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행 전통음악 중에는 궁중 밖의 백성들에 의해서 가꾸어진 갈래들이 꽤 있는데, 그 중에서 불교음악 관련의 범패와 화청, 그리고 선소리와 잡가는 비록 문헌적 근거가 없을지라도 조선 후기 음악사에서 언급되어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종교음악의 항목을 따로 설정하기 어려운 실정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선소리와 잡가는 전문 소리꾼들에 의해서 불린 성악의 중요한 갈래에 들기 때문이다. 먼저≪新刊刪補梵音集≫(숙종 39:1713), 大輝和尙의≪梵音宗譜≫(영조 24:1748), 白坡의≪作法龜鑑≫과 같은 문헌을 근거로 조선시대의 범패사를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조선 초기의 梵唄僧 國融의 법통을 제1대로 삼을 때, 2대 應俊·3대 惠雲·4대 天輝·5대 演淸·6대 尙還·7대 雪湖·8대 法敏·9대 惠鑑·10대 洵瑛·11대 有敏의 차례로 전승됐다.789)李惠求,<韓國梵唄의 沿革>(≪韓國音樂序說≫, 서울대 출판부, 1967), 337∼356쪽. 제9대 혜감은 많은 제자들을 배출했는데, 그의 제자들은 대체로 전라도 사찰의 승려들이었다. 鳳押寺의 采淸, 佛會寺의 贊悟, 開天寺의 性覺, 大興寺의 竺察, 寶林寺의 大輝, 澄光寺의 怡眞과 豊湜, 美黃寺의 始明, 興國寺의 體雲, 仙巖寺의 融學, 金塔寺의 演機, 華嚴寺의 覺禪, 大光寺의 道認이 모두 혜감의 법통을 전승한 범패승이다. 제8대 운계당은 서산대사 休靜(1520∼1604)의 제2대 법손 友雲堂과 친분을 맺었던 사이였으므로,790)李惠求, 위의 글, 342쪽. 그는 대략 효종(1649∼1659) 때 활약한 범패승이다. 제9대 혜감의 제자 중 대휘화상이 영조(1724∼1776) 때의 사람임을 상기할 때, 범패가 18세기로부터 널리 성행했음이 확실하다.
일반 백성들에게 불교를 널리 전파하기 위하여 우리말로 된 가사를 민요 같은 곡조에 얹어 부르는 불교가요의 일종이 和請이다. 현행 30여 종 중에서 많이 불리는 악곡은 祝願화청·六甲화청·八相화청·回心曲·별회심곡·白髮歌·往生歌·父母恩重經 따위이다.791)金聖培,≪韓國佛敎歌謠硏究≫(아세아문화사, 1976), 124∼125쪽. 조선 후기에서 전승된 화청은 모두 ‘걸청 걸청 지심 걸청, 일회 대중에 일심 걸청’이라는 서두로 시작되는데,792)高麗大 民族文化硏究所,≪韓國民俗大觀≫Ⅴ(高麗大 出版部, 1982), 88쪽. 그 곡조도 대개가 민요조이므로 대중들에게 친밀감을 준다.
立唱이라고도 하는 선소리는 장고를 멘 독창자가 소고를 들고 제창하는 네댓 사람과 함께 서서 노래하는 성악의 한 갈래이다. 장고잡이가 독창으로 소리를 메기면 소고잡이들이 제창으로 부르는 교창형식의 선소리는 조선 후기 祠堂牌에서 유래됐다. 백성을 상대로 연예활동을 벌였던 사당패는 절간의 타락한 남자인 居士 또는 男社堂의 優婆僿와 여사당의 優婆夷로 구성됐으며,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하층계급의 남자들을 상대로 주석에서 노래와 춤으로 여흥을 제공하던 일종의 민속연예집단이었다. 조선 후기 사당패의 본거지는 경기도 안성군 瑞雲面의 靑龍寺였고, 지방 사당패의 본거지 중 하나는 경남 남해군의 花芳寺였다.793)宋錫夏,≪韓國民俗考≫(일신사, 1960), 101∼112쪽.
高麗大 民族文化硏究所, 위의 책, 89∼90쪽. 조선 후기 여러 지방의 사당패들이 세운 전통이 바로 서도입창·경기입창·남도입창에 전승되고 있다. 대한제국 무렵 전문적인 소리꾼의 집단을 산타령패라고 불렀는데, 그 이유는 선소리패들의 중요 연주곡목이 산타령이었기 때문이다.794)張師勛,≪國樂槪要≫(일신사, 1960), 220∼223쪽.
한양 중심의 소리패가 발전시킨 성악의 한 갈래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雜歌였다. 흔히 긴잡가·속가·속요·잡소리 등으로 불린 잡가는 19세기 서울 용산구 청파동과 만리동 일대의 四契축 소리꾼들에 의해서 발전된 노래였다. 비교적 낮은 신분의 백성을 상대로 노래 불렀던 사계축 소리꾼795)成慶麟,≪韓國音樂論攷≫(동화출판공사, 1976), 120쪽.
한국문화예술진흥원,≪文藝總鑑≫(1976), 284쪽.의 전통은 금세기 초 秋敎信·曺基俊·朴春景에 의해서 전승된 十二雜歌에서 발견된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