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인들의 활발해진 동방진출과 천주교 예수회의 해외전도 물결을 타고 명 말기에 중국으로 전래된 서양문물이 연경을 왕래하던 우리 사행원들을 통해 처음 국내로 반입된 것은 17세기 초엽이었다.653)李元淳,≪朝鮮西學史硏究≫(一志社, 1986), 219쪽. 그러나 서양화의 유입은 숙종 46년(1720) 冬至使行의 정사 李宜顯(1669∼1745)이 ‘西洋國畵’를 매입해 왔던 숙종 말기부터였고, 영·정년간을 통해 좀더 활발하게 이루어졌다.654)洪善杓,<朝鮮後期의 西洋畵觀>(≪石南李慶成先生 古稀紀念論叢≫(一志社, 1988), 154∼160쪽. 이와 같이 우리 나라로 전래된 서양화는「泰西畵」·「洋畵」·「西洋國畵」·「西國畵」·「罨畵」등으로 불리면서, 조선 후기의 화풍변화에 새로운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서양화의 전래는 赴燕사행원들이 사 오거나, 천주당에서 선물로 받아 오거나, 서양인 화가에게 직접 청해 가져 오거나 하는 등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연행할 때의 서양화 매입행위는 “근래 燕京에 使臣간 사람들이 서양화를 사다가 마루 위에 걸어 놓고 있다”고 말한 李瀷(1681∼1763)의 글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하나의 풍조였던 것으로 생각된다.655)李 瀷,≪星湖僿說≫권 4, 萬物門 畵像坳突 참조. 서양화의 구매는 우리 사절단의 연경숙소인 會同館에서의 開市 또는 後市와 이 곳을 드나들며 물품구입을 대행하면서 이익을 취하던 序班을 통해 행해졌다.
그리고 숙종 46년 서양화를 매입한 바 있는 이의현이 12년 뒤인 영조 8년(1732)에 다시 謝恩正史로 연행하여 천주당을 방문하고 費氏 성을 쓰는 堂主로부터 크고 작은 서양그림 15점을 기증받은 것을 비롯해, 영조 41년의 동지사행 자제군관 洪大容이 西洋畵扇 1자루와 西洋異獸畵 등 3점을, 정조 8년(1784)의 수행원 李承薰이 聖畵를 선물로 받아 왔다.656)李宜顯,≪陶谷集≫권 30, 壬子燕行雜識.
洪大容,≪湛軒書≫외집 권 7, 燕記.
柳洪烈,<韓國基督敎史>(≪韓國文化史大系≫Ⅵ,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1970), 476∼478쪽. 이러한 풍조도 관례화되었던 모양으로 홍대용의 다음과 같은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康熙년간(1663∼1722) 이후로 우리 나라 사신이 연경에 가서 천주당을 관람하고자 청하면 서양인들이 기꺼이 맞아들여 그 안에 있는 특이하게 그려진 神像 및 기이한 기물들을 보여주고 서양에서 만들어진 珍異한 물품들을 선물로 주었다…그러므로 사신간 사람들은 그 선물을 바라고 또 신기한 구경을 좋아하여 해마다 찾아가는 것을 常例로 삼고 있다(洪大容,≪潭軒書≫외집 권 7, 燕記 劉鮑問答).
이 밖의 서양인 화가에게 직접 청해 받아 온 경우도 종종 있었는데, 주로 사행원의 초상화였다. 영조 47년의 연행정사 金尙喆은 연경에 머무를 때 ‘西洋國畵人’을 만나 초상을 그려 받은 적이 있다. 이 양화풍 초상화는 정조 5년 왕에게 알려질 정도로 소문이 크게 났던 모양으로, 이 때 御容제작에 참고로 삼기 위해 왕이 친히 관람하기도 했다.657)≪承政院日記≫1492책, 정조 5년 8월 28일. 그리고 종실 洛昌君이 사신으로 가서 이름있는 서양인 화가를 만나 자신의 초상을 제작케 했으며, 또 순조 32년(1832) 동지사행의 정사와 부사도 러시아공관을 방문하고 그 곳의 벽 위에 걸려 있는 황제와 황후상을 비롯한 여러 서양화를 구경한 다음 이 그림들을 모두 그렸다고 하는 러시아인 赫老爺가 초상에 뛰어났다는 얘기를 듣고 그에게 청하여 초상화를 그려 받은 적이 있다.658)李德懋,≪靑莊館全書≫권 51, 耳目口心書
金景善,≪燕轅直指≫권 3, 留館節.
이와 같이 연경을 왕래하던 사행원들에 의해 적지 않은 양의 서양화적이 우리 나라로 직접 반입되었으며, 이러한 사실은 이익이 “근래 燕京에 사신 간 사람들이 西國畵를 많이 휴대해서 돌아온다”고 쓴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659)李 瀷,≪星湖先生全集≫권 56, 跋虛舟畵. 아마도 서화가이며 수장가였던 김광국이 소장한 화첩에 들어 있던 베네치아 판화를 비롯해 문인서화가 강세황이 洪秀輔에게 빌렸다가 돌려준 2점의 서양화 등은 바로 이러한 경로를 통해 유입된 화적 중의 하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660)李東洲,≪韓國繪畵小史≫(瑞文堂, 1972), 169쪽.
姜世晃,≪豹菴遺稿≫권 2, 戱次贈洪台君擇秀輔.
서양화법의 전래는 이런 화적 이외에 漢譯서학서에 수록된 내용이나 삽도를 통해서도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安鼎福(1712∼1791)에 의하면 서학서는 이미 선조 말년부터 전해지기 시작하여 이름난 벼슬아치와 선비로서 이를 읽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확산되었다고 한다.661)安鼎福,≪順庵集≫권 17, 天學考. 1780년대에는 과학기술을 탐구하는 것이 일대 유행으로 그 중에서도 서양화의 공간 및 원근법에 대한 이론이 수록된 마테오 리치(利瑪竇)의≪幾何原本≫을 비롯해, 사바티노 우르시스(熊三拔)가 도형을 곁들여 서술한≪泰西水法≫이 유입되어 열람되었는가 하면, 서학서를 통해 터득한 카메라 옵스큐라원리를 이용하여 암실방인 漆室에 볼록렌즈를 장치해 놓고 비쳐진 대상의 그림자를 통해 화상을 초하기도 했다.662)서양식 수차 등은 이 밖의≪奇器圖說≫(1627)과≪諸器圖說≫(1627)과 같은 문헌을 통해서도 전해졌다.
文重亮,<18세기 朝鮮 水利學의 등장과 그 推移>(≪韓國思想史學≫9, 1997), 161∼162쪽.
丁若鏞,≪與猶堂全書≫1-10권, 詩文集, 說 漆室觀畵說. 그리고 丁若銓(1758∼1866)의 경우 서양의 박물학 또는 생물도보류를 연상시키는≪海族圖說≫을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663)徐鐘泰,<星湖學派의 陽明學과 西洋科學技術>(≪韓國思想史學≫9, 1997. 12), 231쪽. 이 책은 현재 전하고 있지 않지만, 바다에 사는 어류와 조개·해초류·바다새 등의 생물을 도형으로 그리고 간략한 해설을 곁들인 것으로 알려져 있어 과학사생에 의해「博物畵」식으로 묘사되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 밖의 측량법 및 기하학과 광학관계 서적의 전래는 원근법과 음영법의 전개에도 얼마간의 기여를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 후기 서양화법의 도입과 이에 대한 인식 제고에는 연행사행원들의 목격담이나 견문기를 통한 국내 유포도 중요한 구실을 했었다. 특히 연경에서 서양화를 직접 보고 이에 대한 느낌이나 반응을 적어 놓은 관람기들은 이 시기의 西洋畵觀을 파악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어 준다. 우리 사행원들이 중국을 왕래하면서 서양화를 직접 접했던 가장 대표적인 장소는 연경의천주당이었다. 당시 연경에는 천주당 4개소가 있었는데, 우리 사행원들은 그 중 먼저 건립되었던 남천주당과 동천주당을 주로 방문했으며, 강희년간 이후 상례화되었던 것 같다. 천주당 구경은 당시 사행원들 사이에서 매우 인기가 높아 연행중 볼 만한 관람처 19개소의 하나로 손꼽혔고, 홍대용의 경우 연경 체류 2개월 동안 4차례나 방문했을 정도였다.664)朴趾源,≪燕巖集≫별집 권 12, 熱河日記 7월 15일.
洪大容,≪湛軒書≫ 외집 권 7, 燕記.
연경에서의 서양화 접촉은 천주당 이외에 러시아공관을 통해서도 이루어졌다. 이 곳의 방문은 순조 원년(1801)의 辛酉邪獄으로 천주당 방문이 금지된 이후부터로 보인다. 러시아공관의 규모는 천주당보다는 작았지만, 이 곳에도 성화와 초상화·풍경화 등의 서양화들이 “특이한 나무로 만들어진 통 속에 유리로 덮힌 채 벽마다 걸려 있어” 사행원들의 관심거리가 되었다.665)저자미상,≪赴燕日記≫, 6월 25일.
―――, ≪薊山紀程≫권 3, 1월 26일.
매년 2차례 이상, 매회 300여 명씩 파송되었던 수많은 연행원들이 천주당이나 러시아공관을 관람하고 느낀 서양화에 대한 소견은 이들이 귀국해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반드시 요구해 옴에 따라 들려주었던 목격담과 연행록의 견문기를 통해 널리 보급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밖에 청대 鄒一桂의≪小山畵譜≫에 수록된<西洋畵>조를 비롯하여 王士禎의≪池北偶談≫·≪魏叔子集跋≫과 劉侗의≪帝京景物略≫, 吳歷의≪墨井畵跋≫과 같은 중국문헌 속의 서양화 관련기록들도 이 분야에 대한 관심 제고와 인식 증진에 기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영조 24년(1748) 통신사 종사관으로 일본에 간 曺命采(1700∼?)가 그 곳의 이국적 정경에 대해 “마치 서양국의 한 폭 그림 같다”고 표현했던 것으로 미루어 보면, 당시 서양화의 존재가 문사들 사이에서 생각보다 널리 회자되었음을 알 수 있다.666)曺命采,≪奉使日本時見聞錄≫, 무진년 2월 24일.
이러한 여러 경로를 통해 서양화를 접했던 당시의 인식은 그림의 내용에 대해서는 부정적 반응을 보인 반면, 화법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관심을 나타내는 이중성을 보였다.667)洪善杓, 앞의 글(1988), 160∼163쪽. 특히 기독교 성화에 대해서는 도상들의 형태나 내용에 대해 혐오감과 함께 심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실물과 똑같이 보이도록 그려진 화법에 대해서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박지원이 “보통의 언어와 문자로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던 것도 이들 그림의 핍진감 넘치는 사실적 묘사 때문이었다. 그리고 홍대용은 “도저히 그림으로 믿기 어렵다”고 했으며, 이덕무는 개그림을 보고 “실물과 그림이 구분이 되지 않았다”고 했다.
이와 같이 “실제 인물처럼 살아 움직이는 듯하고”, “완전히 실물을 보는 것 같은” 서양화의 사실력에 대한 경이감은 이를 가능케 한 화법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홍대용은 “奧行에 대한 조예가 깊어 냇물과 골짜기의 나타나고 들어간 것이라든지 안개와 구름의 빛나고 흐린 것, 먼 하늘의 空界까지도 모두 正色을 사용했다”고 하면서, 이러한 서양화의 묘리는 “裁割比例法인 算術에서 나온 것”으로 들었다고 말했다.668)洪大容,≪潭軒書≫외집 권 7, 燕記. 그리고 이익은 “이것은 畵工의 묘법인데, 원근과 장단의 치수가 분명한 까닭에 한쪽 눈에만 시력을 집중해 봐야 이와 같이 現化되어 드러난다”고 하면서, 알베리티의 회화론에 의거한 마테오 리치의 글을 인용하여 서양화의 화술은 ‘눈으로 파악’하는데 있으며 원근과 坳突과 명암을 나타내야 한다고 했다.669)李 瀷,≪星湖僿說≫권 4, 萬物門 畵像坳突. 이러한 서양화법은 ‘難狀之狀’이라고 하던 것도 묘사할 수 있는 우수한 기법으로 인식되었는가 하면, 정약용은 일점 투시도법을 나타내기 위해 고안된 카메라 옵스큐라를 이용한 방법에 대해「寫眞」하는데 이 이상 좋은 것이 없다고까지 강조한 바 있다.670)徐有榘,≪林園經濟志≫권 94, 遊藝志 4, 畵筌 論泰西畵.
丁若鏞,≪與猶堂全書≫1-10권, 詩文集, 說 漆室觀畵說. 그리고 순조 11년 마지막 통신사행의 서기로 도일한 金善新이 일본인과의 대담에서 “歐羅巴畵法과 같은 것에는 중국인도 못 미친다”고 한 말도 대상물의 시각적 영상을 그대로 재현하는 서양화법의 정교한 사실력과 그 탁월함을 이야기한 것으로 생각된다.671)名著普及會,<朝鮮人畵譚>(≪日本畵論大系≫5, 1972).
명 말기에 천주교의 전도와 함께 동아시아에 1차 파급된 서양화는 주세퍼 카스틸리오네(郎世寧) 등의 활약으로 청대의 궁정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고, 일본의 桃山시대와 江戶시대의 洋風畵인 蘭畵를 형성시키면서 유채화와 동판화까지 제작하는 발전을 보였다.672)Michael Sulivan, The Meeting of Eastern and Western Art, Thames and Hudson, 1973. 참조. 그러나 조선의 경우는 중국을 통해 간접 유입된 음영법과 원근법과 같은 시각적 이미지 재현을 위한 서양화의 기본화법을 부분적으로 도입하여 주로 실물감과 실제성의 증진 등과 결부된 기술적·실용적·장식적 측면에서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화목에 있어서는 徐有榘의<畵筌>에 서양화가「인물」과「界畵」조에 소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 분야에서 좀더 활발하게 채용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인물화에서는 안면과 신체의 입체감을 통해 생동하는 실물감을 나타내기 위해 음영법이 주로 사용되었다. 화원이었던 金德成(1729∼1797)의<風神雨神圖>(<그림 3>)는 “필법과 彩法이 모두 泰西의 妙意를 얻었다”는 강세황의 평이 적혀 있듯이 얼굴과 옷주름에 渲染에 의한 음영법이 두드러지게 구사되어 있어 마치 浮彫를 보는 것 같은 양감을 자아내고, 특히 붉은 색과 푸른 색의 호로병은 완연한 서양화식 채색법으로 다루어졌다.673)邊英燮, 앞의 책, 108쪽. 이와 같이 도석인물화에서 서양화법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것은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신기한 기법을 통해 초월적 능력의 現化感을 높이고자 한 효용성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김홍도 작품으로 전칭되고 있는 龍珠寺<三世如來圖>의 유채화풍 불화도 이러한 측면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申光絢(1813∼?)이 그린 것으로 생각되는<招狗圖>는 이러한 음영법에 의해 강한 입체감을 내고 있을 뿐 아니라, 인물과 개의 그림자까지 표현한 보다 진전된 양태를 보여준다.674)洪善杓,≪人物畵≫:한국의 미 20(중앙일보사, 1985), 도판 80<招狗圖>해설 참조. 이와 같은 그림자 표현은 작가미상의<猛犬圖>에도 보이는데, 두 그림 모두 국적에 문제가 있지만,675)<猛犬圖>의 국적문제에 대해서는, 李慶成,<國立中央博物館所藏 猛犬圖에 대한 疑問點>(≪考古美術≫129·130, 1976), 185∼189쪽. 현재 전하는 것으로는 이들 작품뿐으로 빛의 효과에 의한 시각현상을 그대로 옮겨 놓은 의의를 지닌다.
그리고 초상화에서의 음영법 채용은 조선 후기 이 분야의 시대적 특징을 이룰 만큼 성행했었다.676)趙善美,≪韓國의 肖像畵≫(열화당, 1983), 411∼420쪽. 暈染法으로도 지칭되는 서양화식 명암표현법은 얼굴의 기복에 따라 세밀한 붓질을 많게 또는 적게 가하여 들어가고 나온 입체감을 정묘하게 나타내고, 옷주름의 굴곡을 자세하게 묘사한 뒤 접힌 부분에 음영을 넣는 등의 시각적 영상 재현에 의해 실물감을 높여 주었으며, 정조년간에 특히 발달된 양상을 보였다.
산수화에서는 강세황이 영조 33년(1757) 무렵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松都紀行帖≫과 같은 진경산수에서 실물경의 현장감과 인상을 생생하게 표현하기 위해 반부감적 단일시점에 의한 近大遠小式 원근법과 담채풍 음영법을 구사하고 또 부분적으로 선원근법을 활용하여 공간의 거리감과 경물의 입체감을 증진시키는 등의 새로운 경향을 보여주었다.677)≪松都紀行帖≫에 대해서는 邊英燮, 앞의 책, 96∼104쪽. 姜熙彦도 강세황의 이러한 신풍을 계승하여 청신한 감각의 진경산수화를 그렸으며,<結城泛舟圖>와 정조 5년(1781)작의<出獵圖>에선 공기원근법을 사용해 공간감을 확장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화풍은 김홍도 작품으로 전칭되고 있는<懸鐘巖圖>(<그림 4>)를 비롯한≪金剛四郡帖≫에 보다 정교한 상태로 이어졌다.
서양화법은 이 밖에 冊架圖와 같은 기물그림의 분야에서 크게 활용되기도 했다. 李奎象(1727∼1799)은 말년에 김홍도에 대해 언급하면서, 요즘 화원들 그림은 새롭게 서양국의「四面尺量畵法」을 본받아 채색 책가화를 그리는데 貴人들 집의 벽은 이러한 그림으로 뒤덮혀 있으며, 그가 매우 잘 그렸다고 했다.678)李奎象,≪一夢稿≫, 畵廚錄 참조. 이러한 그림은 호암미술관 소장의<冊架文房圖>(<그림 5>)에서 볼 수 있듯이, 博古架에 진열된 문구와 기명 등의 淸供珍玩物들을 입체감 넘치게 묘사한 청대의 궁정취향과 양식을 반영한 것으로, 조선 후기의 서화고동 애호풍조가 호사취미로 확산되면서 상층 고급수요의 장식물로 성행했던 것 같다. 이와 같이 서양화법은 대상물의 실물감과 실제감을 좀더 생생하게 나타내기 위해 시각적 영상을 그대로 재현하는 기법으로 도입되어 부분적으로응용되었을 뿐 아니라, 호사적 장식취미를 충족시키는 진기한 구경거리로도 전개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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