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는 서사적 내용을 창곡에 실어 연창하는 예술로서, 17세기 말엽 혹은 18세기 초 무렵부터 그 본격적인 모습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초기 단계의 판소리는 물론 내용과 표현이 모두 소박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세속화된 직업적 연희로 성공하기 위해 창자들은 다채로운 레퍼토리와 풍부한 내용 및 음악적 탁월성을 갖추기에 힘써야 했고, 그 결과 18세기 중엽의 판소리는 매우 높은 수준의 唱樂的 서사시로 발전하였다.
판소리의 창자들은 창을 엮어냄에 있어서 새로운 이야기를 창작하기보다는 전래하여 오던 설화를 근간으로 하여 그것을 다채롭게 윤색·개작하는 방향을 택하였다. 이렇게 해서 일단 성립한 작품들은 창자들의 師承 및 교류에 따라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승되면서 부분적인 개작·확장과 세련 즉「더늠」의 형성에 의해 매우 다양한 내용과 음악적 표현을 축적하였다. 그 결과로 이루어진 판소리 레퍼토리가 열두 마당에 이르렀음을 19세기 초의 문헌인≪觀優戱≫(宋晩載)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열두 마당 중에서 현재까지 창으로 전해지는<春香歌>·<興甫歌>·<沈淸歌>·<水宮歌>(토끼타령 또는 토별가)·<赤壁歌>를 전승 五歌라 한다. 실전된 일곱 마당 가운데<裴裨將타령>·<가루지기타령>·<雍固執傳>·<장끼전>·<武叔이타령>(왈짜타령)은 辭說本 혹은 소설화된 축약본이 남아 있으나,<江陵梅花타령>·<가짜神仙타령>은 단편적인 문헌기록을 통해 그 존재 사실과 내용이 윤곽만을 알 수 있을 따름이다.613)鄭魯湜의≪朝鮮唱劇史≫에는<가짜신선타령>대신<淑英娘子傳>이 열두 마당의 하나로 열거되어 있으나, 이를 지지할 만한 증거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열두 마당의 전승이 이처럼 줄어들게 된 것은 평민적 기반 위에서 발달하여 온 판소리가 18세기 말 이후 양반·부호층의 청중을 획득하면서 그들의 기호를 강하게 의식한 때문이다. 실전된 일곱 마당이 평민적 해학과 풍자에 철저하였던 데 비하여 전승 5가가 평민적 현실주의와 중세적 가치의식이 공존하는 양면성을 보이는 점도 여기에 기인하는 현상이다.
판소리창자들은 전승적 이야기의 골격을 근간으로 삼되 그 중에서 특히 흥미로운 부분을 확장·부연하는 방식으로 사설과 음악을 발전시켜 나아갔기 때문에 판소리는 이야기 전체의 흥미나 감동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판소리 및 판소리계 소설에서 앞뒤의 내용이 잘 맞지 않거나, 때로는 뚜렷하게 모순되기까지 하는 일이 흔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판소리는 그 나름의 독특한 서사적 구성원리를 가지고 있다. 창과 아니리, 비장과 골계를 엇섞어 배치하여 청중들을 작중현실에 몰입시켰다가 해방하는 방식이 그것이다. 판소리가 청중을 자유자재로 울렸다가 웃겼다가 한다는 예로부터의 말은 바로 이러한 정서적 긴장과 이완의 반복을 지적한 것이다.
판소리 사설은 운문과 산문이 혼합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여러 계층의 청중들을 상대로 하여 積層的으로 발달한 까닭에 언어의 층위가 매우 다채롭다. 그 속에는 전아한 한문 취미의 대목이 있는가 하면 극도로 익살스럽고 노골적인 욕설·속어가 들어 있으며, 무당의 고사나 굿거리가락이 유식한 한 시 구절과 나란히 나오기도 한다. 이 밖의 민요·무가·잡가·사설시조·선소리·십이가사 등 각종 민간가요가 판소리 속에 많이 삽입되었다.
판소리에 투영된 사회의식은 판소리史의 전개과정에 따라 일정하지만 않았으나, 그 창자들이 중세적 신분질서에서 가장 낮은 지위에 속하는 천민이며 18세기 말까지는 평민층 청중들의 영향력이 압도적이었으므로 평민적 세계관과 미의식이 주류를 이루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판소리에서 중세적 관념과 가치는 대체로 희극적 조롱의 대상이며, 평민적 경험에 기반한 세속적 현실주의가 삶의 근본 전망을 이룬다. 다만 이와 같은 성격은 그 자체가 진행과정에 놓여 있던 것인 데다가, 19세기 초기 이래 양반 청중의 영향력이 개입되면서 일부 약화되기도 하였다.614)金興圭,<19세기 前期 판소리의 演行環境과 사회적 기반>(≪語文論集≫30, 高麗大 國語國文學硏究會, 1991) 참조. 판소리가 지닌 양면성 내지 이원성은 바로 이 점에 기인하는 특질이다. 그러나 실전된 일곱 마당까지를 포함하여 생각할 때 판소리 전반의 사회의식과 세계관이 근본적으로 탈중세적 현실주의의 지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의심할 바 없다.
판소리는 독서물로 정착·유통되면서 판소리계 소설이라는 소설유형을 낳게 하고, 조선 후기 소설에 있어서의 평민적 사실주의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판소리로 불리던 12마당 가운데,<변강쇠가>나<가짜신선타령>처럼 판소리계 소설로 미처 정착되지 못한 경우가 있는가 하면,<적벽가>처럼 중국소설≪三國志演義≫의 주요 대목을 역으로 판소리화한 경우도 있어서 판소리와 판소리계 소설간의 관계를 단선적으로 규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판소리 사설로부터 판소리계 소설로 전환하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였음은 분명한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형성과정의 공통성을 제외한다면, 이들은 하나의 유형으로 묶일 만한 사건이나 구조의 유형성을 띠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판소리로부터 유래한 공통의 문체와 수사적 특징, 현실생활에서 늘 만날 수 있는 서민적 인물형, 그리고 그러한 삶에서 배태된 서민적 세계관을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앞서 살핀 여러 유형과 뚜렷이 구별된다.
현재 전하는 판소리계 소설로는≪春香傳≫·≪沈淸傳≫·≪興夫傳≫·≪토끼전≫·≪裵裨將傳≫·≪장끼전≫·≪雍固執傳≫등이 있다. 이 부류의 작품들은 세속의 현실을 중시하는 일원적 세계상 위에서 범용한 사람이 생활 현장에서 겪을 만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 초인적 능력을 지닌 영웅이 존재하지 않으며 사건 전개에 있어서도 경험적인 이해관계가 보다 중시된다는 점, 운문과 산문이 혼합되어 있을 뿐 아니라 고도로 세련된 전아한 언어와 평민층의 발랄한 속어·재담·육담이 섞여 있다는 점, 그리고 삶의 고통을 담은 비장함이 구수한 해학이나 신랄한 풍자와 어우러져 조선 후기 사회의 생활상을 폭넓게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 등에 특징적인 면모와 의의가 있다.
이런 까닭에 판소리계 소설은 그 어떤 유형의 소설보다 많은 인기를 끌어들일 수 있었고, 생성된 이본이 매우 많을 뿐 아니라 이본간의 내용편차도 상당하다. 여기에는 소설의 유통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개작·윤색이라는 일반적 요인 외에, 적층적 구비전승예술인 판소리가 변모·성장해 오는 동안 여러 단계에 걸쳐 소설로의 전이가 이루어진 것도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이는 판소리와 판소리계 소설이 평민층을 기반으로 형성되었으면서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상하층을 두루 자신의 영역 안으로 끌어들이며 성장했던 것임을 보여주는 현상들이다.
이같은 판소리계 소설은 조선 후기의 여러 문학양식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고, 고전소설을 다채롭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주제의 구현 방식이나 문체상의 특징을 비롯하여 날카로운 세태 묘사와 같은 데서 그 점은 두루 발견된다.≪李春風傳≫·≪烏有蘭傳≫·≪三仙記≫와 같은 일련의 희극적 성격을 띤 세태소설들이 판소리 특유의 문체를 통해 범속한 인물들의 삶을 그리고 있다든지, 전체적으로 판소리계 소설과 유사한 평민적 현실주의에 기반하고 있는 것은 그 단적인 예이다. 실제로 세태소설의 대표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인≪이춘풍전≫과≪오유란전≫은 판소리 12마당 가운데<왈자타령(무숙이타령)>·<강릉매화타령>과 여러모로 흡사하여, 판소리계 소설의 磁場 안에서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판소리계 소설의 영향은 동물을 의인화하여 인간사회의 문제를 풍자적으로 다룬 일련의 우화소설에서도 발견된다. 우화소설은 이른 시기부터 민간에 유통되던 단편의 우화들이 소설로 전환된 것인 만큼, 그 유래는 매우 오래다. 그 가운데≪토끼전≫이나≪장끼전≫은 판소리로 불리던 것을 소설화한 판소리계 우화소설이다. 이들 각각은 힘없는 토끼와 자라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부패한 봉건군주 용왕의 향락과 탐욕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는가 하면, 장끼부부를 통해 절대적인 궁핍으로 말미암은 가정의 파괴와 그 극복을 寓意的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이렇듯 우화소설은 우화의 우의적 속성에 의거하여 도덕적 교훈이나 보편적 인간성을 다루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등장하는 동물들을 種으로서가 아니라 개체로 형상화함으로써 조선 후기의 구체적 인물과 생활 현실을 풍자적 시각으로 그려냈던 것이다. 이 점은 佛典說話의 爭長說話를 소설화한≪두껍전≫이나 訟事說話를 소설화한≪서대주전≫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몰락해 가던 사족과 성장해 가던 평민부호층과의 대비를 통해 점차 경제적인 능력에 의해 움직여 나가던 조선 후기 향촌사회의 세태를 다루었던 것이다. 이러한 우화소설과 그 안에 담긴 풍자의 정신은 애국계몽기의 서사문학에도 깊은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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