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4. 무용·체육 및 연극
  • 3) 연극
  • (4) 민속극

(4) 민속극

 조선 후기에 완성되어 오늘에까지 전승되는 연극장르에는 판소리 외에 그 대표적인 것으로 산대도감계통의 가면극(탈춤)과 서낭제의 탈놀이와 꼭두각시놀음이 있다. 이들은 민속극으로 내려오다가 1930년대에 그 대사가 채록되고, 연구되어 1964년 이래로 그 중 13종목의 가면극과 꼭두각시놀음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서낭제 탈놀이로서는 河回別神굿탈놀이와 강릉단오제의 官奴假面劇이 있고, 산대도감계통극으로는 경기지방의 楊州別山臺놀이와 松坡山臺놀이, 황해도의 鳳山탈춤·康翎탈춤·殷栗탈춤, 경남지방의 統營五廣大·固城五廣大·駕山五廣大·東萊野遊·水營野遊와 이 밖의 계통을 달리하는 北靑獅子놀음이 있다.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지만 다산은 사당패에 대하여 못마땅해 하면서 그 폐해를 다음과 같은 지적으로 경계하였다.

배우의 놀이, 꼭두각시의 재주부림, 나악으로 시주를 청하는 일, 요언으로 술수를 파는 자는 모두 금해야 한다. 남쪽지방의 아전과 군교들은 사치와 방종이 습속이 되어, 봄이나 여름 화창한 때가 되면 배우의 익살(우리말에 덕담이라 함)과 窟櫑棚竿의 놀이(우리말에 초라니〔焦蘭伊〕또는 山臺라고도 함)로 밤과 낮을 이어서 즐기고 있다…(丁若鏞,≪牧民心書≫권 10, 刑典六條 禁暴).

 고종 30년(1893) 경상도 고성부사로 부임한 吳宖黙이 음력 12월 30일 밤 (除夕)에 고성오광대를 보고, 고종 26년 제석에 보았던 咸安五廣大와 비교한 글을≪固城叢錄≫에 남기고 있다. “月顚과 大面, 老姑優와 兩班倡의 기이하고 괴상한 모양의 무리들”이라고 한 묘사는 그대로 오늘날 전하는 고성오광대의 말뚝이요, 원양반·젓양반·갓양반과 할미탈들을 말한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姜彝天(1769∼1801)이 10살 때인 정조 3년(1779)에 본 놀이를 읊은 시<남대문 밖에서 본 놀이(南城觀戱子)>에는 꼭두각시놀음의 여러 배역의 꼭두들이 나오고, 특히 박첨지의 출현을 실감있게 묘사하였고, 탈놀이 묘사에서는 노장과 상좌와 소무의 등장과 노장의 파계를 묘사하였고, 미얄할미의 죽음과 무당의 지노귀굿까지 묘사하고 있어 18세기 중엽에 이미 오늘날 양주별산대놀이에서 볼 수 있는 노장과장과 미얄과장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이같은 탈놀이의 배역의 이름은 벌써 16세기의 李濟臣(1536∼1584)의≪淸江先生笑叢≫에 “네 할아버지는 중광대(僧廣大), 네 할미는 할미광대(姑廣大), 네 애비는 초란광대(招亂廣大), 너는 박광대(匏廣大)”라는 표현이 있어 이미 산대탈놀이의 탈들을 연상케 하고 있다.

 崔永年에 의하면 1925년 펴낸 그의 시집에서<儺山棚>을 설명하여 “이름을 산듸도감이라 한다” 하면서 노장의 파계과장을 시로 읊었다. 또<紅同知>를 설명하는데 “이를 가리켜 각시라 한다”고 하였다. 이로써 우리는 오늘날에 전하는 가면극「산대놀이」와「꼭두각시놀음」이 조선 후기 이래 20세기 초인 1920년대까지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872)崔永年,≪海東竹枝≫중편, 俗樂遊戱 儺山棚·紅同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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