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사상이 발달하게 된 내재적 배경으로는 조선 후기사의 전개과정에서 나타난 사회경제적 제현상을 비롯하여 정치·문화적 요소들이 종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던 점을 들 수 있다. 즉 실학사상은 17세기 이래 조선왕조 사회에서 전개된 사회경제적 변동 및 문화변동의 산물이었다.
실학사상 발달의 내재적 요인으로는 우선 조선 후기 사회의 경제적 변화와 발전현상을 주목할 수 있다. 17∼18세기 이래의 농촌사회에는 커다란 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일부 대토지 소유자에 의해 토지겸병이 확대됨에 따라 대다수의 농민은 소작농으로 전락하거나 아니면 토지를 잃고 농촌을 떠나는 현상이 발생했다. 그리고 이와 함께, 또 다른 한편에서는 소작경영이나 상업적 농업을 통해 부를 축적해 가는 經營型 富農이나 庶民地主가 나타나고 있었다. 이는 곧 농민층 분해현상의 집중적이고 구체적인 표현이었다.
실학은 이러한 농민층 분해과정에서 이에 대한 대안적 사상으로 형성되었다. 여기에서 실학자들은 농민층 분해의 여러 방향에 따라 각기 다르게 자신의 개혁안을 구상했던 것이다. 일부 실학자들은 농민층 분해현상을 주의 깊게 관찰하면서 상업적 농업경영자 및 일부 성장하고 있는 부농층의 처지를 대변했고, 또 다른 사상가들은 토지에서 이탈된 빈농들에 대한 대안을 마련해 보고자 했다. 또 한편에서는 지주적 토지소유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지주의 토지소유 자체는 인정하고 경영의 전환과 소작조건의 개선방안을 모색하기도 했다.411)金泳鎬, 앞의 글, 128∼144쪽.
아울러 양란 이후 상품화폐경제의 발전 역시 실학사상의 발생에 있어서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특히 18세기 이후 상품화폐경제의 발전과정에서 서울이 상업도시적 양상을 띠게 되자 이에 영향 받은 실학자들이 나타났다.412)李佑成,<18세기 서울의 도시적 양상-실학파 특히 이용후생파의 성립배경->(≪鄕土서울≫17, 서울특별시시사편찬위원회, 1963). 이들은 상업과 수공업에서 새로운 동향을 주목하면서 18세기 이후 서울의 도시적 분위기에 걸맞은 유통을 중시하는 경세론을 펴게 되었다. 이러한 이해는 이들이 성장하고 체득했던 서울의 도시적 분위기와 유통경제의 활기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경제력을 높이는 생산활동과 유통경제의 활성화를 긍정적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이것의 적극적 발전을 주장했다.
이와 함께 조선 후기의 사회계급적 변동 역시 실학발달의 원인으로 들 수 있다. 전쟁 후의 조선사회는 중세적 신분질서가 비교적 폭넓게 붕괴되면서 대체로 양반의 일부와 대다수의 농민층이 경제적으로 몰락해 가는 하향방향과 서민층의 일부가 신분상승을 성취하는 상향방향으로 나타났다. 이런 변화에 직면한 일부 진보성향의 사상가들은 사회적으로 하향과정에 놓여 있는 양반층의 생계대책과 함께 상향과정에 들어선 서민층의 이익을 보장하는 문제에 주목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실학자들은 사회현상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대책을 모색하는 가운데 현실개혁적 실학사상이 형성되었던 것이다.413)金泳鎬, 앞의 글, 159쪽.
조선 후기 실학사상이 성립하게 된 또 다른 배경으로는 성리학을 본위로 한 조선사상계의 지형이 바뀌고 있었던 점을 들 수 있다. 성리학은 15세기 조선왕조의 사회질서를 수립하고 이를 유지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근간이 되던 사상이었다. 성리학은 조선 후기 사회에서도 대표적 사유형태였으며 경세론으로 의연히 작용하고 있었다. 더욱이 양란 후의 조선왕조 사회는 모든 분야에 걸쳐 그 부조리가 드러나고 변화의 조짐이 나타남에 따라 전면적이고 본질적인 개혁이 필요했다. 그러나 당시까지도 국가운영의 지배원리였던 성리학적 경세론은 그 합리적 수습책을 제시하지 못했고, 교조주의적 경향과 명분론을 강화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에 이르러서 조선의 사상계에서 성리학의 학풍을 추구하면서도 주자 유일기준의 입장을 벗어나서 새로운 기준에 입각한 학문경향이 나타나기도 했다. 韓百謙·李睟光 등으로 대표되는 이러한 경향의 학인들은 당시 성리학계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던 주자를 유일한 기준으로 삼아 공허한 논의가 성행하고 있던 상황에 대해서 비판적 입장을 견지했다.414)金泰永, 앞의 글, 214쪽.
權得己(1570∼1622)나 權諰(1604∼1672)부자 許穆의 경우에도 주자 유일기준을 거부하고 있었다. 특히 허목의 경우에는 古文·古學을 존중하며 朱子註疏의 번잡함과 폐쇄성을 탈피하여 육경을 중시하는 원초유학의 체제로 복귀하고자 했다.415)鄭玉子, 앞의 글, 230쪽. 그들은 성리학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하여 선진시대의 원초유학으로 돌아가 왕도정치론의 견지에서 새로운 개혁안을 모색해 낸 것이었다. 그 결과 조선 후기 사회에서는 성리학적 학문체계에서 벗어난 새로운 학풍이 형성되어 갔고, 여기에서 탈성리학적-원초유학적 입장에서 제시된 개혁사상인 실학사상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18세기에 후반기에 이르러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한 사회질서가 동요되던 당시의 사상계에서도 동일하게 드러났다. 그리하여 京華士族을 중심으로 한 京華學界 일각에서는 기존의 성리학적 義理之學을 반성하는 새로운 학문적 지향이 제기되었다.416)劉奉學,≪燕巖一派의 北學思想의 硏究≫(一志社, 1995), 79∼99쪽.
이렇게 성리학의 자기극복의 과정에서 실학이 나타나게 된 것은 실학자 대부분이 성리학적 지식을 기본교양으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학자들은 이미 거론한 대로 적극적으로 성리학을 부정하거나 거부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조선 후기 당시의 실학자들은 기득권을 장악하고 있던 성리학자들과 본격적인 갈등이나 대립을 겪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시대의 권력구조와 사회질서와 문화전통의 해석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여 전면적으로 반성·비판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이 때문에 실학사상은 조선 후기라는 중세사회 해체기에 등장한 이상사회의 중세적 재건논리였다는 특성에만 머물게 되었다.417)趙 珖, 앞의 글, 429쪽.
마지막으로 실학사상 발달의 또 다른 내재적 요인으로는 정치적인 면에서 전쟁 후의 조선왕조 사회가 직면하고 있었던 통치질서의 경직화 현상을 들 수 있다. 16세기경부터 일부 변질되기 시작한 조선왕조적 통치질서는 전쟁을 겪으면서 동요되기 시작했다. 집권층의 벌열화, 수취체제의 붕괴, 신분체제의 동요, 농본주의 생산체제의 일부 변화 등은 15세기를 통해 짜여진 조선왕조 본래의 經國大典的 통치질서에 상당한 수정을 가해야 할 필요성이 절실했다.
전쟁 후의 조선왕조 사회에는 전면적이고 본질적인 개혁이 요청되었으나 성리학적 왕도정치론에 침잠되어 있던 집권세력은 폭넓은 개혁방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다만 小變通論의 입장에서 보완적 체제유지책을 세우는 데 한정됐을 뿐이다. 그러나 일부 상대적 진보성향의 관료와 재야의 지식인들이 조선왕조 자체를 유지하는 범위 안에서 벌열세력을 억제하고 국가의 통치체제를 강화해서 민생을 안정시킬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고자 했다.418)李佑成,<實學硏究序說>(≪實學硏究入門≫, 一潮閣, 1973).
이러한 조선 후기 통치질서의 경직화 현상에 대한 발생은 왕도정치론의 구현을 위한 현실적 대안들에 대한 사고를 요청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16세기 말 이이가 제시한 바와 같은 務實論 즉 현실개혁론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주자 유일기준이 아닌 원초유학의 입장에 선 무실론을 전개했고, 그것을 다시 발전시켜 독자적인 학문영역으로 성립시켜 나갔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에게 있어서 왕조 전기의 과학부문의 업적이나 무실론으로 대표되는 경세적 학풍들은 참고된 바가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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