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臺都監系統劇은 우리 나라의 대표적 민속극으로 속칭「산대도감놀이」·「산디도감」·「산두놀이」·「산대놀이」·「산두나례도감」·「나례도감」등의 별칭으로 불리던 가면극이다. 흔히는 산대극이라고 부르고 있으나 고려와 조선 초기에 성행하던 산대잡극과 구별하기 위하여 산대도감극이라는 명칭을 택하고자 한다. 산대도감극은 조선 초기에 山臺儺禮를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했던 산대도감이나 나례도감에서 유래된 명칭이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전승된 산대도감계통극은 산대잡극이나 산대나례극과 동일하지 않으므로 이제까지 그 발생이나 형성에 대하여 여러 논의가 있어 왔다.
이들 논의 중에서 크게 나누어서, ㉮ 농경의례기원설(서낭굿기원설), ㉯ 伎樂과의 동일기원설, ㉰ 산대희기원설을 들 수 있겠다. 그 중에서 대조적인 것은 ㉮와 ㉯의 기원설이나, 그러나 이것은 토착적인 탈놀이에 대륙전래의 散樂과 假面戱가 영향을 미쳐 오늘의 산대도감극이 형성되었음을 설명하는 기원설의 기본적인 설정으로 통합될 수 있겠다. 조선조의 실록, 기타의 문헌에서 언급한 산대나례가 규식지희와 음악(가무)만이 아니고 배우지희 즉 소학지희도 포함되어 이 소학지희 속에서 산대극 형성의 계기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편 迎使의 나례에는 백희 또는 잡희와 戱謔之事만을 상연하였지 가면무극은 상연되지 않았다는 의견도 있지만, 이 희학지사 즉 소학지희가 나중에 파계승에 대한 풍자와 양반이라는 특권계급에 대한 조롱과 모욕, 그리고 남녀간의 갈등과 서민생활의 실상을 보여주는 민속극으로 발전할 싹을 충분히 내포하고 있었다고 보며, 여기에 ㉰의 산대희기원설의 근거가 있다고 하겠다.
인조 12년(1634) 공식행사 즉 公儀로서의 산대나례가 폐지되자 각 지방에서 상경하던 광대들은 제각기 자기 고장에 정착하면서 향리들의 영도 아래 그 고장의 세시행사로서의 가면극을 공연하게 되고, 대처의 상인들이나 서민들의 후원도 얻어 현존하는 민속극을 형성하여 갔다. 구전에 의하면 대체로 200년 전에 각 지방의 탈놀이가 생겼다고 하니 판소리가 형성되는 17∼18세기와 거의 때를 같이한다. 산대희를 위해 소집되는 각 지방의 광대들은 1개월 전에 상경하여 肆習하였으므로 이 때에 서로의 연희의 교류가 이루어져 오늘날 보는 것 같은 주제상의 공통점이 생기지 않았나 생각된다. 여기에 극 내용상으로 산대도감계통극이라고 묶을 수 있는 현존하는 10종의 가면극의 공통점이 생긴 근거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가) 경기지방의 산대놀이
서울의 산대놀이 연희자들은 주로 궁중이나 성균관의 천역에 종사하던 편놈(泮隷)들로 서울 4대문 밖에 살았고, 인조조 이후 공식행사로서의 산대놀이가 폐지되자 이들은 제각기의 거주지를 중심으로 산대놀이단체인 계를 모으고 제각기 탈놀이를 놀아온 결과 碌磻里山臺·阿峴(애오개)山臺·鷺梁津山臺·退溪院山臺·서울 社稷골 딱딱이패 등이 생겼다고 한다. 이들 탈놀이를 本山臺라고 일러 왔으나 오늘날에는 사직골 딱딱이패의 산대놀이를 배워서 놀게 되었다는 楊州別山臺놀이와 송파장터에서 놀았던 松坡山臺만이 전한다.
양주별산대놀이를 전승하여 온 양주구읍은 양주목사가 주재하던 곳으로 한강 이북에서는 제일 큰 고을로 북쪽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길목이 되어 주막과 객주가 즐비하던 곳이다. 행정관아뿐만 아니라 큰 장터로서의 경제적인 여건도 갖추었던 고장으로 산대놀이가 향리의 주재 아래 이 고장의 세시행사로서 즉 명절놀이로 정착되고 전승되어 왔다. 연희자로는 남자들만이 탈을 썼는데 관아의 잡역에 종사하던 하층의 이속(주로 使令이나 軍牢)들이 중심이 되어 巫夫 등 ‘신명이 과한 자’들이 함께 모여 놀았는데, 그들은 都中이란 계를 조직하여, 목사가 주재하던 客門洞을 중심으로 이른바「본바닥」사람들만이 출 수 있던 독특한 탈춤으로 전승되어 왔다. 이 곳의 주민들은 대개 유희·오락을 좋아하고, 胥吏나 衙前的 성격이 짙으나 구읍의 몰락 후에는 半農·半藝人으로 살아왔다.
양주별산대놀이는 4월 초파일·5월 단오·8월 추석에 주로 연희되었고, 이 밖의 대소명절 외에 기우제 같은 때에도 연희되었다. 연출형태는 다른 가면극과 마찬가지로 음악반주에 춤이 주가 되고, 노래가 따르는 가무적 부분과 거기에 몸짓과 재담이라고 하는 대사가 따르는 연극적인 부분으로 구성되어 상연된다. 그 대사는 비어와 속어가 많고 알기 쉽고 이해하기 좋은 일상적인 대화조의 대사인데, 봉산탈춤의 대사가 식자들이 많이 쓰던 한문식 표현이 많은 것과 대조적이다. 노래는 장단을 청하는 짤막한 불림과 그 밖에 매화타령·백구타령·천자풀이·巫歌 등으로 그것도 덕담 외에는 첫 허두만 조금 부르다가 곧 재담이나 춤으로 바꾸어 버리며 동작의 하나의 轉機(cue)적인 역할을 한다.
연출시간은 민속예능의 일반적인 특성으로 제한이 없어 보통 저녁에 시작하면 다음날 새벽까지 계속되었으며, 그때그때의 흥과 형편에 따라 3∼4시간으로 줄이는 수도 있었다. 산대춤은 봉산탈춤의 깨끼춤이나 오광대탈놀이의 덧배기춤에 비하여 비교적 전아한 맛이 있고 형식미를 갖추고 있다. 춤사위의 분류도 자세하여 거드름춤과 깨끼춤의 두 종류로 크게 나뉘고, 다시 각각 10여 종류로 세분되어 그 속에서 한국민속춤의 기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산대춤의 반주악기로는 삼현육각 즉 피리 두 개, 젓대 하나, 해금 하나, 장고 하나, 북 하나로 구성되지만 이외에 꽹과리를 추가하는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피리와 장고만으로도 춤을 춘다. 반주악은 기본적으로 완중한 염불곡, 리듬이 명확한 타령곡, 유창한 굿거리곡 등을 사용한다.
우리 나라의 가면극에 쓰이는 탈(가면)은 얼굴 전면을 덮게 되어 있으며, 탈 뒤에는 탈보가 붙어 있어서 이것으로 머리에 동여매고, 후두부를 가리게 되어 있다. 양주가면은 바가지탈이며 종이탈인 봉산탈에 비하여 보다 사실적이며 등장하는 배역 총인원수는 32인이나 겸용하는 탈이 있기 때문에 실제 사용하는 가면수는 보통 22개 내외가 된다. 즉 상좌 두 개(첫 상좌는 도련님역을 겸용), 옴중, 목중 네 개, 연잎, 눈끔적이, 완보 신주부, 왜장녀(해산어멈·도끼누이를 겸용), 노장, 소무 두 개(애사당·당녀 겸용), 말뚝이(신장수와 도끼 겸용), 원숭이, 취발이(쇠뚝이 겸용), 샌님, 포도부장, 신할아비, 미얄할미로 모두 22개이다.
양주별산대놀이의 科場(마당)은 연희자들에 의하면 흔히 열두 마당이라고 하지만 이를 그 내용에 따라 정리하면 8과장으로 나눌 수 있다.
길놀이와 서막인 고사에 이어, 제1과장(첫째마당) 상좌춤, 제2과장 옴중과 상좌놀이, 제3과장 옴중과 목중놀이, 제4과장 연잎과 눈끔적이춤, 제5과장 팔목중놀이-제1경 염불놀이, 제2경 침놀이, 제3경 애사당북놀이, 제6과장 노장놀이-제1경 파계승놀이(<사진 1>), 제2경 신장수놀이, 제3경 취발이놀이 제7과장 샌님놀이-제1경 의막사령놀이, 제2경 포도부장놀이, 제8과장 신할아비와 미얄할미놀이, 종장 지노귀굿.
현전하는 양주별산대놀이의 내용은 10종의 산대도감계통극과 공통된 내용으로 크게 나누어 파계승놀이와, 양반과 그의 종 말뚝이놀이와, 서민생활의 실상을 보여주는 신할아비 일가의 놀이의 3부로 나눌 수 있으며, 그것이 현대연극처럼 첫 과장에서 끝 과장까지 연속체로 된 드라마가 아니고 주제별로 된 세 개의 드라마가 말하자면 옴니버스 스타일로 한 테두리 속에 들어 있다. 그 주제는, ㉠ 辟邪의 儀式舞와 굿, ㉡ 파계승에 대한 풍자, ㉢ 양반에 대한 모욕, ㉣ 남녀의 대립과 갈등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이것은 당시의 특권계급과 형식도덕에 대한 일반 서민들의 비판정신을 구체적으로 연출하는 민중극이다.
양주별산대놀이는 1964년에 중요무형문화재(제2호)로 지정되어 예능보유자(속칭 인간문화재) 柳敬成 이하 7명이 지정되었으나 1998년 현재 金相鉐과 盧載永 두 사람의 보유자만이 생존하고 있다.
송파산대놀이는 양주별산대놀이와 같이 앞서 말한 아현이나 구파발의 본산대의 분파이며, 양주별산대놀이와 그 내용에 있어 대동소이하다. 송파진은 조선 후기의 전국에서 가장 큰 향시 열 다섯 중의 하나였던 송파장이 서던 곳으로 향리의 뒷받침보다는 부촌으로서의 경제적 여건이 더 산대놀이를 유지시키게 한 것 같다. 연희자들의 말에 의하면 약 200년 전부터 송파산대놀이가 시작되었으나 중도에 쇠진하였던 것을 1900년 초부터 구파발본산대의 연희자 윤희중(1840∼1923)을 초청하여 부흥시켰다고 한다. 그 후 세시행사로 정월 대보름과 단오와 추석 명절놀이로 놀이하여 왔다고 한다.
송파산대놀이는 1973년에 중요무형문화재(제49호)로 지정되고, 韓有星 이하 3명이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으나 모두 작고하고 현재 金學銘 혼자만이 보유자이다.
나) 황해도의 탈춤
황해도탈춤은 사리원·봉산을 중심으로 황주와, 서쪽 평야지대인 안악·재령·신천·장연·송화·은율 등지와, 동남쪽 평야지대인 麒麟·新院·서흥·평산·新幕 등지와, 해안지대로는 해주·강령·옹진·송림·秋花·金山·연백 등지에서 추어 왔고, 5일장이 서던 거의 모든 장터에서 자기 고장의 탈춤이나 아니면 다른 곳 탈꾼들을 초빙하여 일년에 한 번씩은 놀았다고 한다. 이러한 분포로 보아 황해도탈춤은 거의 황해도 전역에서 놀았고, 그 중에서 특히 봉산탈춤이 대표격으로 된 것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이래의 일이며, 특히 일제 식민지시대에 들어와서의 일이라고 한다. 오늘날 남한에서 보존되고 있는 황해도탈춤은 봉산탈춤과 강령탈춤과 은율탈춤인데 6·25동란 후 몇 사람씩의 연희자들이 월남하여 가르친 결과이다.
이 놀이는 세시풍속의 하나로 단오명절놀이로 놀이하여 왔다. 단오날 밤 모닥불을 피워 놓고 연희가 시작되면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5월 단오에 놀게 된 것은 조선조 말 이래의 일이고, 전에는 4월 초파일에 놀았다고 한다. 양주별산대놀이도 4월 초파일에 등불놀이와 함께 성대하게 놀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고려 이래의 연등행사의 전통을 이은 결과인 것 같다. 단오는 중부 이북지방에서 남부지방의 추석과 맞먹는 명절로서 성대히 지내는데, 이 때가 모내기 직전의 忙中閑의 시기이며, 벽사와 풍년을 비는 祈年의 행사로서 또 하지의 축제로서 민속적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이같은 의례적인 행사에서 점차 오락 위주의 민중극으로 발전되어 간 것 같다.
황해도탈춤이 앞에서 열거한 여러 분포지역 중에서 특히≪八域誌≫(=≪擇里志≫)의 이른바 남북직로의 주요한 읍 및 장터인 황주·봉산·서흥·평산 등지에서 성행되었는데 이것은 앞에서 인용한 바 있는 董越의≪朝鮮賦≫에서도 볼 수 있었듯이 중국사신의 영사행사에도 동원되고, 관아의 경사에도 연희되며, 다른 군과의 탈놀이 경연에는 5월 6일부터 8일까지의 사흘간 해주감영에 나가서 놀았고, 그 고장의 세시놀이로 5월 단오에 크게 놀았다. 이러한 황해도의 주요한 읍들은 관아뿐만 아니라 농산물과 수공업 생산물의 교역지이며, 탈춤공연을 뒷바라지할 만한 경제적 여건을 갖춘 고장이었다. 그리하여 연희자들은 대대로 내려오는 이속(집사·장교 등)들이 중심이 되어 놀았고, 후대에 내려올수록 중류 이상의 상인들이나 한량들 그리고 기생도 참가하게 되었다. 향리들이 중심이 되어 놀았기에 사회적으로도 그렇게 천시되지 않았고, 연희자로 참가하려면 이속 외의 사람들은 입회비를 내야 했다고 한다. 오늘날 전해오는 봉산탈춤의 대사는 어느 가면극보다도 한시구절의 인용이 많은데 황해도 민요인 엮음愁心歌와 판소리 등에서 차용한 것이 많다.
그 놀이의 내용은 경기지방의 놀이와 대동소이하다.
과장은 크게 7과장으로 나누어, 제1과장 사상좌춤, 제2과장 팔목중춤, 제3과장 사당춤, 제4과장 노장춤, 제5과장 사자춤, 제6과장 양반춤, 제7과장 미얄춤 등이 된다.
봉산탈춤은 결국 목중·노장·양반·미얄과장의 독립된 네 마당의 놀이에 사당춤·사자춤·원숭이놀이가 곁들여 전체를 구성하고 있다. 그러나 전에는 양주별산대놀이와 마찬가지로 제2팔목중춤과장에「법고놀이」가 있었고, 제6양반춤과장에「포도부장」이 나오기도 하였다니 동일한 산대도감계통극임을 더욱 확증한다고 하겠다.
단오의 명절놀이로 연희되던 이 놀이는 상좌춤으로 시작하여 끝 장면에서 굿으로 끝나며, 벽사의식의 마지막 절차로서 탈을 모닥불에 던져 불사르는 燒祭가 있었다. 연희자들의 말에 의하면 탈을 불사르는 것은 탈이 부정을 타지 않게 한다는 뜻과 함께 풍년을 빌고 동네의 무사를 빌기 위해 제물로 바쳐지는 것이라고 한다. 탈놀이를 놀면 그 해에 마을에 병이 없고 풍년이 든다고 했고, 또 탈을 문에 걸어 잡귀가 침범하지 못하게 하는 민속이 있어 왔다.
황해도탈춤의 내용 역시 산대도감계통극의 하나로서 파계승놀이와 양반말뚝이놀이 그리고 미얄과 영감놀이가 주된 내용으로 경기지방의 탈놀이의 주제와 거의 동일히다. 탈은 종이탈로 봉산탈춤의 경우 34역이 등장하나 겸용이 있어 26개가 사용된다. 이상에서 황해도탈춤 중에서 봉산탈춤을 예로 들었으나 이 밖의 강령탈춤과 은율탈춤이 남한에 전하고 있으며 탈과 의상이 제각기 다르나 놀이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봉산탈춤은 1967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17호로 보유자는 梁蘇云 등 5명, 강령탈춤은 1970년에 제34호로 보유자는 金實子 등 3명, 은율탈춤은 1978년에 제61호로 보유자는 金春信 등 3명이 각각 지정되어 그 전수에 힘쓰고 있다.
다) 영남지방의 오광대와 야류873)현지에서는 ‘들놀음’ 또는 ‘야류’라고 하는데 야류의 漢字借字는 野遊로 쓴다.
오광대 및 야류(들놀음)는 경상남도 일대에 분포된 탈놀음으로 산대도감 계통극의 영남형이라 할 수 있으며, 낙동강변인 草溪 밤마리(栗旨)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오광대는 밤마리 장터에서 대광대패들에 의하여 시작되어 점차 각지로 전파되어 新反·의령·진주·산청·함안·창원·통영·고성·鎭東·김해·駕洛·수영·동래·부산진 등 거의 경남 내륙과 해안 일대의 각지를 망라하게 되었으나 각지에서 이 놀이를 받아들인 연대와 경로는 제각기 다르다.
오광대와 야류도 그 고장의 향리의 주재하에 명절놀이로 놀아 왔고, 그 연출형태도 다른 가면극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춤이 주가 되고, 재담(대사)과 노래와 동작이 곁들여 연기되는 탈춤놀이이다. 그 춤은「덧배기」춤이라 하여 지방적인 특색을 보인다. 오광대의 과장별은 통영과 고성오광대는 5과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그 밖의 고장의 탈놀이는 대체로 5과장 내지 7과장으로 되어 있어 차이가 있다. 지방에 따라 과장에 이처럼 다소의 차이가 있으나 그 주된 내용은, ㉠ 벽사의 의식무(五方神將舞), ㉡ 양반에 대한 모욕, ㉢ 파계승에 대한 풍자, ㉣ 一夫對妻妾의 갈등에서 오는 가정비극, ㉤ 逐邪延祥의 축원(사자춤)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영남가면극에서는 경기지방의 가면극이나 황해도의 탈춤에서처럼 파계승에 대한 풍자가 비교적 약한 반면 양반에 대한 반감과 조롱은 한국가면극 중에서 가장 우심한 바가 있다.
오광대와 야류의 가면들은 바가지탈과 종이탈이 섞여 있으며 말뚝이나 사자 같은 큰 탈은 대나무 소쿠리에 종이를 발라 채색하기도 한다. 통영오광대에 사용되는 가면의 종류를 예로 들어보면 문둥이양반·홍백가양반·비틀양반·곰보양반·검정양반·조리중·원양반·둘째양반·말뚝이·팔선녀·영노·비비양반·할미영감·할미·제자각시·상좌·봉사·작은상제·큰상제·몽돌이·포수·담보·사자까지 모두 29개가 사용된다.
통영오광대 놀이마당은, 제1과장 문둥탈춤, 제2과장 풍자탈놀이(양반과 말뚝이놀이), 제3과장 영노탈놀이, 제4과장 농창탈놀이(영감·할미·제자각시의 삼각관계), 제5과장 포수탈놀이(사자춤)이다.
통영오광대는 1964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6호로 보유자는 李基淑 등 4명, 고성오광대는 1970년에 제7호로 보유자는 李允純 등 3명, 가산오광대는 1980년에 제73호로 보유자는 金五福 등 3명으로 각각 지정되었다. 수영야류는 1971년에 제43호로 보유자는 尹守萬 등 4명, 동래야류는 1967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18호로 보유자는 文章垣 등 6명이 각각 지정되었다.
라) 북청사자놀음
북청사자놀음은 함경남도 북청군내 각 마을에서 놀던 세시행사의 하나로 해마다 음력 정월 14일 밤 시작한 사자놀음은 15일 새벽까지 놀고, 16일 이후는 초청받은 유지가를 돌며 논다. 퉁소·장고·소고·북·꽹과리 반주로, 사자와 사령·꺾쇠·양반·무동·사당·꼽새춤꾼과 기타 잡패들이 한패가 되어 집집마다 돌아다니는데, 먼저 그 집 마당에서 亂舞를 하고, 사자는 안마당을 거쳐 안방문을 열고, 큰 입을 벌리고 무엇을 잡아 먹는 형용을 하고, 다음에는 부엌에 들어가서 전과 같이한 후에 다시 안마당에 나와서 활발하고 기교적인 춤을 춘 후 전원보다 먼저 퇴거한다. 이 때 주인의 청에 따라 부엌의 조왕과 시렁 앞에 엎드려 祖靈에게 절도 한다. 또 아이를 사자에게 태워 주면 수명이 길다고 하여 태워 주기도 하고, 사자털을 몰래 베어다 두면 수명장수한다는 속신이 행하여지기도 하고, 또 수명장수를 빌어 5색 천을 사자몸에 매어 주기도 하였다.
현재 행하여지고 있는 북청사자놀음의 순서는 퉁소와 북에 의한 반주와 애원성 노래에 맞춰 애원성 춤을 춘다. 애원성 춤에 이어 마당놀이로 양반과 그 하인 꺾쇠가 나오고, 악사들이 뒤따른다. 양반이 사당춤과 무동춤, 꼽새춤 등을 불러들여 한데 어울려 한참 놀게 한 다음 사자를 불러들인다. 사자가 한참 여러 가지로 춤추는 재주를 부리다가 기진하여 쓰러진다. 처음에 대사를 불러 반야심경을 외우나 그래도 사자가 움직이지 않으니 의원을 불러들여 침을 놓으니 사자가 다시 일어난다. 굿거리장단에 맞춰 사자춤이 다시 고조되고, 사당춤, 상좌의 승무가 한데 어울린다.
현존하는 민속극에서 사자춤이 들어 있는 것은 봉산탈춤과 수영야류와 통영오광대인데, 이들 사자춤은 간단하여 앉아서 좌우로 머리를 돌려 이도 잡고 꼬리를 흔들며 몸을 긁기도 하고, 타령이나 굿거리장단에 맞추어 덩실덩실 춤을 추기도 한다. 북청사자는 앞채 사람이 뒤채 사람 어깨 위에 올라타고 높이 솟기도 하고, 앞사람이 먹이인 토끼를 어르다가 잡아 먹는 과정을 흡사하게 연기하기도 하여 어느 사자춤사위보다도 교묘하고 또 힘찬 동작이 특징적이다.
북청사자놀음은 백제의 伎樂, 고구려의 舞樂, 신라의 五伎 이래로 불교와 더불어 전래한 대륙계, 북방계인 사자무가 민속화된 예능의 대표적인 예로서 그 특징과 더불어 귀중한 전승예능이다. 북청사자놀음에 쓰이는 탈은 사자가면 두 개와 양반·꺾쇠·사령·꼽추이며, 기타 등장인물들은 가면은 없이 복색만 갖추고 나온다.
북청사자놀음은 황해도탈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북 5도의 월남민들에 의해 남한에 전해졌으며, 1967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고, 현재 田光石 등 5명이 예능보유자로 있다.
마) 꼭두각시놀음
우리 나라 가면극의 대부분이 반농반예이거나 반상반예의 비직업적인 연희자들에 의하여 계승되어 온 데 비하여 꼭두각시놀음은 굿중패 또는 남사당이라고 불리던 직업적인 유랑연예인들에 의하여 연희되어 왔다. 앞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그들은 조선 후기 이래 1920년대까지도 우리 나라의 농어촌을 돌아다니며 민중오락을 제공하여 왔다. 그들의 레퍼토리는 재인·광대의 가무백희의 전통을 이어왔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의 탈춤인 덧뵈기나 꼭두각시놀음의 대사는 다른 가면극에 비하여 더욱 날카로운 풍자와 패러디를 보여주고 있다. 연희자들은 그들의 꼭두극(인형극)을「덜미」라고 부르나 일반적으로 박첨지놀음·꼭두각시놀음·홍동지놀음 등으로 부르며 모두 꼭두(인형)의 명칭에서 유래된 명명이다.
우리 나라의 꼭두극은 고구려나 신라 등의 삼국시대에 이미 대륙으로부터의 영향을 받았다. 그것은 중국을 거치거나 혹은 직접 북방루트로 하여 수입된 西域樂의 일종이라고 생각된다. 중국의 꼭두극은 한나라 때 서역에서 전래된 듯하다고 하며, 傀儡者(꼭두조종자)가 중국에 들어온 것은 전한 말에서 후한(1∼2세기)경이며, 중앙아시아 방면의 유랑연예인이 중국에 들어오고 그 일부가 7∼8세기경까지 한반도를 거쳐 일본에까지 건너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한다. 더 구체적인 의견으로는 이 괴뢰자는 인도 북서부에서 발생한 집시의 무리가 서역지방을 거쳐 중국·한국·일본으로 도래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꼭두각시놀음 극본은 몇 개의 채록본이 있으나 어느 극본에 있어서나 공통된 내용은 대체로 가면극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첫째 무속적 문화요소의 잔존, 둘째 파계승에 대한 풍자, 셋째 일부처첩의 갈등과 서민층의 생활상, 넷째 양반의 횡포와 그 형식적 도덕에 대한 폭로와 조롱, 다섯째 내세의 명복을 기원하여 불교에의 귀의 등을 7막 내지 8막으로 나누어서 앞에서와 같은 주제를 각각 다루고 당시의 사회상과 인간상을 보여주고 있다.
꼭두각시놀음의 순서를 南雲龍구술본에 의하여 적어 보면 아래와 같다.
먼저 서막으로 장고·북·꽹과리·호적으로 타령과 굿거리 등의 반주음악에 맞춰 全幕에 나올 꼭두를 차례로 포장 위로 내보내 소개한다. 제1막은 박첨지의 자기소개와 인사말, 제2막은 상좌중춤, 제3막은 본처인 꼭두각시와 박첨지와 첩인 용산 삼개돌모리집(<사진 2>), 제4막 이심이, 제5막 작은 박첨지, 제6막 동방삭, 제7막 표생원, 제8막 깜백이, 제9막 길닦기, 제10막 평안감사 매사냥, 제11막 평안감사상여, 종막으로 절짓기에 이어 박첨지의 뒷인사말로 끝난다.
우리 나라의 꼭두극에 쓰이는 꼭두는 박첨지·꼭두각시·홍동지·홍백가·소무당·돌모리집·상좌·평안감사·상제·이심이·새·마을사람 이 밖의 상여·만사·법당 등을 소도구로 사용한다.
꼭두각시놀음은 남사당놀이의 하나로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제3호)로 지정되고(1988, 남사당놀이로 명칭변경) 현재 예능보유자는 朴季順·南基煥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조선 후기의 가면극과 꼭두극의 전승을 살펴보았으나 판소리五歌가 점차 양반유식층의 애호를 받아 춘향가는「烈女」, 심청가는「孝子」, 흥보가는「兄弟友愛」, 수궁가는「忠臣」, 적벽가는「戰爭과 勇猛」등 유교덕목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극본이 정리되어 간 데 비해 가면극과 꼭두극은 끝까지 서민들에 의해 그들의 비판정신을 보여주는 서민들의 놀이로서 시종하였다.
19세기 말엽과 금세기 초두의 개화기의 연희는 당시의 신문이나 외국인들의 기록에 의하면 궁중과 고관들은 歌童舞妓의 妓樂과 광대의 판소리를 宴樂에 사용하였고, 민간에서는 광대의 판소리와 재인들의 줄타기, 땅재주, 그 밖의 곡예와 꼭두각시놀음, 무동놀이, 산두놀이(산대도감극) 등이 흥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가운데 광무 6년(1902)년 12월 우리 나라 최초의 옥내 상설극장이요 황실극장격인 協律社가 개장되고 융희 2년(1908)년에는 원각사극장이 개장되어 신극사의 첫 페이지가 열리게 되었다.
<李杜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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