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전반은 순조·헌종년간으로 安東 金氏·豊壤 趙氏의 세도정치가 시작된 시기로 왕권의 약화와 양반정치의 혼란, 삼정의 문란으로 농촌사회가 피폐되었으나, 한편 문화에 있어서는 金正喜를 비롯한 實事求是學派의 활동이 크게 전개되고 있었다. 중국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18세기 후반 북벌론이 차츰 극복되어 가면서 기술·학문 등 새로운 문화에 대한 북학론이 적극화되
어 청의 사상과 문물이 수용된 시기였다.
이 시기 도자에 있어서는 18세기의 뒤를 이어 분원리요에서 제작활동이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며 청화백자를 중심으로 음각·양각·투각·상형의 순백자의 제작이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백자의 경우에는 18세기 말경에 제작되기 시작하였던 청백색의 백자가 분원리요의 특색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갓맑고 청초한 청백색의 白瓷釉의 전개가 가장 큰 기반을 이룬다.
器形에 있어서는 수많은 상형의 연적이 제작되고 있었다. 개구리·두꺼비·해태·토끼·잉어·복숭아·금강산·무릎·사각·팔각·두부·또아리 등의 다양하고 아름다운 형태가 만들어졌다(<사진 4>). 筆筒에 있어서는 십자형·連環形·格字·파초·포도·연화·운룡 등의 문양과 투각기법의 필통이 제작되었다. 그리고 祭器접시의 방형·원형의 크고 작은 모습과 盒·벼루·필가·筆洗·墨壺·화장합·油甁·접시·花形盞·酒杯·단지·술병·주전자·촛대 등의 생활용기가 다양한 형태로 제작·사용된 백자의 전성기였다.735)尹龍二,<朝鮮 19世紀 分院白瓷의 特色>(≪廣州分院里窯産 靑畵白瓷≫-梨花女大博物館 特別展圖錄 22-, 1994).
문양에 있어서도 조선적인 세계를 보여주는 十長生의 사슴과 불로초, 雲鶴과 거북, 소나무와 바위, 해와 달의 멋들어진 모습과 雲龍의 힘찬 필치, 雲鳳의 활달한 모습과 분원 앞의 한강과 그 앞의 三山을 보여주는 산수문의 정취, 그리고 연화·잉어·모란문 등의 간결하고 활달한 모습이 다양한 기형과 잘 어울리고 있다(<사진 5>).
이 시기의 백자의 편년자료로는 순조 8년(1808)의 白瓷鐵畵洪大胤筒形墓誌와 순조 12년의 白瓷鐵畵蔡呈文접시형墓誌, 순조 21년의 淸衍君主石製墓誌와 함께 출토된 백자明器들, 순조 26년의 白瓷靑畵淑人慶州金氏墓誌, 순조 29년의 白瓷靑畵林千壽墓誌, 헌종 5년(1839)의 白瓷靑畵吳慶元墓誌, 헌종 9년의 白瓷靑畵全在仁墓誌, 헌종 12년의 白瓷靑畵迎日鄭氏墓誌, 철종 원년(1850)의 道光三十年銘 白瓷靑畵銅彩桃形硯滴(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등을 들 수 있다.
갓맑은 청초한 청백색의 백자유에 청화의 백자가 제작되고 있음과 철화나 동채의 백자가 이 시기에도 계속적으로 제작되고 있었음을 이들 자료들이 뒷받침해 주고 있다.
이와 같이 19세기 전반은 백자와 청화백자에 있어서 분원리요 특유의 청백자를 바탕으로 18세기 전후반의 금사리·분원리요의 초기 시기를 벗어나 기형과 문양에 있어서 더욱 정취깊은 조선적인 세계를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문방구류와 제기류의 놀라운 발전과 장생문양의 유행이 주목할 만한 것도 이 시기 도자의 중요한 특색이다.
조선 후기 도자의 특색은 18세기 전반에 제작되기 시작한 유백색·설백색의 고전적인 금사리요산의 백자와 간결한 문양의 청화백자를 바탕으로 18세기 후반 분원리요에서 조선적인 백자의 세계를 꽃피웠으며, 18세기 말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분원리요 특유의 청초한 청백색의 백자제작을 바탕으로 19세기 전반에 조선적인 정취어린 세계를 보여주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특히 병이나 호의 각, 면을 다듬는 독특한 방법과 단순한 감각의 제기접시, 환상적일 정도의 다양한 상형의 각종 연적들과 필통들의 제작 그리고 추초문·산수문·장생문 등의 서정적인 문양을 나타내고자 한 조선 사기장들의 솜씨가 깃들여진 조선백자의 또다른 전성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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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