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민층의 가사는 내용이 좀더 다양한데, 대체로 세 계열로 나눠 볼 수 있다. 그 첫째 계열은 당대사회의 모순과 학정으로 인한 민중들의 고통을 노래한 작품들로서,<甲民歌>(18세기 말),<井邑郡 民亂時 閭巷聽謠>(현종 2:1836년경),<居昌歌>등을 꼽을 수 있다. 이런 작품들은 다수의 민중들 사이에 널리 구송되면서 그들의 현실 경험에 일련의 집단적 형상을 부여하는 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정조 16년(1792)경의 작품인<合江亭歌>는 이들과 성격이 상통하나 문체적 특성으로 보아 현실에 불만을 품은 식자층의 창작이거나, 혹은 평민적 근원의 노래가 그러한 인물의 손을 거쳐 정착된 것이 아닌가 한다.
<愚夫歌>·<庸婦歌> 등은 둘째 계열에 드는 작품들로서, 추하고 탐욕스런 인물을 등장시켜 신랄한 풍자를 가하면서 당시의 변환기적 세태를 재미있게 희화화했다. 이 부류의 작품들은 판소리에 있어서의 놀부의 심술타령 대목이라든가 뺑덕어멈 흉보는 대목과도 흡사하다. 아래의 예에서 보듯이,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갖은 허욕을 일삼다가 패가망신하는 인물을 그리면서 이 작품들은 조선 후기 사회의 한 면모를 희극적 전형으로 드러냈다.
져 건너 원은 졔 아비의 덕분으로 돈 쳔이나 가졋드니
슐 한잔 밥 한슐을 친구 졉 얏든가
쥬져넘게 아 쳬로 음양슐슈 탐혼야
당대발복 구산기 피란곳 져가며
울젹 갈젹 노상에 쳐식을 흣허녹코
공납범용 허 허니 일가 집에 부 업고
물 경영허고 경향 업시 다니며
상가의 쳥질허다 봉변허고 물너셔고
(<愚夫歌>)
평민가사의 셋째 계열은 남녀간의 애정을 중심으로 하여 욕구와 좌절·지연·성취 등의 문제를 다룬 작품들이다.<老處女歌>·<靑春寡婦傳>·<居士歌>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유통의 범위가 매우 넓어서 이본들이 많이 파생되었고,<노처녀가>처럼 방각본 소설집인≪三說記≫속의 한편으로 수록된 것도 있다. 아울러 이 부류의 작품들에서는 가사가 허구적 서사로 나아가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들이 지닌 서사성은 본격적인 소설의 잘 짜여진 사건구조와 사실적 서술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가사가 단순히 주정적인 表白이나 실제 경험의 서술에 머무르지 않고 전형화된 갈등의 서사적 전개에까지 영역을 확대한 점은 평민가사의 주요한 특성이자 성과라 할 수 있다.≪삼설기≫에 실린<노처녀가>는 나중에<각시젼>이라는 소설로 완전히 전환되기까지 하였다.
위의 셋째 계열의 작품들은<相思別曲>·<斷腸歌>·<良辰和答歌>등과 함께 애정가사로 분류될 수도 있다. 소재적 관점에서 설정되는 애정가사의 범주에는 규방가사 중의 일부 작품들도 포함된다. 사대부 남성들의 경우에는 戀君의 寓意的 표현을 제외하고는 남녀의 애정문제를 진지한 관심사로 노래하지 않은 무언의 관습이 강했던 데 비해, 부녀자들과 평민층은 그러한 규범에 별로 구애받지 않은 까닭에 이러한 친화현상이 나타났다.
한편 불교가사를 통해 오랜 동안 종교적 감화의 수단으로 요긴하게 쓰여 온 종교가사 또한 18·19세기에 이르러 그 작품량이 더욱 늘어나고 다양해졌다. 승려와 일반 신도들에 의해 지어진 각종 불교가사는 물론, 18세기 말엽의<天主恭敬歌>(李檗),<十戒命歌>(丁若銓)를 비롯한 天主歌辭, 19세기 중엽의<龍潭遺詞>(崔濟愚, 1824∼1864) 등이 그것이다. 이들 종교가사들은 평이한 언어로써 종교적 가르침과 신념을 표현하여 신자들 사이에 널리 구송·전파됨으로써 해당 종교의 민중적 기반을 확대하는 데 더 크게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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