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건축이란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인 한양의 성균관, 4부학당과 지방의 향교, 그리고 사학교육기관인 서원건축들을 말한다. 조선 후기에 건립된 교육기관 중 관학으로는 많은 향교들이 이미 조선 초기에 건립되었고, 다만 후기에 이르러 다시 짓거나, 고쳐 지은 것들인데, 평택·진위·충주·보은·진천·부안·담양·옥과·의성 등의 향교를 들 수 있다.747)김지민,≪鄕校建築의 造營規範에 관한 硏究≫(檀國大 博士學位論文, 1992).
담양향교는 경사지에 몇 단의 터를 고르고, 전면에 강학 공간인 명륜당이 정면 7칸 측면 3칸의 단층 맞배지붕 초익공양식의 집으로 건립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유생들이 기거하며 공부하는 동재와 서재가 명륜당 앞 또는 뒤, 좌우로 건립되나 이 향교에는 동서 양재가 없다. 명륜당 뒤의 높은 언덕 대지 위에 내삼문을 세워 이 내삼문까지는 여러 단의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 공자와 4성 10철과 그 밖의 현인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내며 성인의 몸가짐을 배우고 받들어 모시는 존현 공간은 내삼문 안에 만들어졌는데 정면에 대성전이, 동서로 동재와 서재가 자리잡고 있다.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맞배지붕으로 익공양식의 건축이다. 명륜당과 대성전을 담장이 둘러싸고 있다. 향교의 살림을 맡아 보는 교직사가 명륜당과 대성전 중간의 동쪽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도면 6>).
서원건축은 본래 성현 한 분의 위패를 모신 사당을 건립하여 정기적으로 제사지내면서 존현하고 아울러 후진들을 양성하는 사학교육기관으로 후기에 건
립된 서원은 엄청난 수에 이른다. 그러나 서원이 일반 백성들에게 끼친 피해가 엄청나며, 그 부패가 극심하게 되어 고종 때 대원군은 전국에 서원철폐령을 내리게 되었고, 그 때 47院祠만이 존속되었다. 조선 후기에 창건되어 남게 된 서원건축으로는 四忠서원(영조 1:1725), 大老祠(정조 9:1785), 表忠祠(영조 7), 褒忠祠(영조 13)이다. 그러나 창건은 이보다 앞서 되었으나, 후기에 건축되어 현존하는 서원건축물도 상당수에 이른다.
영조 때 충절 李述原을 제향하는 거창의 포충사는 영조 13년 창립되었는데, 동향한 경사진 터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누문을 세우고, 누문 안 정면에 지은 교학 공간인 정면 5칸 측면 2칸의 강당 한 가운데에는 대청을 두고 좌우로 온돌방을 두었다. 북쪽 방이 서쪽 방보다 더 크다. 강당 뒤로는 내삼문을 세우고 삼문 안에 존현 공간인 사당을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건립하였다. 養士堂이 정면 5칸 측면 1칸 반 크기로 누문과 강당의 왼쪽 남쪽 터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는 바로 강당 앞의 좌우로 두는 동서재에 해당되는 건물이다. 전체적으로 前學後廟의 배치를 이루고 있다(<도면 7>).
서원의 건축양식은 일반적으로 익공양식과 납도리집양식을 이루고 있으며, 조선 중기의 노강서원·도동서원·돈암서원의 경우와 같이 주심포양식은 건립되지 않고 있다.748)김은중,≪朝鮮時代 私學建築에 관한 硏究≫(高麗大 博士學位論文,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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