 의한 주관적 차별임을 주장하였다.232)彦機,≪鞭羊堂集≫권 2, 禪敎源流尋劒說(≪韓國佛敎全書≫8, 256∼257쪽). 편양도 徑截門·圓頓門·念佛門 등의 공부를 차례로 열거하여 겸학을 중시하며, 마음과 부처와 六度가 하나이고 16觀門을 별도로 세워 지성염불하면 蓮華淨土에 왕생함을 인정하면서도 참선이 곧 염불이요 염불이 곧 참선이며 사바 즉 정토라고 보아 서산과 근사한 관점을 보였다. 逍遙太能(1562∼1649)은 선교는 同根一味이며 주관적 心識으로 분별될 뿐이라는 선교관을 가지고, 교학은 불필요하지는 않지만 문자에 집착하는 것은 경계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소요는 사바세계가 바로 安養 즉 극락이며 空假의 세계가 극락이라 하여 편양와 같은 정토관을 보였다. 靜觀一禪(1533∼1608)은 선과 교가 本來無一物이라는 회통관을 계승하였지만 역시 경전에 마음을 잃어 본지를 잃을까 걱정하며 제자들의 자각을 당부하였다. 정관은 居士를 지도하면서 극락왕생과 菩提證得을 소원하는 정토신앙을 보였다. 中觀海眼(1567∼?)은 靈山經과 少林禪이 둘이 아닌 것은 부처와 중생이나 空과 有 그리고 眞諦와 俗諦가 둘이 아닌 것과 같다는 회통관을 보여주며, 선정과 간경과 공양과 行智가 구족한 것을 骨과 髓와 皮와 眼目에 비유하면서 이런 구별은 단지 색상의 집착에서 오는 것일 뿐임을 지적하였다.233)李永子,<朝鮮 中後期의 禪風>(≪韓國禪思想硏究≫,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1984).
이러한 삼학수행의 일반화 경향을 잘 드러내는 것이 振虛捌關이 영조 45년(1769)에 펴낸≪三門直指≫이다. 진허는 불법에 경절문과 원돈문과 염불문의 세 문이 있어서 정토에 왕생하고 법계에 證入하며 심성을 直見하는 문은 서로 다르지만 그 중심 내용은 같아서 한 방의 세 문과 같기에≪삼문직지≫를 펴냈음을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234)捌關,≪三門直指≫序(≪韓國佛敎全書≫10, 138쪽 하). 이 책은 염불문에 각종 염불에 대한 설명과 眞言을 싣고, 원돈문에 知訥의 圓頓成佛論과 義相의 法界圖頌을, 그리고 경절문에 지눌의 看話決疑論을 비롯한 법어와 규약을 실어 삼문에 대한 내용을 집약하고 있다. 이것은 당시의 불교계에서 참선과 교학과 염불을 함께 수행하는 것이 보편적인 현상이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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