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4. 무용·체육 및 연극
  • 3) 연극
  • (1) 산대나희
  • 나. 소학지희

나. 소학지희

 문종실록에서 규식지희와 더불어 나희의 내용으로 분류된 笑謔之戱, 즉 웃고 희학하는 놀이인 ‘僧廣大’는 중광대놀이 즉 민속극에 나오는 파계승놀이를 가리킨 것 같다. 조선시대의 산대나희에서 주목할 것은 규식지희와 가무뿐만 아니라 잡희, 倡優之戱 또는 俳優之戱라고 불리던 소학지희의 話劇的인 전개일 것이다. 심지어 규식지희인 줄타기나 근두도 단순히 그 기예만을 보이는 것이 아니고, 상대역인 어릿광대나 호미씨와 더불어 익살을 주고 받으면서 진행되었다. 고려의 調戱 이래로 직업배우인 창우들에 의한 여러 가지 소학지희 즉 익살스런 재담에 의한 놀이가≪조선왕조실록≫과 기타의 문헌에 산견된다.

 세조 때 나례행사에서 逐疫優人이 벌인 잡희로서 스스로 문답하여 탐관오리와 항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어전에서 거리낌없이 연출하였다고 한다.864)≪世祖實錄≫권 34, 세조 10년 12월 정미. 연산군 5년(1499) 12월에는 孔潔이란 배우가 李紳의<悶農詩>“벼를 김매는데 오정이 되니, 벼포기 아래로 땀이 떨어지누나, 그 누가 알아주랴 소반 위의 쌀밥이, 한 알 두 알 모두가 辛苦인 것을” 외거나 또 유교의 明德·親民·至善의 3강령과 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8조목 등을 논하므로 왕이 承傳色을 시켜 묻기를, “네가 문자를 아느냐, 글은 몇 책이나 읽었느냐” 하니, 결이 서서 대답하기를, “글은 알지 못하고 전해 들은 것뿐입니다” 하고, 물러가 놀이를 하라 하여도 따르지 않아 자못 무례하다 하여 의금부에 내려서 형장 60대를 때려 역졸에 소속시키라는 왕명이 내렸으나, 승지 등이 “潔은 優人으로서 놀이하는 것을 알 뿐입니다. 어찌 예절로써 책망하오리까”라고 상소한 것이 보인다.865)≪燕山君日記≫권 15, 연산 5년 12월 갑인. 또 연산군 11년에는 孔吉이란 배우가 늙은 선비놀이를 하며 말하기를, “殿下는 堯舜과 같은 임금이요, 나는 皐陶(舜帝의 명신)와 같은 신하입니다. 요순은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니지만 고요는 항상 있는 것입니다”라고 하고, 또 논어를 외어 말하기를,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며,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면 비록 곡식이 창고에 가득한들 내 어찌 먹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그 말이 불경하다고 하여 매질하게 하고 먼 곳으로 유배시켰다. 연산군 같은 暗主에 대하여 당시의 배우들이 목숨을 걸고 저항한 사실866)≪燕山君日記≫권 60, 연산 11년 12월 기축.을 이로써 알 수 있겠다. 또 중종 22년(1543)에는 觀儺 때에 呈才人으로 하여금 민간의 질고와 구황절차 등을 놀이로써 연출케 한 사실867)≪中宗實錄≫권 60, 중종 22년 12월 병인.이 보인다.

 이 밖의 몇몇 개인문집에 실려 있는 예를 들어 보면 柳夢寅(1559∼1623)의≪於于野譚≫에는 배우에 관한 이야기로 貴石의 놀이와 洞允의 探花蜂蝶놀이와 배우의 상소놀이 등이 소개되어 있다. 그 중에서 귀석의 놀이 하나를 소개해 보면 아래와 같다.

자고로 배우가 연기를 해 보이는 것은 반드시 관객을 웃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요컨대 항간에 일어나는 일을 더 보태어 세상에 이익이 되게 하는 것이다. 恭憲大王(明宗, 1546∼1567)이 大妃殿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고 궐내에 무대를 설치하게 하였다. 서울에 사는 배우 貴石은 명배우로서 훌륭한 연기를 보였다. 사초 네 가닥을 묶었는데 두 가닥은 크고 중간치가 하나 작은 것이 하나였다. 그리고는 東軒에 앉아 자칭 수령이라 하고, 色吏를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하였다. 색리로 자칭하는 한 사람이 무릎으로 기어 나와 부복했다. 귀석은 큰 사초 한 가닥을 뽑으면서 낮은 소리로 ‘이 계집은 이조판서에게 바쳐라’ 하고 또 큰 것을 하나 뽑아 들고 ‘이 계집은 병조판서에게 바쳐라’ 한다. 그리고 중간치를 뽑아 가지고는 ‘이것은 대사헌에게 바쳐라’ 하고, 마지막으로 제일 작은 것을 들고는 ‘이건 상감께 바쳐라’ 하였다. 여기에는 응당 풍자의 뜻이 담겨져 있었다.

 이상은 그 첫 이야기로 비교적 간단한 두 사람의 연출이지만 두 번째 이야기는 다수의 등장인물과 복잡한 연출을 보여주는 것이다. 귀석은 자기 주인인 종실이 배우의 재주를 시험하는 試藝로써 계급이 승진되었지만 실제적인 관직은 없었고, 봉록도 더해지지 않은 데다가 주위에 거느리는 종도 없이 여러 능침의 제사지내는 일에나 차출되어 일년 내내 여가란 거의 없이 박대를 당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 주인의 이러한 처지를 여러 배우를 동원하여 놀이로 연출하였다. 이러한 내용의 연극이 있자 얼마 지나지 않아 상감의 특명이 있어 귀석의 주인에게 실제적인 관직이 더해졌다.

 중종 때의 魚叔權의≪稗官雜記≫(≪大東野乘≫권 4 수록)에는 定平府使 말안장 사는 놀이와 巫布稅놀이가 소개되어 있다. 첫째는 정평부사 具世璋이란 자가 욕심이 많고 인색하여 한 번은 말안장장수를 불러들여 여러 날을 두고 값을 깎고 흥정하다가 마침내 官貨로 말안장을 사들였다. 그 모양을 배우가 歲時에 御庭에서 놀이로 놀아 왕이 정평부사의 장물죄를 다스리게 되었다. 둘째는 관부에서 거둬들이는 巫稅布가 너무 심하여, 매번 收稅吏가 오면 무당집에서는 酒食을 갖추어 대접하며 그 기한을 늦추려고 야단법석을 떠는데, 그 모양을 배우가 역시 세시에 어정에서 놀이로 보여주어 왕이 무세를 면제하여 주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놀이들은 모두 사회비판을 보여준 놀이들인데 어숙권은 “배우도 능히 貪汚를 비난한다” 또 “배우도 백성에게 도움이 된다”라고 각각 평하고 있다.

 이와 유사한 사회풍자놀이는 필자미상의≪芝陽漫錄≫에도 있다. 명종 22년(1567)의 일로 왕이 심기가 불편하여 울적한 마음을 풀기 위해 창우희를 구경하였다. 배우가 都目政事 즉 벼슬아치의 성적을 사정하던 일을 놀이로 보여주었다. 즉 이조판서와 병조판서가 서로 못난 조카와 사위에게 정실을 쓰는 내막을 연출함으로써 왕이 크게 웃었다고 한다.

 한편 李瀷은≪星湖僿說≫에서, “지금 登科한 자들이 창우를 써서 낙으로 삼으니 창우들의 놀이에 (老)儒戱라는 것이 들어 있다. 다 떨어진 의관에 온갖 추태를 연출하여 축하연의 즐거움으로 삼는다”868)李 瀷,≪星湖僿說≫권 12, 人事門 以儒爲戱.고 하였다. 등과한 자가 3일간 座試官과 선배와 친척을 방문하는 三日遊街(<그림 1>)에도 창우들은 고용되어 선도역을 하였지만 축하연에서도 이같이 선비들의 생활을 풍자한 老優戱 같은 놀이를 놀았던 것이다.

확대보기
<그림 1>三日遊街
<그림 1>三日遊街
팝업창 닫기

 18세기 중엽 宋晩載(1788∼1851)가 가난하여 자기 자식이 등과했을 때에 창우들을 고용하는 대신 시로 읊은<觀優戱>50수에는 당시의 민간에서 행해지던 창우희의 내용을 읊었는데 규식지희와 소학지희와 음악이 두루 포함되어 있다. 이상 몇 가지 예에서 보다시피 15∼16세기에 소학지희는 창우들이 일정한 인물과 일정한 사건에 관련된 주제를 전개하는 연극을 연출하였고, 그것도 독연형식만이 아니고 다수의 등장인물에 의하여 사회비판이나 시사풍자의 내용을 명절이나 군중이 모이는 시기에 보여주었으며, 궁중의 나희에도 포함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광대들의 소학지희는 고려조의 조희의 전통을 이어 조선 후기의 민속극에도 맥이 닿아 산대도감계통의 가면극의 형성에 臺詞的 측면에서 재담으로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