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 든 規式之戱 즉 규식이 있는 놀이의 내용에서 ‘서인’은 혹시 ‘西胡戱’를 말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고, ‘주질’은 줄타기, ‘농령’은 신라 五伎의 金丸과 같은 공던지기로 밤마리 대광대패의 죽방울받기와 같은 것이고, ‘근두’는 ‘斤頭撲跌’을 말한 것으로 오늘날 남사당패가 노는 땅재주인 살판과 같은 것이다. 모두 散樂계통의 奇伎곡예로서 20세기 초까지도 草溪 밤마리의 대광대패나 솟대장이패와 남사당패 같은 직업적 재인·광대들에 의해 탈춤과 함께 이같은 규식지희가 연희되던 것을 알 수 있다.
악공들의 음악에서는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구나 뒤의 가무부가 확대된 것을 들 수 있는데 조선 말기까지 역대 구나와 진연에서 반드시 추어 오던 處容舞를 예로 들더라도≪樂學軌範≫에 있는 대로 학무와 연화대와 처용무가 합설되어 가무극적인 것으로 종합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구나 뒤에 처용무는 前度와 後度로 나뉘어 두 번 추는데, 후도에서 학무와 연화대무가 합설되고, 彌陀讚·本師讚·觀音讚과 같은 佛歌를 곁들였다.
임진·병자 양란 이전에 가장 주력하였던 중국사신을 영접할 때 거행되던 산대나례의 내용을 보다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문헌은 董越의≪朝鮮賦≫이다. 동월은 성종 19년(1488) 3월에 내조한 명나라 사신으로≪조선부≫는 그의 견문을 적은 것이다. 평양과 황주에서도 鰲山棚(산대)을 시설하고 온갖놀이(百戱)를 베풀었는데 왕경이 가장 훌륭하였다고 한다. 서울에서는 광화문 밖에 동서로 두 鰲山(산대)의 두 자리가 벌여 있는데, 그 산대 위에서 연희된 산대잡희는 吐火·曼衍魚龍의 놀이와 舞童세우기·근두·곰놀이·줄타기·竹廣大(양걸이) 등 이른바 산악백희와 사자와 코끼리 등의 假像의 진열이다. 曼衍魚龍之戱는 龍蛇熊虎의 假頭를 쓰고 추는 假頭舞이다. 사자와 코끼리의 잡상은 진열에 그치지 않고,≪星湖僿說≫에 의하면 사자춤으로 추어졌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사자춤은 新羅五伎의 狻猊 이래의 전통이 지방의 민속무로 남아 내려오다가 宮中呈才舞로 채택되기도 한 것이다.
한편 같은 성종 때의 成俔(1439∼1504)은 그의 시862)成 俔,≪虛白堂集≫권 7, 詩 觀儺.에서 綵棚을 시설하고, 울굿불굿한 화려한 의상을 입은 무용수들이 종횡으로 춤추는 모습과 弄丸·줄타기·꼭두각시놀음·솟대놀음 등을 나례의 놀이로 읊었는데 모두 이른바 산악백희인 규식지희에 속하는 놀이들이다.
성현보다 300년 뒤인 정조 때의 柳得恭(1749∼?)은≪京都雜志≫(권 1) 風俗 聲伎조에서 “연극에는 山戱와 野戱의 양부가 있는데, 儺禮都監에 속한다. 산희는 다락을 매고, 포장을 치고, 사자와 호랑이와 만석중춤을 보인다. 야희는 唐女와 小梅로 분장하고 춤을 춘다”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산희는 꼭두각시놀음이 아니고, 4월 초파일에 연등놀이의 하나로 놀던 무언꼭두극인 만석중놀이를 말한 것 같은데 이것을 산대에서 노는 탈춤의 공연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 “당녀는 고려 때 禮成江에 와서 살던 중국창녀의 이름이고, 소매도 옛날 美女의 이름이다”라고 그는 설명하고 있는데 야희란「들놀음」을 가리키는 말로 水營이나 東萊에서는 탈놀이를 野遊 또는 들놀음이라고 한다. 당녀탈은 楊州別山臺놀이와 松坡山臺놀이에도 있었고, 소매는 江陵官奴假面劇의 여주인공으로 나오고, 양주별산대놀이나 鳳山탈춤 등에 나오는 小巫탈은 이 소매의 와전이 아닌지 모르겠다. 이 야희는 벌써 산대놀이에 가까움을 느끼게 한다.
위에서 오산이니 오산붕 또는 彩棚이니 한 산대는 이미 고려조에서 사치와 奇觀을 보였으나 조선조에 와서는 그 규모가 더 거대해지고 내용도 복잡해졌다. 광해군 12년(1620) 중국사신을 맞이할 때의 산대는 비단으로 장식한 채붕을 좌우에 각각 春山·夏山·秋山·雪山의 네 자리를 설치하고, 각 산에 上竹 3, 次竹 6을 세우고, 상죽의 길이는 90척, 차죽의 길이 80척, 합하여 상죽 24주, 차죽 48주, 산대역군은 모두 2,7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863)≪光海君日記≫권 156, 광해 12년 9월 정축. 이러한 산대의 구조는 전면에는 75척의 간격에 길이 90척에 상죽 3을 세우고, 그 후면 60척의 지점에 길이 80척의 차죽 6을 세워, 지상 60척 높이의 공간에 가로질러 橫木을 매고, 찬란한 빛깔의 비단으로 포장을 두른 무대를 꾸민 것이다. 이 때 전면 한면은 포장을 두르지 않고, 일정한 높이의 무대를 설치한 것이다. 이 산대 자체가 화려한 색깔의 비단으로 둘렀을 뿐만 아니라 그 위에 奇花妖草를 장식하고, 또 鳥獸人物 등의 잡상을 배열했다.
조선 초기에는 나라가 새로 일어나는 기운과 함께 산대의 규모에서 보다시피 나례는 매년 섣달그믐에 거행되던 季冬儺禮를 비롯하여 중국사신의 영접행사와 또 조정의 여러 공식행사에 즉 公儀로서 없지 못할 절차로 되어 나례는 逐疫 외에 잡희 즉 나희가 따랐다.
그러나 임진·병자 양란 뒤의 조선조는 쇠운에 접어들어 인조조(1623∼1649) 이후 특히 인조 12년(1634) 이후 나례의 규모도 축소되어 觀象監에서 주관하는 축역행사 정도로 그치고, 명이 청으로 교체된 후 숭명배청의 감정과 함께 淸使迎接 때의 산대시설도 열의가 감소되어 왕년의 성대한 구경꺼리는 없어지고, 그나마 몇 번씩 거행된 영조(1724∼1776), 정조(1777∼1800)시대 이후는 공의로서의 나희는 정파되고 말았다. 이 공의로서의 나희가 정파된 뒤 나희에 동원되던 광대들이 제각기 자기 고장에 정착하여 자신들의 마을을 중심으로 산대놀이계를 모아 놀이패를 형성하게 되어 점차 현존하는 山臺都監系統劇이 민간에서 민속극으로 형성되어 갔으리라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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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