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실학사상의 발달에는 내재적 요인과 함께 국제정세의 변동과 이 시기에 전래된 西學 및 청대 학문의 영향도 일정하게 작용했다. 국제정세의 변동 가운데는 조선과 청이 맺고 있던 관계를 주목해 보고자 한다. 즉 조선은 병자호란의 과정에서 참패를 당했고 이를 만회하기 위한 노력을 여러 측면에서 벌여 나갔다. 또한 대륙에서도 명·청의 교체가 일어나, 청이 중국의 정통을 이어받게 되었다.
이와 같이 새롭게 전개된 일련의 상황에서 조선의 사상계에서는 전통적인 正統論과 華夷論에 대한 재검토작업의 과정에서 조선중심주의가 일어나서 小中華論 혹은 小華論을 제시하게 되었다.419)鄭玉子,≪朝鮮後期 朝鮮中華思想硏究≫(一志社, 1998) 참조. 이 주장은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당시의 현실을 中華가 이미 소멸된 상황으로 규정했던 사실을 전제로 하여야 올바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성리학을 기준으로 한 왕도정치론의 입장에서 조선만이 중화문화의 정수를 보존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리하여 이들은 조선의 학계가 다시 중국에 이를 전수시켜 주어야 할 책임을 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국제정세의 변동으로 인해서 초래된 이와 같은 조선중심주의적 사고방법의 출현은 실학자들의 자아각성에도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 실학자들의 사이에서도 정통론과 화이론의 재검토작업이 진행되었고, 이 재검토작업은 실학자 자신의 사상이 새롭게 정립되는 데에 적극적으로 기여했다.
한편, 당시 국제정세의 변동은 서세동점의 현상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서세동점의 결과로 중국에 전해진 서학사상은 조선에도 전파되었다.420)趙 珖,<조선 후기 서양과의 관계>(≪한국사≫32, 국사편찬위원회, 1997), 480∼485쪽. 그리고 17세기 이래 중국에서 간행된 각종의 漢文西學書들 가운데 상당수가 조선에 전래되어 당시의 지식인들에게 읽히고 있었다.421)李元淳,<明淸代 西學書의 사상사적 위치>(≪韓國天主敎會史論文選集≫1, 韓國敎會史硏究所, 1975). 이 때 전해진 서학서 가운데에는 천주교사상을 논하는 서적과 함께 수학·천문학·농학·측량·지도와 같은 과학기술 계통의 서적이 있었다.
한문서학서를 통해 실학자들에 흡수된 서학의 종교사상은 그들의 철학적 사유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조선 후기 서학사상을 수용한 지식인층은 대체로 성리학에 대해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선진유학에 기초하여 원초유학적 입장에서 성리학적 가치체계를 변혁시켜 보려던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당시의 학문풍토가 지니고 있던 사변적 경향과 관련하여 한문서학서 가운데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는 理篇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서 주로 논하고 있던 내용은 원초유학의 神觀에 대한 수용을 뜻하는 補儒論的 천주교신앙이었다. 보유론은 서학이 유학에 대립되는 사상이 아니라 유학의 부족한 점을 보충해 준다는 이론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이 기초하고 있던 원초유학적 입장을 포기하지 않고서도 서학에 접근할 수 있었다. 즉 그들이 원초유학의 틀을 빌려 자신의 교리에 대한 설명을 시도하던 서학에 접근할 수 있었던 까닭은 심성론을 비롯한 그들의 사상이 이미 성리학적 사상의 틀을 떠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들은 서학서에서 논의하는 인간관 등의 개념을 원용하여 자신의 이론을 발전시켜 나가기도 했다.422)金承惠,<“七克’”에 대한 硏究>(≪敎會史硏究≫9, 韓國敎會史硏究所, 1994), 177∼190쪽 참조. 丁若鏞의≪孟子要義≫에 나오는 ‘自主權’의 개념도 漢文西學書 가운데≪七克≫등의 영향으로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그들은 선진유학의 재검토를 기초로 하여 성리학의 사상체계를 개혁하고자 시도했고, 여기에서 그들은 서학 자체도 변혁의 이념으로 파악하고 이를 연구했던 것이다.423)趙 珖,<朝鮮後期 思想界의 轉換期的 特性-正學·實學·邪學의 對立構圖->(≪韓國史 轉換期의 문제들≫, 한국사연구회편, 지식산업사, 1993), 170쪽. 이리하여 서학은 실학이 성리학과 구분되는 독자적인 사상체계로 발전하는 데에 일정한 도움을 줄 수 있었다.
또한 서학의 과학기술에 대한 이론들도 실학자들의 사상형성 및 과학연구에 자극을 주었다. 실학자들은 서학의 자극을 받으며 천문학과 지리학 혹은 기하학 등의 연구에 박차를 가하기도 했다.424)朴星來,<마테오 리치와 韓國의 西洋科學 受容>(≪東亞硏究≫3, 西江大 東亞文化硏究所, 1983).
―――,<≪星湖僿說≫속의 西洋科學>(≪震檀學報≫55, 1985). 서양의 과학기술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자는 주장도 제기됐으며, 서학서의 이론을 직접 적용하여 擧重機와 같은 실용적인 토목공사용 기계를 제작하기도 했다.
서양천문학에 대한 이해가 넓어지면서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는 인식이 확대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학문의 관심이 조선과 조선문화로 돌려질 수 있었다. 즉 실학이 조선중심적인 사유체계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에는 서양천문학의 영향으로 인한 지식의 확대가 중요한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천문학은 天時를 정해 주어야 하는 중국황실에서는 帝王之學으로 소중히 여겨 왔지만, 반면에 조선에서의 천문학은 원래 中人之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대부분이 양반출신이었던 실학자들은 천문학의 연구를 시도하여 조선의 王格을 중국의 황제와 대등하게 하려 했고, 조선이라는 국가적 존재의 위상을 중국과 대등한 지위로 격상시켜 해석하고자 했다. 여기에서 서학이 실학의 발전에 영향을 준 또 다른 면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한편 명말·청초 중국의 실학적 학풍과 청대의 고증학도 조선 후기 실학사상의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黃宗羲·顧炎武·王夫之·顔元 등에 의해 제시되었던 명말청초의 학술사상에서는 일종의 ‘민족의식’과 민본의식 그리고 현실개혁 의식이 강하게 나타나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학문경향에서 등장하는 개혁적 이상은 청조 지배층의 의도적 왜곡작업으로 인해 변질되었다. 그 개혁적 이상이 거세되고 考證學으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18세기 후반 이후에 활동했던 조선실학자들은 명말청초의 사상을 통해 자신의 개혁이념을 가꾸어 나갔다.425)全海宗,<淸代 實學과 李朝後期 實學의 比較小論>(≪第1回 韓國學國際會議論文集≫,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79). 한편 청조의 고증학도 조선 후기의 일부 실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청조 고증학의 영향을 받은 실학자로는 李德懋·朴齊家·丁若鏞·金正喜·李圭景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정약용이 청대 고증학에 대해 동조하기보다는 오히려 냉담하기조차 했던 사례에서 드러나듯이 조선 후기 실학에 미친 청대 고증학의 영향은 상당히 제한적인 것이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조선 후기의 실학은 고증학보다 명말·청초의 학문경향에 좀더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조선 후기 실학사상의 발생배경은 내재적 요인과 외래적 요인으로 나누어 검토할 수 있다. 실학사상이 조선 후기라는 장기간에 걸쳐 전개되던 과정에서 각 시대에 따라서 달리 나타난 내외적 배경들은 실학사상의 전개과정에서 그 사상적 특성을 형성하는 데에 적지 않게 영향을 주었다. 조선 후기 실학사상의 발생배경 가운데 그 내재적 요인으로는 농업변동과 농민층 분해,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신분제의 붕괴 및 평민의식의 성장 등을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조선 후기 사회가 직면하고 있었던 국제환경의 영향 아래 실학의 외래적 요인들이 조성되어 갔다. 실학은 대륙정세의 변동이나 西勢東漸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무관할 수 없었다. 실학은 서학 및 명·청대 학술의 수용 등 조선 후기사의 주체적 전개과정 속에서 형성되고 발전되어 갔다. 아울러 실학자의 이러한 사상전환은 기존 사상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얻어진 단절의 결과가 아니라 그것을 비판적으로 수용함으로써 가능하였기 때문에, 조선 후기의 실학사상은 전통성리학의 발전적 자기극복과정에서 성장하고 발달하였던 것이다.426)鄭在貞,<朝鮮後期 實學硏究의 동향과「국사」교과서 서술의 변천>(≪歷史敎育≫39,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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