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병자 양란 이후 국가재조사업의 성공과 국제무역의 흑자 등은 상품화폐의 발달과 도시의 팽창을 초래하면서 사치풍조를 만연케 했었다. 이러한 사치풍조는 경제적 성장이 둔화된 영·정년간을 통해서도 계속 이어지면서 각종 사회문제를 일으켰지만, 미술과 공연예술 등에서는 수요를 더욱 증가시키고 크게 활성화시켰다. 특히 기술직 중인과 하급관리들인 경아전서리배와 시전상인들의 축재를 토대로 확대된 사치소비 성향은 祈福豪奢 풍조를 조장하면서 안택을 기원하고 집안을 치장하거나 歲時와 儀禮時 송축과 제액 또는 장엄화하기 위해 제작되던 민화류를 크게 범람케 한다. 그리고 명말 청대를 통해 이러한 그림들이 전국적으로 수요가 확산되면서 판화 등으로 대량 생산되고 소비되었던 조류도 이 시기의 민화류 범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민화들은 옛것이 습속으로 전하고, 위에서 행하는 일을 민간에서 본뜨는 ‘故事遺俗’과 ‘上行下效’의 전통 속에서 형성된 辟邪畵와 吉祥畵가 근간을 이루었다. 이들 그림은 정월 초에 사용하는 기복적인 歲畵로 성립되어, 전자는 잡귀를 쫓고 액을 막는「門畵」와「窓畵」로, 후자는 송축과 진경을 위한 크고 작은「屛畵」로 주로 전개되었다. 문화와 창화 등의 벽사화는 중국 남방의 농경적인 巫문화인 儺禮의 발전과정에서 수립되었던 門排에서 유래된 것으로, 특히 당의 궁정나례가 우리 나라에 전래되어 신라의 疫神放枚鬼였던 처용이 문에 그려지기 시작했다.705)田耕旭,<탈놀이의 形成에 끼친 儺禮의 影響>(≪民族文化硏究≫28, 1995), 199∼223쪽. 成俔(1439∼1504)의≪慵齋叢話≫(권 2)에 의하면 처용은 조선 초기에도 그려졌는데, 신년 초하루 이른 새벽에 門戶와 窓扉에 처용과 함께 중국 門神들인 鐘馗와 幞頭官人, 介冑將軍·擎珍寶婦人 및 닭과 호랑이 그림을 붙인다고 했다.
조선 후기에 이르르면 처용의 이름은 문화에서 사라지고 대궐문 양쪽에 金甲二將軍像을, 중합문에 絳袍烏帽像을, 문호와 문설주에는 종규가 귀신 잡는 그림과 鬼頭圖(처용상일 가능성도 있음)를 붙이는데, 여러 궁가와 왕의 내외척 집의 문에도 역시 모두 붙일 뿐 아니라 시정의 여항에서도 많이 본뜬다고 하였다.706)柳得恭,≪京都雜志≫권 2, 歲時 元日.
洪錫謨,≪東國歲時記≫, 正月 元日.
≪東國歲時記≫보다 30년 정도 앞선 순조 19년(1819)에 나온 金邁淳의≪洌陽歲時記≫에는 도화서에서 진상한 歲畵인 金甲神將을 정월 초에 궁전문에 붙인다고 했으며, 순조 25년에 서술된 趙秀三의<歲時記>에서는 元朝에 문에 神影을 붙이는데 외측에다 秦叔寶와 尉遲恭 金甲 두 장군을, 내측에다 큰 붉은 도포에 검은 사모를 쓴 魏徵과 褚遂良 두 재상을 붙인다고 했다(趙秀三,≪秋齋集≫권 8). 헌종 9년(1843)경 서술된 柳晩恭(1793∼1869)의<歲時風譜>에 의하면 4문에 尉遲敬德의 위엄스런 상을 도화서에서 제작한 영롱한「院畵」로 붙인다고 했다. 나례의 문신신앙과 결부된 이러한 문화는 궁정과 왕실·관아 등의 지배층 영역에서 서울의 도시화와 중간층들의 축재로 이들 가옥의 규모가 커지고 대문 등이 중요시되면서 시정의 민간으로 확산되었던 것 같다. 영조 25년(1749)에 이미 사람마다 사치를 좋아하여 문배를 그려 붙인다면서 비판의 소리가 나온 바 있으며, 李德懋는 영조 42년 집집마다 정초가 되면 쌍문에 尉遲를 그려 붙이는데 조금도 환한 神彩가 없음을 개탄했었다.707)≪備邊司謄錄≫120책, 영조 25년 9월 20일.
李德懋,≪靑莊館全書≫ 권 8, 耳目口心書 1 참조. 헌종 10년경 漢山居士가 지은<漢陽歌>에도 광통교 아래 팔기 위해 걸어 놓은 각색 그림 중에 “문에 붙일 神將들과 帽帶한 門裨들을 眞彩 먹여 그렸으니 화려하기 측량할 수 없다”고 하여 문화가 상품화되어 소비되고 있음을 전하고 있다. 그리고 1930년대에 서울에서 채집된 집을 짓거나 이사한 뒤에 무당이 와서 부르는 成造歌인<황제푸리> 가운데 “중문에 세 선비요 대문에는 乙支敬德·陳叔寶가 분명하다”는 대목이 들어갈 정도로 격식을 차린 가택에서는 보편화되었고, 또 민요인<婚姻謠> 중 “동래땅의 원의 아들, 밀양땅에 장가드니, 겉대문에 용 그리고, 안대문에 범 그리고”란 구절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지방의 저택으로도 도상의 변모와 함께 문화가 파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문호창비에 붙이는 그림 외에≪동국세시기≫에 의하면 신년 초 제액을 위해 가택 벽사화로 “여염집 벽에 닭과 호랑이 그림을 붙인다”고 했으며, 또 三災 드는 해 첫날에 三鷹圖를 그려 문의 들보에 붙인다고 했다.<세시풍보>에서는 문의 들보에 金鷄를 붙이는데, 삼재가 들면 삼응도를 부착한다고 했다. 벽사동물인 개와 사자가 부가되어 한 벌로 그려지는 鷄犬獅虎圖의 경우<한양가>에선 다락벽에,<황제푸리>에선 부엌문 위에 붙였다고 한다. 이러한 그림들은 모필로도 그려졌지만 판화로도 제작되었던 것으로 보아 해마다 소비물로서 폭넓은 수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년의 설날 그림인 세화에는 벽사화와 함께 길상화도 대종을 이루었다. 이러한 길상류 세화로 이미 고려 말에 十長生圖가 그려졌다.708)李 穡,≪牧隱詩藁≫권 12, 歲畵十長生 참조. 조선시대를 통해서는 國喪기간을 제외하고는 새해를 축하하기 위해 왕이 내외척과 近臣들에게 선물하는 頒賜品으로 제도화하여 도화서 화원들의 중요한 직역 중의 하나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십장생도와 함께 중기에 이르러는 모란병풍이라든가<仙人騎鶴圖>·<仙人騎鹿圖>·<仙女携壺圖>·<仙翁負瓮圖>와 같은 신선도가 세화로 대두되었다.709)朴 瀰,≪汾西集≫권 1, 丙子亂後集舊藏屛障記.
鄭弘溟,≪畸庵集≫권 8, 戱題歲畵 참조. 조선 후기에도 이러한 전통이 이어져≪동국세시기≫에 “도화서에서 壽星과 仙女를 그려 왕에게 바치고, 公卿들도 서로 증정하는 것을 歲畵라 하며 그것으로 송축하는 뜻을 나타낸다”고 했다. 세화가 왕의 반사품으로서뿐 아니라 대신들 사이에서도 선물로 주고 받았으며,<세시풍보>에는 ‘鮮明彩’로 신선과 거북과 학을 그린 세화가 새해 초의 ‘頒彩畵’로 따로 널리 행해지고 있다고 전한다.
이와 같은 십장생도는 세화로서뿐 아니라 회갑을 축하하는「壽帖」으로 그려지기도 했고, 또 세화로는 이 밖에도 수복과 부귀영화를 기원하는 각종 길상화들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집을 짓거나 도배를 새로 한 후에 집안의 그림치장으로<황제푸리>에 등장하는 여러 장르의 그림 대부분이 길상적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한양가>에 나오는 광통교에서 파는 百童子圖와 瑤池宴圖·郭汾陽行樂圖 등도 그러하다.≪경도잡지≫에 의하면 이들 각색 그림은 혼례식의 의례병풍으로 쓰이기도 했다고 한다.
조선 후기의 민화류 그림은 이와 같이 특정계층에서 전유하던 것이 전승되어 시정으로 확산되기도 했지만, 명말 청대의 새로운 경향이 유입되어 성행된 것도 있다. 당시 혼례병풍으로 많이 사용했던 앞서 언급한 백동자도와 요지연도와 곽분양행락도도 효종과 관련이 있는 청초의 화가 孟永光 등에 의해 파급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710)柳得恭의≪冷齋集≫권 5, 古今體詩一百五十五首 孟永光百童圖歌에 의하면 효종이 鳳林大君 시절 심양에 있을 때 孟永光이 객관에 와서 이 그림을 헌상한 것을 귀국할 때 가져와 전래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새 경향을 보다 대표하는 것은 冊架文房圖와 文字圖들이 아닌가 싶다. 책가문방도는 앞 장에서도 거론했듯이 博古架에 진열된 문구와 기명 등의 淸供寶珍品들을 서양화법을 채용해 입체감 넘치게 묘사한 청대의 궁정취향과 양식을 반영한 것으로, 18세기 말엽에는 규장각 화원들의 祿取才 畵科 중 하나로「文房」이 공식 설정되었을 정도로 부각되었다. 당시 서화고동 애호풍조와 문인취향을 배경으로 수용된 것으로 생각되는 이러한 그림들은 호사취미로 확산되면서 고급수요에 의한 집안장식물로 성행했으며, 여기에 길상 蔬果物들이 첨가되어 書案에 배열된 독특한<책거리 그림>(<그림 16>)으로 분화되기도 했다. 그리고 청대에 원체화와 민간화로 모두 제작되었던 博古草花圖계열의 그림이 筆筒圖나 甁花圖의 개별 모티브형태로 벽장문이나 다락문에 장식되다가 張承業에 의해 器皿折枝圖로 성립되어 근대 초기로 이어졌다.711)洪善杓,<趙錫晋의 器皿折枝圖>(≪현대미술관뉴스≫44호, 1987). 글자획과 도형이 결합된 문자도의 경우는 청대의「壽福康寧」과 같은 길상적 문자판화도나 에도시대의 유희적 문자도와 달리 유교적 수신과 윤리덕목에 관한<孝悌圖>(<그림 17>)로 성립되어 독자적이면서도 다채롭게 전개되었다.712)유홍준,≪문자도≫:빛깔있는 책들 146(대원사, 1993) 참조. 그리고 청대 민간연화로 그려졌고 지금도 北京과 蘇州 등 관광지에서 민예물로 제작되고 있는 革筆畵도 전래되어 20세기 중엽까
지 장터나 공원 등에서 소비자를 상대로 직접 생산되었으며, 그 유래는 당 무렵 대나무조각이나 소가죽으로 쓴 飛白書에서 시작되어 우리 나라에서도≪경도잡지≫에 의하면 버드나무 가지를 갈라 먹물을 묻혀 사용했다고 한다.713)鄭炳模,<民畵와 民間年畵>(≪講座 美術史≫7, 1995), 126∼127쪽.
松虎圖에 까치가 첨가되어 길상과 벽사성이 결합된<까치호랑이>(<그림 18>)의 도상은 중국의 길상도안집에 수록되어 있고 또 에도시대 후기에 그려지기도 했지만, 가장 다양하고도 독창적으로 많이 제작되었던 것은 19세기의 조선시대였다. 특히 호랑이의 도형은 점차 도안화되면서 고양이의 얼굴 모습을 띠게 되는데, 이러한 변모는 무서운 전염병인 호열자를 옮기는 동물을 쥐로 보고, 이를 막고 몰아내기 위한 의도나 또는 고양이가 同音異字로서 장수를 뜻하기도 했기 때문에 그러한 모습으로 변형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와 같은 조선 후기의 민화류는 궁정을 비롯한 상층에서의 고급수요와 시전상인과 부농을 포함한 중간계층과 이들을 상대하는 기방 등의 유흥가를 비롯한 시정과 향촌의 기복호사를 배경으로 하는 새로운 수요에 의해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제작되었다. 이러한 민화들은 산수화와 소경인물화와 사군자의 저변화현상에 따라 수묵 또는 수묵담채로 그려지기도 하고 소비가 크게 증대된 분야는 판화로 생산되기도 했지만, 벽사적·길상적 목적과 함께 치장과 장엄용으로 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짙고 화려한 농채가 주류를 이루었다. 상류층 쪽에서의 고급수요는 도화서 화원들에 의해 원체풍으로 제작되었다면, 새롭게 확산된 시정 등에서의 수요는 ‘俗師’와 ‘鄕師’들에 의해 주문 제작되거나 집단적으로 대량생산하여 병풍전이나 紙廛을 비롯한 시장을 통해 공급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은 민화류에서의 원체풍, 특히<日月五峯圖>(<그림 19>) 병풍과 같은 궁정양식은 도안화된 청록풍의 장대하고 강렬한 조형성과 함께 기능적·장식적 욕구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독특한 형식미와 장엄미에 의한「尙古體」714)김홍남,<18세기의 궁중회화>(≪18世紀의 韓國美術≫, 국립중앙박물관, 1993), 43∼46쪽.적 특징을 보여준다.
한편 수요층의 저변화에 따라 골계와 재치가 가미되어 도식화되고 정형에서 벗어나 파격적으로 변형된 시정양식은 지배층의 감상물 화풍의 체계와 질서를 해체하고 저항하는 민중의식도, 현대 서구의 모더니즘이 발견한 순수한 원시적 조형의식의 소산도 아니라고 본다. 형태의 반복과 과장, 파격적인 구성 등은 주술적 벽사성과 길상성 및 장엄화 욕구의 과잉과 노골화에 따른 것이고, 또 李圭景(1788∼?)도 지적했듯이 점차 제작자와 소비자 모두 무슨 뜻인지 잘 모른 채 의미와 기능이 탈각된 여항의「俗畵」로 인습적으로 전승되었기 때문이며,715)李圭景,≪五洲衍文長箋散稿≫권 60, 題屛族俗畵辨證說 참조. 이러한 흐름은 1920∼3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洪善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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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