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調」라는 용어가 그러하듯이「辭說時調」 또한 본래는 평시조보다 긴 사설을 엮어 넘기는 창법의 명칭으로 쓰이다가 이에 속하는 작품들 전반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정착되었다. 그 형태는 대개의 경우 종장은 평시조와 비슷한 틀을 유지하되 초·중장은 그 일부 또는 전부가 4음보 율격의 정제된 구조에서 현저하게 이탈하여 장형화된 것이 특징이다. 사설시조는 17세기 말 이전에 이미 발생하였음이 분명하나, 그것이 본격적으로 향유된 것은 18·19세기의 일이다.
사설시조는 평시조의 균정된 틀과는 달리 비교적 자유로운 반복·부연·강조가 가능한 형식을 통해 평민적 언어와, 익살·풍자 및 분방한 체험을 표현했다. 사설시조를 지배하는 원리는 웃음의 미학이라 할 수 있겠는데, 삶의 욕구와 규범 사이의 긴장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 중세적 고정관념을 거리낌 없이 희화화시키는 滑稽性, 고달픈 생활에 대한 해학 등이 그 주요 내용을 이룬다. 아울러 남녀간의 애정과 기다림 그리고 性의 문제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며 대개는 직선적인 언어를 통해 강렬하게 다루어진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특질이다. 전아한 기품과 관조적 심미성을 존중해 온 평시조 양식과 달리 사설시조는 거칠면서도 활기에 찬 삶의 역동성을 담고 있다. 이러한 심미적 특징과 시적 시각의 참신성으로 인해 사설시조는 조선 후기 문학사의 새로운 국면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어이려뇨 어이려뇨 싀어마님아 어이려뇨
쇼대남진의 밥을 담다가 놋쥬걱 잘를 부르쳐시니 이를 어이려뇨 싀어마님아
져 아기 하 걱졍 마라스라 우리도 져머신 제 만히 것거 보왓노라.
(珍本≪靑丘永言≫)
이 작품은 어떤 평민층 집안의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의 희극적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등장인물인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모두 샛서방을 둔 적이 있거나 현재 두고 있는 아낙네들이다. 귀중한 살림도구인 놋주걱을, 그것도 샛서방의 밥을 담다가 부러뜨렸으니 며느리로서는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작품의 희극적 묘미는 바로 그러한 긴장이 “우리도 져머신 제 만히 것거 보왓노라”라는 시어머니의 말로써 깨뜨려지는 데에 있다. 사설시조는 이러한 희극적 형상화를 통해 인간의 범상한 욕망과 용렬함을 조명하는 데에 뛰어난 장점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사설시조는 종래의 관습화된 미의식과 규범적 사고로부터 벗어난 인간의 모습·욕망·갈등을 시의 세계 안에 이끌어들이고 갖가지 추한 것과 비천한 것들까지도 적극적으로 다룸으로써 새로운 문학적 지평을 개척했다.
사설시조를 창작한 중인층 작가 중에서는 김수장이 각별히 주목될 만하다. 김수장(1690∼?)은 숙종 때 병조서리를 지냈으며, 김천택과 더불어 당대의 쌍벽을 이룬 가객이었다. 그는≪해동가요≫를 편찬한 외에, 가단활동을 통해 시조 창의 보급에도 공헌했다. 다음은 그가 창작한 사설시조 중의 한 편이다.
書房님 病 들여 두고 쓸 것 업셔
鍾樓 져 달 파라 고 감 고 榴子 고 石榴 삿다 아 이저고 五花糖을 니저발여고
水朴에 술 노코 한숨계워 노라.
(周氏本≪海東歌謠≫)
이 사설시조는 평범한 아낙네의 모습을 관찰한 재미있는 작품이다. 이 여인은 병든 남편에게 화채를 만들어 주려고 자신의 머리카락을 팔아 재료들을 샀는데, 돌아와서 보니 오화당을 빠뜨렸다고 한탄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적 관찰을 통해 시정의 범상한 인물들에 대한 작자의 정겨운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아’ 하는 감탄사를 적절히 구사하여 여인의 당황하는 모습과 애틋한 마음씨를 해학적인 필치로 그린 점도 각별한 묘미가 있다.
窓 내고쟈 窓을 내고쟈 이 내 가슴에 窓 내고쟈
고모장지 셰살장지 들장지 열장지 암돌져귀 수돌져귀 목걸새 크나큰 쟝도리로 바가 이 내 가슴에 窓 내고쟈
잇다감 하 답답 제면 여다져 볼가 노라.
(珍本≪靑丘永言≫)
이 작품은 평민층 작가에 의한 사설시조로 추정되는데, 마음속에 쌓인 답답함을 가슴에 창문이라도 내서 시원스럽게 펴고 싶다는 재미있는 착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구체적인 생활언어와 친근한 일상적 사물을 다소 수다스럽게 열거함으로써 괴로움을 강조하는 수법은 다분히 해학적이기도 한데, 비애와 고통을 어둡게만 그리지 않고 이처럼 웃음을 통해 극복하는 데에 사설시조가 민요와 더불어 공유하는 평민문학의 특징이 엿보인다.
이와 같은 전반적 특질을 지니면서도 사설시조는 18세기로부터 19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서 주목할 만한 성격상의 변화를 보여준다. 범용한 세속적 인물과 하층민들의 삶에서 일어나는 희극적 사건이나 욕구를 주요 내용으로 삼는 작품들의 비율은 후기로 가면서 점차 줄어드는 반면, 전원에서의 한가로운 정취와 풍류를 노래한 작품들은 뚜렷이 증가하는 추세를 보인다는 점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설시조의 중심적 특성이라 할 수 있는 世態詩·戱畵詩的 양상은 19세기에 접어들면서 현저히 감소하고, 그 대신 사설시조가 평시조의 주류적 미의식에 부분적으로 근접해 가는 현상이 나타났던 것이다.606)金興圭,<朝鮮 後期 辭說時調의 詩的 關心 推移에 관한 計量的 分析>(≪韓國學報≫73, 一志社, 1993) 참조.
이러한 변화를 초래한 원인으로는 18세기 중엽 이래의 사설시조 향유 및 전승에서 중인층의 창악 취미활동이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점에 주목된다. 중인층을 중심으로 하여 시조를 향유하던 집단은 19세기에 와서 점점 더 시조의 심미적 세련과 고아한 격조, 意趣를 중시했던 바, 그러한 추이 속에서 사설시조 역시 그 세태시적 골계성의 감소라는 변이를 겪게 된 것이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