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중기경부터 전개되었던 기존의 실용적인 실경도가 17세기의 조선 중기를 통해, 명 중기 이래 반의고주의에 의한 진경주의와 명산대천 유람 붐에 따른 紀遊圖 즉 기행사경도의 파급으로 勝景樂道의 要覽과 臥遊를 위한 감상물로 인식되면서 진경산수화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전환에는 예배와 명소안내 등을 위해 중국에 보내는 공물과 선물로서 화원화가들에 의해 국가적 繪事로 제작되던 금강산그림을 민간차원에서 臥遊物로 그리기 시작한 金禔(1524∼1593)와 李慶胤(1545∼1609)과 같은 대표적인 문인화가들이 선구적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679)洪善杓,<金剛山圖의 실상과 흐름>(≪月刊美術≫89-4, 1989), 57∼64쪽. 그리고 명산탐승중에 절경을 보면 문득 말에서 내려앉아 “率意畵出眼前光景” 즉 “눈앞의 광경을 뜻(창생적 흥취)에 따라 그려내고” 天機論에 입각한 자득적 창작으로 평가받은 趙涑(1595∼1668)과 금강산 만이천봉을 최고의 傳神法으로 묘사한 金明國(1600년경∼1662년 이후)이 진경산수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680)洪錫輔,≪睡隱集≫권 2, 題滄江手畵帖後.
李衡祥,≪甁窩集≫권 1, 詩 偶得孝廟朝內粧金剛山簇子是槪金明國所畵也 尹進士斗緖作古風一篇請見信筆和送 참조.
이 시기의 진경산수화로는 韓時覺(1621∼?)의 현종 5년(1664)작인≪北關實景帖≫과 曺世傑(1636∼1702)의≪谷雲九曲帖≫을 비롯하여 李禎 작품으로 전칭되는≪關西名區帖≫과 작가미상의 몇 작품이 전하고 있다. 이들 그림은 명대 중기 이래 문인들의 명산탐승 붐에 따라 유행한 기행사경도의 조류와 武夷九曲圖의 풍류를 효방하기 위해 金壽恒과 金壽增 등이 주문해 그린 것으로, 기존의 지형도나 기록화의 수법과 산수유람 풍조를 배경으로 명 말기에 출간되었던 명산판화집의 경향을 반영한 특징을 보여준다.681)명말 산수판화집의 간행에 대해서는 高蓮姬,<安徽派의 黃山圖 硏究>(弘益大 碩士學位論文, 1996), 19∼21쪽. 南九萬(1629∼1711)의 題記가 적혀 있는 작가미상의<咸興十景圖>중<一遇巖圖>를 보면 主景을 효과적으로 설명하고 전달하기 위해 화면의 중앙에 포치하고 그 주위로 副景들을 배설하는 기록화의 구성법을 사용했으며, 준법이나 경물의 표현에는 부분적으로 명대 말의≪海內奇觀≫과≪名山圖≫와 같은 산수판화집의 양식을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682)洪善杓,<南九萬題 咸興十景圖>(≪미술사연구≫2, 1988), 140쪽.
명말의 산수판화는≪中國古代版畵總刊二編≫8(上海古籍出版社, 1994) 참조. 한시각의≪북관실경첩≫가운데<七寶山全圖>의 경우도 지형도의 구성법과 함께 주경을 중심으로 상하좌우에 산악을 둥글게 배치하는 구도는≪海內奇觀≫의<西胡一覽圖>와 상통되고, 또 등줄기의 굴곡이 강조된 산형이라든가 단선점준을 연상시키는 짧은 선의 준법과 여기저기 遠木의 모습으로 배설된 나무의 양태 등도 유사하다.683)<七寶山全圖>의 도판은 李泰浩,<韓時覺의 北塞宣恩圖와 北關實景圖>(≪정신문화연구≫34, 1988) 참조.
이와 같이 17세기를 통해 기존 실경도의 전통과 명말 명산판화집의 양식을 혼합하며 와유물로 전환되기 시작한 진경산수화는 숙종조 후반의 18세기 초에 이르러 鄭敾(1676∼1759)의 대활약으로 확고한 새 경향을 수립하게 된다. 정선의 이러한 진경산수화 확립은 북악산 아래 북리 일대에서 反模擬主義에 의한 眞文·眞詩운동을 선도했던 김창협·창흡 형제의 문하생들과「同里人」즉 같은 동네사람으로 교유하면서 이루어졌다. 앞장에서 거론했듯이 그는 이들과 함께 모의적 창작태도를 배격하고 동기창 등에 의해 명말의 신정통문인화 이념으로 강조되었던 천기론에 입각하여 창생적 창작관을 회복하고 직접 실천하기 위한 자득적 창작태도에 따라 실물 경관인「眞景」을 매개로 최상의 우주적 조화가 유동하는 참되고 이상적 경관인「眞境」을 구현하면서 새로운 경향의 진경산수화를 대성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그는 앞서 언급했듯이 문인화가로서의 자의식에 기초하여 신정통필묵법으로 부각된 남종화법을「眞境」구현을 위해 고전경인 정형산수와 실물경인 진경산수에≪고씨화보≫와≪개자원화전≫ 등을 통해 적극 응용하여 기존의 화풍을 쇄신하면서 자신의 독특한 조형세계를 구축하였다.
정선은 명승명소와 別墅幽居·野外雅集·성읍관아 등, 모든 계열의 진경산수화를 다루었으며, 한양과 그 근교를 비롯하여 금강산과 영동의 동해안 일대, 영남지방과 단양과 송도지역의 빼어난 특정 경관들을 주로 그렸다. 그는 이러한 실물경관을 대상물의 특질이나 그림의 용도 등에 따라, 내려다보는 俯瞰視와 올려다보는 仰視를 혼용한 다각시점과 부감시의 단일시점을 통하여 표현했었다.
<朴淵瀑布圖>(<그림 6>)는 다각시점에 의해 그려진 것으로, 쏟아져 내리는 낙폭의 신묘한 장관을 감득한 상태로 전하기 위해 유람객은 부감시로 작게 묘사하여 폭포의 높이를 강조했으며, 폭포는 화면 속의 탐승객이 올려 보는 시각으로 나타냈다. 그리고 폭포 상단에는 밑에서의 앙시점으로 볼 수 없는 둥근 바위를 그려 넣어 그 너머에 또 다른 공간이 있음을 암시하였다. 이러한 구성은 감상자로 하여금 작품 속의 인물 위치에 있는 듯한 착각을 통해 승경낙도의 감흥을 보다 잘 체득케 하는 효과를 주기도 한다.
정선은 이와 같은 다각시점을 천하의 영산으로 숭배되던 금강산을 소재로 한 진경산수화에서도 크게 활용했었다. 특히 영조 10년(1734)에 그린<金剛全圖>(<그림 7>)를 비롯한 금강내산의 總圖 또는 전경도 계통에서는 仰視와 平視 등, 여러 시점의 경물들을 부감시의 이미지로 재구성하여 와유적 요람의효과를 높이면서 이 분야의 전형으로 확립시켰다. 그리고 亂柴皴 등으로 지칭되던 수직 角筆의 骨氣로 나타낸 뾰족한 암산을, 횡점의 米法으로 묘사한 부드러운 토산과 대비시켜 우주적 음양조화의 이치를 토대로 조형화시키기도 했다.
한편 부감시의 단일시점은<樂健亭圖>(<그림 8>)를 비롯해, 주로 한강변의 京郊명승들을 그릴 때 많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선과 친교했던 이병연의 이종 사촌동생이며 서화 대수장가인 김광수의 부친이었던 이조판서 金東弼의 별서를 그린<낙건정도>는 陽川의 開花山에서 내려다본 일관된 부감시로 경관을 근대원소의 단축원근법과 후경으로 갈수록 실루엣풍으로 점차 엷고 간략하게 묘사하여 자연스런 공간감과 오행감을 보여준다. 그리고 청록 또는 담채의 은은한 선염으로 처리하여, 금강산 各景圖 등에서 빠르고 장쾌한 필묵으로 격앙된 감흥을 나타내던 것과는 다른 운치 넘치는 고아한 경색도 창출하였다.
정선은 대체로 이러한 구성법과 또 특유의 필묵담채법을 통해 자연의 오묘한 조화와 이치를 실제로 구유하고 있는 빼어난 실물경관에서 촉발된 흥취와 정취를 脫俗遠塵의 東國理想景 또는 仙境으로 전형화시켰던 것이다. 특히 角筆과 扁筆의 빠른 붓질과 크고 작은 습윤한 횡점과 함께 짙고 힘찬 刷擦의 묵법과 유현하고 청아한 느낌을 주는 담채법을 통해 새로운 진경화법을 완성하게 된다. 그 중에서도<박연폭포도>나<仁王霽色圖>등에서 볼 수 있듯이, 화강암질 암벽의 괴량감을 표현하고 역동적이면서 대담한 화면을 형성시킨 斧劈皴 모양의 墨擦은 앞 시기 절파화풍과의 연관성을 상정케 되고, 또 금강산도 등에서 가장 뛰어난 傳神法을 보여주었던 김명국을 통해 계승되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양태의 묵찰은 명말청초의 안휘파 화가 蕭雲從이 지역내 太平府의 명승고적을<太平山水全圖>를 비롯해 各景들로 나누어 그린 것을 인조 26년(1648) 판화집으로 출간했던≪太平山水圖畵≫에서도 많이 보이고 있어 보다 세밀한 고찰이 요망된다.684)≪中國古代版畵總刊二編≫8 所收本 참조.
鄭敾의 진경산수화풍과 명대 산수판화집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현재 高蓮姬에 의해 연구가 진행중에 있다.
이와 같이 정선에 의해 새롭게 창신된 진경화법은 명산대천을 탐승·주유하는 산수유람 풍조가 명 중기 이후의 유행과 더불어 17세기 이래 경화사족들을 중심으로 山林隱居를 능가하는 탈속풍류의 雅事로 확산되면서 성행되었던 遊山記와 명산기 등과 결부되어 기행사경도의 수요가 급증하는 등, 진경산수화의 발흥에 따라 크게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영석은 정선의≪海岳帖≫과≪嶺南帖≫·≪四郡帖≫ 등이 ‘東國의 山海經’ 즉, 명대의 화보나 명산판화집과 같은 조선의 산수경전으로 세간에 있어야 하는 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刻法(목판화술)이 둔하고 거칠어서 만들지 못해 그의 진경화법을 널리 펴고 빨리 전할 수 없음을 한탄한 바 있다.685)成均館大 博物館 編,≪槿墨≫하(靑文社, 1981), 823쪽의 趙榮祏 手稿 참조. 그러나 진경산수와 정형산수가 함께 수록된 남색 표지로 이루어진 목각본의≪謙齋畵譜≫가 한때 전했던 것으로 보아,686)李東洲,≪韓國繪畵史論≫(열화당, 1987), 120쪽. 조영석이 윗글에서 언술한 해가 영조 21년(1745)이므로 아마도 그 이후에 발간되어 널리 활용되었던 것 같다.
정선의 이러한 진경화법은 그의 아들과 손자인 鄭榥을 비롯하여, 崔北·金有聲·李聖麟·金應煥·金喜謙·張始興·鄭忠燁·金碩臣 등, 18세기 중엽 전후의 화원화가와 여항화가들 사이에서 많이 애호되었던 것으로 보인다.687)李泰浩,<朝鮮後期 眞景山水畵의 發達과 退潮>(≪眞景山水畵≫, 국립광주박물관, 1987) 참조. 그리고 통신사 수행화원 등을 통해 池大雅와 浦上玉堂을 비롯한 일본 에도시대 남화가들의 화풍에 부분적으로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688)洪善杓,<17·18世紀 韓日間 繪畵交涉>(≪考古美術≫137·138, 19792) 참조. 그러나 이 시기의 심사정과 강세황·許佖·金允謙·이인상·李胤永 등의 문인화가들은 정선의 진경화법보다는 吳派나 安徽派의 진경화풍이나 새로운 감각의 참신한 신흥양식을 더 선호했던 것 같다. 특히 강세황은 정선의 진경화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공격한 바 있다.
그가 평소의 익숙한 필법으로 마음대로 휘둘러서 돌모양이나 산봉우리의 형태에 상관없이 한결같이 裂麻皴法에 의해 함부로 그렸기 때문에 참모습을 나타냈다고 말할 수 없다(姜世晃,≪豹菴遺稿≫권 4, 遊金剛山記).
즉 실물경관을 통해 자득한 필법이라도 그 본연의 창작태도에서 벗어나 상투화된다면 대상물의 참된 경관과 부합되지도 않고 顯現시킬 수도 없음을 비판한 것이다.
강세황은 대상의 형태를 닮게 나타내면 나타낼수록 그 사물의「眞境」이 더욱 잘 드러나게 된다고 보고, 초상화에서처럼 실물과 머리털 하나의 오차도 없이 꼭 닮도록 정확하게 그릴 것을 강조했었다.689)姜世晃,≪豹菴遺稿≫권 4, 送金察訪弘道金察訪應煥序 참조. 그러나 이러한 以形寫神의 형사적 전신론은 지형적 정확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형상을 傳神의 수단으로 닮게 재현해 대상물의 창생적 정신 또는 우주적 자연의 조화이며 이상인「진경」의 구현을 목적으로 하였다. 따라서<山城南譙圖>(<그림 9>)와<靈通洞口圖>등이 수록되어 있는≪송도기행첩≫에서처럼 창생적 창작의 정통화법인 남종문인화의 간일고아한 필묵법과 함께, 실물경관의 시각적 이미지와 비슷하게 나타내는데 유효한 단일시점에 의한 삼차원적 공간의 구축과 담채풍 선염에 의한 바위의 입체감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서양화법을 부분적으로 채용하여 청아하면서 합리적인 진경화풍을 창출했던 것이다.
강세황의 이러한 화풍은 강희언과 鄭遂榮과 김홍도 등을 통해 정조년간으로 계승되어 보다 사실적인 양태로 발전하게 된다.690)洪善杓,<조선후기의 진경산수화와 사실주의>(≪월간 아트포스트≫15, 1989) 참조. 특히 김홍도는 정조 12년(1788) 정조의 명으로 김응환과 함께 영동지방과 금강산 일대를 기행사경하고 짙은 채색과 정교한 工筆로 서양화법을 활용하여 사실적인 원체풍의 진경화풍을 확립하였다.691)洪善杓, 앞의 글(1989a), 62∼63쪽. 그리고 남종문인화를 개성화시킨 특유의 檀園法을 이룩하고는 이를 토대로 서정적인 담채풍의 진경산수화를 새로이 개척하기도 했다. 그의 이와 같은 진경산수화풍은 19세기 이래「阮堂바람」과 여항문인들의 창작성향에 의한 寫意的 傳神論 또는 주관적 사의론의 확산 속에서도, 왕실과 사대부를 비롯한 고급수요의 일정한 지속으로 嚴致郁과 趙廷奎·金夏鐘·劉淑 등의 화원화가들을 통해 조선 말기의 하나의 유형을 이루며 전개되었다. 이 밖의 금강산과 관동팔경의 경우는 수요의 확산으로 민화류로도 많이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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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