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1. 개항 후의 국제무역
  • 2) 국제무역의 추이(1876∼1894)
  • (2) 일본의 독점무역기(1876∼1882)

(2) 일본의 독점무역기(1876∼1882)

 1876년 부산에 이어 원산(1880년), 인천(1883년)의 순으로 개방된 개항장은 무역에 종사하는 국내외 상인이 모여 들어 자본이 집중 투하되고 무역을 보조하는 교통·금융·통신 등 근대적인 유통수단을 정비하면서 기존의 한성·대구·평양 등 대시장을 압도해 나갔다.

 반면, 육로를 통한 조청무역은 1년 평균 300∼400만원이던 것이 1870년대 말부터 해마다 감소하여 1883년에 이르러서는 120만원 미만으로 쇠퇴하였다.0265)≪通商彙編≫명치 17년, 釜山港之部, 242쪽. 이처럼 조청무역이 쇠퇴한 데는 몇 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 개항장무역이 무간섭, 무관세, 선박에 의해 자유 신속하게 이루어짐에 따라 저렴한 가격을 유지한 데 반하여 조청무역은 정부의 간섭, 고율과세, 隊商 형식의 운수였기 때문에 상품가격이 비쌀 수 밖에 없었다.

 둘째, 보다 근본적인 원인으로서 두 무역로의 질적 차이가 있었다. 육로를 통한 조청무역의 경우 수출품목은 인삼·종이 등 조선특산품 이외에 중국이 요구하는 상품을 발견하기가 곤란하였고 수입품은 전품목에 걸쳐 사치품의 성격이 농후하였다. 반면 조일무역은 광범한 수출시장을 가짐과 아울러 일반 민중을 상품경제에 편입시키면서 전개되고 있었기에 조청무역을 압도할 수 있었다. 이 경향은 개항장이 늘어남에 따라 더욱 가속되었다. 예를 들어 원산의 개항은 부산과의 거리적 관계 때문에 주저하고 있던 북방상인의 조일무역 참가를 촉진하였다.

 이처럼 조선상인의 교역 대상이 육로를 통한 조청무역으로부터 개항장을 통한 조일무역으로 변모하고 있었던 것은 정부와 특권상인의 결합에 의한 구래의 시장통제의 해체를 의미하는 동시에 조선상인이 일본상인의 개항장 독점체제에 편입되는 것을 의미한다.0266)姜德相, 앞의 글, 10∼11쪽.

 한편, 이 시기 대외무역의 추이를 살피는 데는 몇 가지 곤란한 점이 있다. 첫째, 1876년부터 1883년까지 대일무역은 무관세무역이었기 때문에 조선측에 통계가 없고 일본측이 일본 국내의 세관 및 區務所(일본의 미개항지 경우)와 부산의 일본 管理官廳에서 집계한 통계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일본측에서 정리한 통계들도 원자료의 성격에 따라 상이한 수치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정확하다고 할 수 없고 대체적인 추이만 파악할 수 있다.

 둘째, 대청무역은 서해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던 밀무역의 규모를 추산할 수 없는데다가 육로를 통한 정규무역도 1881∼1882년간의 자료밖에 남아 있지 않다.0267)姜德相, 앞의 글, 10∼14쪽. 이를 감안하면서 조선의 국제무역 추이를 보면<표 1>과 같다.

연도 총수입 총 수 출 대 일 무 역 대 청 무 역
상 품 사 금 수 입 수 출 수 입 수 출
상 품 사 금
1876       188 93      
1877       127 59 35    
1878       245 181 22    
1879       567 612 53    
1880       978 1,256 114    
1881 2,269 2,373 468 1,874 2,230 468 395 143
1882 1,852 1,931 529 1,562 1,769 529 290 162

<표 1>1877∼1882년간 조선의 대외무역 (단위:천円)

*출전:대일무역액은 梶村秀樹,<李朝末期の綿業の流通および生産構造>(≪朝鮮における資本主義の形成と發展≫(東京;龍溪書舍, 1977)):국역본,<이조말기 면업의 유통 및 생산구조>(梶村秀樹 외,≪한국근대경제사연구≫, 사계절, 1983), 108∼116쪽;高嶋雅明,≪朝鮮における植民地金融史の硏究≫(東京;大原新生社, 1978), 218쪽. 대청무역액은 姜德相, 앞의 글, 10쪽 참조.
*주:1881∼1882년간 조청무역액에는 인삼과 금은의 수출입액이 제외되어 있다. 당시 홍삼의 수출액만 추산하더라도 50∼100만원이 되므로 이를 추가할 경우 수출입 무역액은 도합 100∼150만원이 된다(姜德相, 위의 글, 12쪽).

 위 표에서 보듯이 조선의 국제무역은 일본이 독점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일무역액(수출입 합산)은 1876∼1877년 20만원대에 머물다가 1879년에 100만원을 넘고, 1880년을 경계로 300∼400만원으로 급성장하였다. 그리고 1880년부터 1882년까지 계속 수출초과를 유지하고 있는데, 이는 후술하는 품목별 구성에서 보듯이 곡물 수출의 급증으로 인한 것이었다. 반면 대청무역은 도표상으로는 1881∼1882년 2년간 수입초과 현상을 보이고 있지만, 이는 금은과 홍삼 수출액이 포함되지 않은 자료이므로 위 두 품목을 합산하면 역시 수출초과를 보이고 있는 셈이다.

연 도 수 출 수 입
총 액 우 피 섬 유 류 총 액 면 제 품
1876 93       10(11.5) 188 12( 6.2)
1877 59 2( 3.3) 4( 7.1) 55(92.8) 2( 1.2) 127 54(42.9)
1878 181 51(27.9) 25(14.0) 45(24.8) 19(10.4) 245 168(68.7)
1879 612 359(58.6) 99(16.2) 59( 9.7) 11( 1.8) 567 477(84.2)
1880 1,256 730(58.1) 119( 9.5) 193(15.4) 86(14.7) 978 768(78.6)
1881 2,230 381(17.1) 197( 8.8) 330(14.8) 162( 7.3) 1,874 1,495(79.8)
1882 1,769 21( 1.2) 311(17.6) 292(16.5) 216(12.2) 1,562 1,283(82.1)

<표 2>1876∼1882년간 주요상품별 대일수출입액 구성 (단위:천円, ( )안은 수출·수입에 대한 백분비)

*출전:하원호,<개항후 제국주의의 침탈과 경제구조의 변동(1876∼1894)>(≪水邨朴永錫敎授華甲記念韓國史學論叢≫下, 탐구당, 1992), 9쪽.

 이처럼 급성장한 대일무역의 품목별 구성은 어떠하였던가? 위의<표 2>에서 보듯이 수출은 쌀·콩·牛皮가 대종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이외에도 해삼·소라·멸치·포·건어 등 해산물과 생사·견포·솜·면포·마포 등 섬유류, 그리고 인삼이 수출되고 있었다.0268)姜德相, 앞의 글, 5∼8쪽.

 쌀 수출은 조선쌀이 수입쌀 중에서는 뛰어나게 품질이 좋아 일본인의 기호에 적합하다는 점, 일본쌀에 비해 극히 저렴한 점 등의 이유로 일본 자본주의 발전의 중심지였던 오사카(大阪)·고베(神戶) 지방에 집중되어, 공장노동자용의 값싼 미곡을 공급함으로써 일본자본주의 형성 발전에 기초를 제공하는 것이었다.0269)吉野誠,<朝鮮開國後の穀物輸出について>(≪朝鮮史硏究會論文集≫12, 朝鮮史硏究會, 1975), 37∼38쪽. 이 당시 일본은 조선의 값싼 쌀을 수입하는 반면 일본의 쌀을 고가로 런던의 미곡시장을 비롯한 유럽과 호주 시장에 수출하였다. 이로써 일본 국내의 지주에게는 고미가를, 자본가에게는 저임금정책을 보장하여 일본자본주의의 본원적 축적에 기여한 것이다.0270)김경태,<개항과 미곡문제의 구조>, 앞의 책, 71∼74쪽.

 쌀 수출량이 극심한 변동을 보이는 원인은 풍흉에 따른 수확량의 증감과 조선내의 정치사회적 변동 등을 들 수 있다. 1876∼1877년은 미증유의 대흉년이라 수출량이 적었을 뿐 아니라 이례적으로 일본산 쌀 3만 7천여 석(14만 4천원)과 보리 5천 2백여 석(3만 1천원)을 수입할 정도였다.0271)김경태, 위의 글, 59∼62쪽. 1878년부터 작황이 좋아져 수출이 조금씩 증가하기 시작하여 1879∼1880년에는 풍작인 데다가 일본의 米價가 급등하여 수출이 급증하였다. 1881년의 경우 수출은 어느 정도 진행되었으나 9월 이후는 흉년으로 말미암아 미곡 수출이 급감하였고, 1882년은 흉작이 아니면서도 군인폭동의 영향으로 수출이 격감하였다.

 이에 반하여 콩은 기후조건에 큰 영향을 받지 않고 일본에서의 수요가 증가하고 있었기에 수출량이 꾸준히 증가하였다. 일본인은 콩을 간장·두부 등의 원료로 사용하였는데, 조선산 콩이 값싸고 품질이 비교적 좋아서 그 수입을 조선에 의존하여 매년 콩밭을 뽕밭으로 바꾸는 자가 많아지는 등 콩의 생산량이 줄어들고 있었다. 반면 조선인 입장에서는 콩 수출의 이익이 높아 쌀의 흉작에 대비하여 점차 콩의 재배 면적을 넓히고 있었다.0272)하원호,<곡물의 대일수출과 농민층의 저항>(≪1894년농민전쟁연구≫1, 역사비평사, 1991), 245∼246쪽.

 우피는 이미 철종대부터 고종초에 걸쳐 私商都賈에 의하여 동래·의주 등 국경지방에서 정부의 금압에도 불구하고 수출되었던 품목이다.0273)한우근, 앞의 책, 19쪽. 특히 일본의 군비 확충이 진전됨에 따라 군화·배낭 등 피혁 수요가 증대되면서부터 중요한 수출품목이 되어 1881년부터 수출량이 급증하기 시작하였다.

 이들 세 가지 품목 외에 해삼·포·건어·김·멸치 등은 일본상인이 큐슈·호카이도産을 중화요리 재료로 중국에 수출하여 큰 이익을 올리고 있던 품목이다. 따라서 일본상인이 이들 조선산 해산물에 주목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당시는 가공 기술이 유치하여 양호한 수출품이 없었기에 일본상인은 조선상인에게 가공법을 가르쳐 중국으로 중계수출하려 한 것이었다.0274)姜德相, 앞의 글, 5쪽.

 생사·견포·솜·면포·마포 등 섬유류의 수출량이 상당히 보이지만, 이러한 섬유류 수출은 같은 시기 수입되는 외국제 면제품의 수입량에 비하면 1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비율이므로 주목할 만한 가치는 없다. 게다가 1884년 이후 섬유류 수출량은 더욱 감소하여 수출량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2%에 불과하게 되는 것이다.0275)梶村秀樹, 앞의 국역본, 116쪽의<표 3>.

 무역수지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앞의<표 1>에서 보듯이 이 시기에 금 수출량이 1877년 이후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점에 주목하여야 한다. 금은 면세품인 데다가 다른 물품에 비해 휴대·운반이 손쉽고 편리한 관계로 수출량 신고가 제대로 되지 않아 정확한 액수 파악이 어렵지만, 1876년의 흉년으로 일본에서 곡물을 수입하고 그 지불수단으로 수출되어 신고된 금의 양만 해도 1878년까지 약 8만 6천원에 달하고 있다.0276)김경태,<개항과 미곡문제의 구조>, 앞의 책, 65쪽. 이 글에서의 금 유출 통계가<표 1>보다 많은 것은<표 1>의 수치가 사금만 집계한 데 반해 이 글에 실린 통계는 사금 외에 금지금까지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수출액의 약 25%에 해당하는 높은 비중이다.

 이외에 신고되지 않은 금과 은의 양을 합하면 2년 동안 수출된 금과 은의 양은 30만여원에 달한다는 것이다. 금의 수출량은 다음 항에서 서술하듯이 일본정부의 국가적 정책에 의하여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증가하는데, 이는 조선의 화폐제도 확립을 저지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수입품목은<표 2>에서 보듯이 면제품의 비중이 압도적이었다. 1883년 전후 당오전 대량 주조를 위하여 구리·아연 등 금속의 수입이 급증한 적은 있지만 이는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할 뿐이었다. 이들 면제품은 모두 영국산 제품으로서 상해를 경유하여 수입한 것을 다시 조선에 중계수출하는 형태로 수입되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상인으로서는 중계무역에 들어간 추가부담(운송비·이자·換差額 등)을 줄이려면 가능한 한 빠른 시일 안에 팔아버려야 했으므로 큰 이윤을 남길 수 없었다. 이러한 사정에서 일본상인이 면제품류를 수입한 것은 단순히 그 판매를 통한 이윤 획득보다 그 판매 대가로 곡물을 매집하여 수출하려는 데 의도가 있었다. 즉 면제품류의 구입원가와 일본시장에서의 곡물 판매가격의 차이에서 이익을 내는 것이었다.

 수입면제품 중 가장 큰 비율을 차지했던 것은 生金巾(canequin)0277)생금건은 포르투갈어 canequin의 번역어로서, 공장제 공업제품으로 가장 기본적인 平織 면포이다. 조선에서는 唐木·洋木 혹은 廣木이라고도 불리었으며 겨울옷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寒冷紗0278)얇고 거친 기계제 면포로서 여름옷 제조에 사용되었다.의 두 종류로 양자가 항상 섬유제품 수입액의 50% 이상을 차지하였으며, 1887년 당시 이 두 품목은 어떤 산간 벽지에도 보급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의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이들 두 품목은 아직 사치품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하층의 직접생산자층까지 구매하지는 못하고 하급관료층·도시중인층·상인층, 지방관청의 서리층, 나아가 농촌의 신흥상인층이나 지주·부농층이 구매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0279)梶村秀樹, 앞의 책, 128∼129쪽.

 따라서 이 시기 무역의 기본적인 구조는 조선이 일본에 대해 쌀·콩 등 곡물과 우피를 수출하고 일본은 영국 면제품을 중계수출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는 1883년 청이 중요한 무역 상대국으로 등장한 이후에도 청일 양국 상인의 경합 관계 속에서 더욱 확대되면서 정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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