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초에 유럽인들이 동아시아 해역에 진출했으나 중국이나 일본과의 정식교역은 미미한 것이었고 밀무역이나 해적행위가 주였다고 생각된다. 이는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양국의 海禁정책이 그 주된 원인이었다. 그러나 그후 중국에서는 국내가 안정됨에 따라 생산이 증가되고 物資유통이 활발하게 되자 해외통상 요구가 필연적으로 일어나고 연해지역 주민간에는 해외밀무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포르투갈인이 중국해역에 나타나서 浙江·福建·廣東近海에서 밀무역을 시작하자 중국인들도 이에 합류하여 해외로 밀항하는 자가 점차 증가하였다. 특히 한 동안 수그러졌던 왜구활동이 다시 증가하였는데 이때 왜구라고 불려진 해적의 태반이 중국인이었다. 그들은 일본 해적들과 함께 중국 연해지역뿐만 아니라 동남아 각지에까지 횡행하였다.
1644년 중국에서는 명조가 멸망하고 청조가 이를 이었다. 명청 교체기의 국내 전란에도 불구하고 중국 상인들에 의한 일본과 동남아 무역은 계속되었다. 한편 명조가 항복한 후에도 해적 출신인 鄭芝龍, 成功 부자는 강력한 船團을 이끌고 臺灣과 福建省 지역에서 계속 청조에 항거하였다. 청조는 이를 정복하기 위하여 1656년에 중국인의 해외도항과 무역을 금지하고 1661년에는 遷界令을 선포하여 중국 동남부 연해지역 주민을 내륙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해상교통을 전면적으로 차단하였다. 이 大陸封鎖令이 성공하여 1683년에 정씨 집단이 항복하고 이에 따라 천계령도 철회되었다. 뒤이어 1685년에 康熙帝는 해금을 해제하여 중국 상인들의 해외도항과 외국 선박의 중국 來航을 허용하였다. 이 획기적인 일대 英斷으로 비로소 西方諸國과의 무역이 정식으로 인정되어 근세 중서무역 발전의 기틀이 구축되었다.
청조의 해금 해제와 함께 寧波·厦門·廣州 등 동남부 연안 各港에 유럽과 동남아시아 각지에서 상선이 내도했으나 점차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광주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 결과 청조당국은 1757년에 유럽과 동남아시아 무역을 광주 一港에 한정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리하여 1842년 南京조약에 의하여 5개 항이 개방될 때까지 광동 무역제도가 지속되었다. 광동 무역은 청조의 감독 하에 이루어진 중서간의 독점 민영무역이었다. 청조측에서는 兩廣總督과 廣東巡撫의 총괄적인 감독 하에 粵海關 監督이 이를 관장하였다. 이들의 감독 하에 직접 무역에 종사한 것은 廣東 十三行으로 불려진 민간 貿易商社인 洋行들이었다. 양행은 거액을 정부에 납부하고 광주에 내도 하는 유럽상인들과의 무역의 독점권을 취득한 상인 조직이었다. 이를 통칭 십삽행이라고 하였으나 그 수는 반드시 일정한 것은 아니고 대충 十三社 전후였다.
한편 유럽상인들도 각자 정부에서 동방무역의 독점권을 취득하여 이른바 東印度會社를 조직하여 廣東貿易에 종사하였다. 이들은 광주에 상주한 것이 아니고 청조가 정한 데로 매년 10월부터 다음해 1월까지 광주에 있는 商館에 머물면서 양행들을 상대로 교역을 하였다. 교역기간이 끝나면 전원이 마카오로 철퇴하거나 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광주에는 가족을 데리고 올 수 없었으며 특히 여자들의 도래는 엄금했다. 또 광주에서는 상관을 떠날 수 없었으며 일상생활에서 철저한 통제를 받았다. 광동무역 체제가 정비된 18세기 후반에는 많은 유럽국가와 미국이 이에 참가하였는데 모든 면에서 영국이 주도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015)廣東무역제도에 관한 대표적 硏究는 梁嘉彬,≪廣東十三行考≫(上海:商務印書館, 1937)가 있다.
이에 앞서 일본의 토쿠가와막부는 이미 17세기 전반에 엄중한 쇄국정책을 시행하여 유럽과의 무역을 나가사키(長崎) 일항에 제한하고 교역상대는 네덜란드(和蘭) 일국에 한정하였다. 그 규모는 광동무역에 비하여 훨씬 적었다. 나가사키항 내에 人工 섬에 있는 상관에 화란 동인도회사 사원 수명이 상주하고 있었으나 이들 역시 가족을 동반할 수 없었으며 자유로운 외출이나 여행은 엄금되었다. 화란 상선의 도래는 일년에 1, 2차에 제한되었고 그 수는 매번 수 척에 불과했다. 따라서 무역량도 미미한 것이었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나가사키에 있던 화란 동인도회사의 商館長은 5년에 한차례 에도에 가서 將軍에 배알하고 貢物을 獻上하는 의무를 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나가사키 무역도 광동무역과 같이 동아시아적 ‘조공’무역 성격이 짙었다. 나가사키에는 막부의 묵인 하에 많은 중국 상인들이 도래하여 일부는 그곳에 상주까지 하였다. 또 매년 나가사키에 도래한 화란상선은 수 척에 불과했으나 중국상선은 그 수십 배가 되는 70∼80척에 달하였다. 이로 보아 토쿠가와 정권의 쇄국정책은 주로 유럽 국가가 그 대상이었다는 것과 화란과의 무역이 일본을 위하여 경제적으로 그다지 큰 비중을 갖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016)토쿠가와시대 초기 나가사키 貿易제도의 연혁에 관하여는 中田易直,<十七世紀初頭の對外交涉>(沼田次郞 編,≪日本と西洋≫, 東京:平凡社, 1971), 97∼168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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