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취회는 1890년대 초에 전개된 최초의 교조신원운동이라는 점에서 주목되어 왔다. 또한 당시 동학교단을 이끌고 있던 최시형의 지도노선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집회로 인식되어 왔다. 기존 연구는 徐丙鶴·徐仁周 등이 최시형의 승인이 없이, 혹은 반대를 무릅쓰고 공주취회를 추진한 것으로 이해해 왔다.0591)기존 연구들은<海月先生文集>,<本敎歷史>,<侍天敎宗繹史>등 동학교단사에 근거하여 최시형이 1892년 7월에 徐仁周와 徐丙鶴이 제의한 敎祖伸寃運動 전개 요청을 거절하였다고 한결같이 주장하고 있다. 이같은 연구는 1871년 3월에 일어났던 寧海民亂 당시 李弼濟의 제의를 최시형이 적극 만류하고 가담하지 않았다는 주장과 맞물려 최시형을 더욱 ‘보수적인 인물’로 규정하는 바탕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근래들어 새롭게 발굴된 자료들은 최시형에 대한 그동안의 인식이 바로 잡아져야 한다는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최근에 발굴된 자료들에 의하면 최시형은 영해민란에도 적극 참여했으며,0592)관변측 자료인<嶠南公蹟>과 <寧海賊變文軸>, 교단측 자료인<崔先生文集道源記書>와<海月先生文集>등은 최시형이 1871년 3월의 寧海民亂에 적극 가담하였음을 분명하게 밝혀 주고 있다. 1892년 7월에 서인주와 서병학에 의한 교조신원운동 전개 요청 이후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즉, 최시형은 1892년 8월 21일 淸州 松山 孫天民家에 머물면서 忠州에 거주하는 辛司果에게 서한을 보내 40명의 ‘望碩之士’를 선발하여 그 명단을 가지고 9월 10일까지 직접 청주 松山 孫士文家0593)孫士文은 孫天民을 가리킨다. 士文은 손천민의 字이다.로 찾아오도록 지시하였다.0594)<神師의 遺墨>(≪天道敎會月報≫195, 1927. 3). 또한 1892년 8월 29일에는 호남좌우도 편의장 南啓天에게도 비슷한 내용의<輪照>를 하달하였다.0595)<1892. 8. 29 輪照>(≪海月文集≫,≪海月文集≫에 대한 상세한 해제는 앞에 소개한 朴孟洙의 학위논문에 실려 있다). 南啓天에게 보낸<윤조>역시 1백여 명을 선발하여 주소성명이 적힌 명단을 9월 5일까지 보내도록 지시하고 있다. 이같은 조치는 모두 공주취회가 열리기 직전에 이루어지고 있는 점에서 본격적인 교조신원운동의 전개를 위한 사전준비였다고 생각된다.
1892년 10월 서인주와 서병학은 재차 최시형을 찾아와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할 것을 요청하였다. 최시형 역시 수령과 이서 토호들의 침학에 시달리고 있던 교도들의 절박한 사정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0596)당시 최시형이 교조신원운동을 허락하게 된 배경에 대하여<天道敎創建史>는 “이 해 十月에 徐仁周 徐丙鶴이 또한 固請하고 諸道人이 亦是 指目을 견디지 못하야 굳게 伸寃함을 請한대 神師 이에 立義文을 지어 各地에 遍諭하시니(≪東學思想資料集≫貳, 135쪽)”라 하였고,<東學史>에서는 이 해 十月에 四方에 있는 道人들이 指目에 쫒기여 모여온 자 많아야 伸寃할 일을 請하는 자 많은 지라 先生은 이 여러 사람의 뜻을 쫒아 許諾을 하고 곧 입의문을 지어 효유하니(≪東學思想資料集≫貳, 426쪽)”라 하여 관의 탄압과 지목에 시달리던 하층교도들의 요구와 이에 부응한 서인주 서병학 등의 요청을 받아들여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할 것을 허락하였다고 하였다. 두 사람의 건의를 받아 들여 교조신원운동을 허락하는 立義通文을 하달하였다. 1892년 10월 17일 밤에 하달된 입의통문의 요지는 각 접주와 교도들에게 伸寃의 大義에 합력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따라서 1892년 10월에 전개된 公州聚會는 종래 알려진 것처럼 서인주·서병학 2인이 최시형의 허락없이 전개한 것이 아니라 최시형의 허락 아래 교단적 차원에서 추진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서인주와 서병학 등이 최시형의 허락을 얻어낸 까닭은 교주의 허락이 있어야 동학조직의 동원이 가능하고 많은 교도들을 동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伸寃의 大義에 적극 참여하라’는 최시형의 입의통문이 각지의 접주들에 하달된 후 충청감사에게 최제우의 신원을 호소하기 위한 公州議送所가 설치되었다.0597)‘公州議送所’에 관한 내용은 奎章閣에 소장된<東學書>, 동학·천도교측 자료인<本敎歷史>,<侍天敎宗繹史>등에는 없고 全北 扶安에 있는 천도교 호암수도원에 소장되어 있는『海月文集』에만 실려 있다. 立義通文이 도착된 후 각 地方 接主들이 취해야 할 행동지침을 담고 있어 주목된다. 이 내용에 의하면, 각 접주는 ‘誠德信義知事之道儒’를 인솔하고 공주의송소로 와서 淸州로부터의 명령을 기다려 처사를 하도록 지시하고 있다. 여기서 淸州는 최시형이 은거하고 있던 淸州 松山 손천민가를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손천민가에는 孫天民·徐仁周·徐丙鶴 등 신원운동 지도부가 왕래하면서 최시형의 명을 받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므로 공주취회에 참가한 각 접주 및 교도들은 최시형-손천민, 서인주, 서병학-공주의송소로 이어지는 명령계통을 따라 행동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공주의송소’에 모인 각 지방 접주들과 교도 1천여 명은0598)<時聞記>(≪東學農民戰爭史料大系≫2, 驪江出版社, 1994), 175∼176쪽. 10월 20일경0599)충청감사의 題音이 10월 22일에 나왔으므로 의송단자 제출일자를 10월 20일경으로 추론하였다. 교조신원을 요구하는 議送單子를 작성하여 충청감영에 제출하였다. 이 의송단자는 10월 17일 밤에 발송한 立義通文에서 최시형이 주장했던 동학교조 최제우의 신원을 요구하는 동시에 西學의 만연 현상 및 倭國之商의 부당한 행위를 비판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0600)원래 東學의 斥倭洋意識은 1860년에서 1863년 사이에 최제우가 지은 東經大全과 용담유사 등의 저작 속에 이미 드러나 있었다. 충청감사에게 제출된 의송단자에 나타난 西學과 倭商에 대한 비판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방금 서양 오랑캐의 學이 우리 나라에 들어와 뒤섞여 있고 왜놈 우두머리의 毒이 외진에 도사리고 있으니 망극할 일이며, 음흉하고 거역하는 싹이 임금님의 수레 바로 밑에서 일어나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절치부심하는 일이다. 심지어 왜놈 상인들은 각 항구를 두루 통하여 싸게 사서 비싸게 팔아 얻는 이익을 저들이 마음대로 하니 돈과 곡식이 마르고 백성들이 지탱하고 보전하기 어렵다. 心腹같은 땅과 咽喉같은 장소의 관세 및 시장세와 산림과 천택의 이익마저 오로지 바깥 오랑캐에게로 돌아가니 이것이 또한 우리들이 손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리는 바이다.”0601)<各道東學儒生議送單子>(≪韓國民衆運史資料大系:東學書≫, 驪江出版社, 1986), 64∼65쪽. 여기에 나타난 斥倭洋의식은 1892년 11월의 삼례취회에서, 그리고 1893년 2월 광화문 복합상소단계와 3월의 보은취회, 그리고 1894년의 동학농민전쟁 단계에서도 한결같이 강조된다. 왜양을 강하게 배척하고 동학금단을 구실로 한 전재수탈을 금해줄 것을 요구한 의송단자를 받은 충청감사는 10월 22일 “동학을 금하고 금하지 않는 것은 오로지 朝家의 처분에 달린 것이므로 監營에서는 단지 조가의 명령을 따라 시행할 뿐이므로 감영에 와서 호소할 일이 아니라”고 답변하였다. 그리고 10월 24일에는 각 군현 守宰들에게 동학을 금한다는 핑계로 討索하는 행위를 금하는 조치를 담은 甘結을 하달하였다.0602)위의 책, 68∼70쪽.
충청감사의 감결은 실제로는 기만적인 것이었지만 30년동안 탄압과 지목에 시달려 온 최시형으로서는 동학금단을 구실로 한 수령, 이서, 토호배들의 수탈행위를 금하겠다는 충청감사의 조치에 대하여 일정한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하였다. 충청감사 조병식에게<各道東學儒生議送單子>라는 청원서를 제출함으로써 시작된 공주취회는 집단적인 呈訴 형식 덕분에 희생자가 없었다. 비록 ‘敎祖의 伸寃’이란 원래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동학교도에 대한 관리의 탐학을 금한다는 甘結을 얻어냄으로써 동학교단 지도부는 상당히 고무되었다. 그리하여 최초의 신원운동인 공주취회는 이후 전개될 삼례취회를 비롯 광화문 복합상소, 보은취회 등 일련의 집회를 연달아 개최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 그 의의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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