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2. 미술
  • 4) 공예
  • (1) 도자공예
  • 나. 영조·정조시기(18세기 후반)

나. 영조·정조시기(18세기 후반)

 18세기 후반은 영조·정조에 의해 다스려지던 문화의 황금기였다. 실학에 있어서 李瀷으로 대표되는 經世致用學派와 朴趾源으로 대표되는 北學派의 활동에 따른 청의 문물의 유입과 국학의 융성, 문예에 있어서 시조·판소리·서민문학·眞景山水畵와 風俗畵의 유행 등으로 조선 후기 문화의 전성기였다.

 陶瓷에 있어 이 시기는 광주 금사리요에서 광주 분원리로 관영 사기공장을 옮기고 제작활동에 들어간 시기였다. 관영 사기공장인 분원을 교통이 편리한 곳에 고정시켜 10년마다 분원을 옮기는 낭비와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17세기 말부터 주장해오던 司饔院 燔造官의 요청에 따라 한강가에 燔木을 실어 오기에 편리할 뿐만 아니라 백토를 옮기기에도 알맞은 분원리에 가마가 고정·설치된 것이다. 백자에 있어 금사리窯産과 같은 유백색의 백자와 간결한 청화백자의 호·병·제기·문방구 등의 제작이 활발해진다.

 18세기 후반의 편년자료733)尹龍二,<韓國陶磁의 編年資料>(≪韓國陶磁史硏究≫, 文藝出版社, 1993), 524∼525쪽.로는 영조 29년(1753)의 白瓷靑畵李亨稷墓誌, 영조 30년의 白瓷靑畵金善生墓誌, 영조 31년의≪英祖實錄≫권 82의 “옛날에는 도자기의 그림은 石間朱였는데 요즈음 들으니 靑으로 그린다고 하니 매우 사치스러운 풍조이다. 그런즉 이후에는 龍樽 외에는 일체 엄금한다”는 기록과 영조 32년의 白瓷靑畵全汝鈵墓誌, 영조 36년의 白瓷靑畵誌石, 영조 37년의 白瓷鐵畵安宗茂墓誌, 영조 40년의 白瓷鐵畵權大臨墓誌, 영조 43년의 白瓷靑畵福平君誌盒 및 墓誌 영조 46년의 白瓷靑畵朴正淳墓誌, 영조 48년의 白瓷鐵畵韓山李氏墓誌, 영조 52년 白瓷靑畵山水紋「丙申」銘角甁, 정조 3년(1779) 白瓷靑畵墓誌, 정조 11년의 白瓷靑畵李仁植墓誌, 정조 17년의 白瓷靑畵丁應斗墓誌와≪日省錄≫475책, 정조 18년 11월 16일조 기록에 “기묘한 형태의 그릇제조를 일체 엄금하라”는 엄명이 있다. 그리고 이 시기 전후의 기록으로 李圭景의≪五洲衍文長箋散稿≫권 27, 古今瓷窯辨證說에 “正廟朝에 畵彩燔造를 금한 뒤로는 백자 위에 花卉를 陽刻으로 불룩하게 구워내더니 오래지 않아 다시 靑彩를 사용하게 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금사리요지 출토의 백자편들과 분원리요지 출토의 초기 백자편들은 거의 동일한 유백색 또는 설백색의 백자로 영조 28년 금사리에서 분원리로 요가 옮겨간 후 바로 변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백자 편년자료에 의하면 1750년대, 60년대까지는 유백색의 釉調였으나 1780년대 말부터 1790년대에 들어서서 분원리요 특유의 청백색의 백자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1790년대의 양각백자의 제작과 유색으로 보아 그 추이를 짐작할 수 있다. 요컨대 분원리로 가마를 옮겼다 해도 영조년간(1725∼1776)에 해당되며 영조 26년(1750) 이후로 백자에 있어 큰 변화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정조년간(1777∼1800)부터 백자에 있어 분원 특유의 청백색의 백자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기는 靑畵白瓷의 제작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다양한 문양의 器皿이 생산되었다. 항아리의 경우 어깨부분과 저부에 如意頭紋이나 蓮瓣紋帶 등이 장식되기 시작하며 무늬의 주제도 산수문·매조문·인물문·동식물문 등에 이르는 다양한 회화적인 필치로 각병·각호·각접시 등의 기명이 더욱 활발하게 제작되고 필통·필가·연적 등의 문방구류의 제작이 많아진다(<사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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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白瓷靑畵山水紋壺
<사진 3>白瓷靑畵山水紋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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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히 청백색의 백자제작이 18세기 말에 시작되어 음각·양각·상형·투각의 깔끔하고 청초한 조선 후기 백자가 만들어지며, 또한 酸化銅을 안료로 한 銅畵白瓷의 제작이 분원과 永興 등의 지방에서 개성있게 이루어졌다.

 제작방법에 있어서 판을 붙여 성형하거나, 서로 다른 기물을 조합하거나 틀에 의한 제작과 상형기법이 다양하게 이루어져 백자의 제작방법에 큰 발달을 가져왔으며, 문양을 시문하는 데는 가는 음각과 도드라진 양각수법과 골을 새기거나 투각의 기법을 널리 사용하기 시작한다. 시문하는 문양의 소재도 확대되어 花卉·草蟲紋·山水紋·吉祥紋 등이 다양하게 쓰이기 시작한다.734)張南原,<朝鮮時代 後期白瓷의 새로운 傾向>(≪考古美術≫183, 1989). 현존하는 것으로 白瓷靑畵雲龍紋항아리, 白瓷靑畵雲鳳紋항아리, 白瓷靑畵山水人物紋壺形注子, 白瓷靑畵草花紋筆筒, 白瓷靑畵草花紋硯滴, 白瓷靑畵山水紋떡매병, 白瓷銅畵蓮花紋壺, 白瓷銅畵葡萄紋壺, 白瓷靑鐵銅彩陽刻葡萄紋甁 등을 들 수 있다.

 18세기 후반은 청화백자가 전성기를 맞이한 시기였다. 작품성이 뛰어난 청화백자가 다량으로 생산되었는데, 그 중에는 長身壺·多角壺·각병·제기·접시·항아리·연적·필통 등 종류도 많았거니와 산수문·초화문·용봉문·매조문·길상문 등의 문양이 유행하였고, 무늬를 새기는 기법에 있어서도 양각·투각·상형 등으로 다양한 방법이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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