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지리학의 괄목할 만한 성과는 계통지리학의 발달이다. 이 분야는 기존의 지리가 잡다한 내용으로 구성되었던 것과 달리 역사지리·농업지리·교통지리 등 특수한 내용만을 체계적으로 다루고 있는 점이다.
역사지리분야의 연구로는 韓百謙의≪東國地理誌≫, 安鼎福의≪東史綱目≫ 地理志, 丁若鏞의≪我邦疆域考≫등을 들 수 있다.≪동국지리지≫는 왜란 후에 편찬된 최초의 계통지리서로서 역사상의 영토변천과 천도의 과정, 고지명, 古戰場의 위치, 전략요지의 특성 등을 문헌고증과 답사의 방법으로 연구한 것이다.532)尹熙勉,<韓百謙의 學問과 東國地理志 著述動機>(≪震檀學報≫63, 1987), 162쪽.
≪동사강목≫지리지는 고대국가의 영토, 주요 산천의 위치 등을 고증하는 동시에 요동지방 상실의 요인과 배경을 분석하고 있다.533)姜世求,<順庵 安鼎福의『東史綱目』「地理考」에 관한 考察>(≪歷史學報≫112, 1986), 61∼65쪽. 정약용의≪아방강역고≫역시 국경과 영토의 변천과정을 고증한 역사지리서로서 저자의 집필의도는 왜란으로 피폐한 민심을 수습하고 백성들에게 국토의식을 심어 주는 것이다.534)千寬宇,<韓國實學思想史>(≪韓國文化史大系≫Ⅵ, 高麗大 民族文化硏究所, 1970), 1033∼1035쪽. 한말에 오면 선각자 張志淵은≪아방강역고≫의 내용이 당시 학생들의 애국심 고취에 적합하다고 믿어 이를≪大韓疆域考≫저술의 기초로 삼았었다.535)南相駿, 앞의 책, 20∼21쪽.
교통분야의 연구는 조선 후기의 지방상업발달과 무관하지 않다. 李瀷·柳馨遠·李重煥·朴趾源·丁若鏞·朴齊家·申景濬 등 교통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학자들은 도로의 개발과 수레의 이용, 내륙수로와 항만개발의 필요성 등을 역설하였는데, 그 이유는 교통의 발달이 국가의 부강은 물론 지역통합의 효과를 가져온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이 주장하는 바를 요약한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 나라는 산이 많지만 도로개발에 힘쓰면 어느 지방에서나 수레를 사용할 수 있다. 둘째, 왜구의 출몰로 漕運路가 막힐 것에 대비하여 육로의 개발이 필요하다. 셋째, 여러 가지의 교통수단 가운데 배가 가장 운송비가 저렴하고 그 다음은 수레이므로 수상교통을 발달시켜야 한다. 넷째, 항만을 개발하여 외국과 직접 교역함으로써 수출산업을 육성하고 동시에 서양의 문물을 수입할 것을 촉구하였다는 내용 등이다.536)李 瀷,≪星湖僿說≫권 13, 人事門 驢輦.
朴齊家,≪北學議≫(李翼成 譯, 한길사, 1992), 171∼175쪽.
柳馨遠,≪磻溪隨錄≫권 25, 續編, 道路 橋梁.
李重煥,≪擇里志≫,卜居總論 生利.
신경준은 교통문제를 가장 심도있게 다룬 학자로서 그는 “도로는 경제발전과 지역통합에 큰 역할을 하니 정사에서 중요시해야 할 과제는 治道”537)申景濬,≪道路考≫序文.라고 하였다. 교통로가 잘 정비되고 물자유통이 원활해지면 원거리 교역체계가 형성되고 교통요지에는 상업취락이 발달한다. 유형원은 이러한 취락들을 개발하는 案(站店頃)을 제시하였으며,538)柳馨遠,≪磻溪隨錄≫권 1, 田制 상, 分田定稅節目 站店. 柳壽垣은 이러한 취락들의 계층화에 따라 지방상권, 대지역상권, 나아가서 전국적 단일상권의 발달이 이루어진다는 이론을 제시하였다.539)劉元東,≪韓國實學槪論≫(正音文化社, 1984), 20쪽.
농업은 조선시대 국가경제의 근간이었던 만큼 이 분야에 대한 학자들의 연구성과는 괄목할 만하였다. 그런데 농업은 지형·기후·농산물의 유통 등 지리적 조건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농업의 발달이 지리적 사고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간과할 수 없다. 지리적 관점에서 볼 때 농업분야의 연구는 경지개발·토지이용·농업경영 등 세 분야로 고찰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경지개발은 산록사면과 저습지를 대상으로 시행되었다. 그런데 과도한 산지개간은 삼림파괴에 따른 풍수해와 가뭄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조선 후기에는 산지보다 저습지를 주요 개간대상으로 삼았다.
농업경영분야는 농민의 복지와 직결되는 사항이므로 유형원·박지원·정약용·홍만선 등 다수의 실학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유형원은 효율적 토지이용대책을 위한 방안으로 토지의 비옥도·수리조건·지형조건 등을 기준으로 한 토지등급의 합리화와 구획정리를 제시하였다.540)柳馨遠,≪磻溪隨錄≫권 1, 田制 상, 分田定稅節目. 그 밖의 실학자들은 원예농법을 통한 집약적 토지이용과 농산물 유통체계의 합리화를 통한 近郊農民의 소득증대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즉 그들은 한양 근교의 농민들이 도성으로부터 비료를 공급받으면서 출하시기가 다른 각종 과채류를 재배하여 도성에 출하함으로써 높은 수입을 올리는 점에 착안하여, 이러한 영농기술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킬 것을 강조하였다.541)朴趾源,≪燕巖集≫별집 권 8, 放璚閣外傳.
丁若鏞,≪經世遺表≫권 5, 地官修制 田制 3;권 8, 地官修制 田制 11 井田議 3.
洪萬選,≪山林經濟≫권 1, 治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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