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2. 동학농민군의 격전
  • 1) 관군의 남하와 황토현·장성전투
  • (4) 장성전투

(4) 장성전투

 영광·함평·무안을 거쳐 장성에 이르는 동안 가는 곳마다 승승장구하면서 달려온 농민군은 마침내 뒤쫓아 내려온 홍계훈의 경군과 장성에서 만나 접전을 벌였다. 이른바 장성 황룡촌 전투였다.

 농민군이 장성 월평촌에 진을 친 이틀 후인 4월 23일 뒤따라 장성에 도착한 홍계훈은 대관 李學承·원세록·오건영에게 농민군의 동정을 살피게 했다.0729)<양호초토등록>(≪동학란기록≫상), 172쪽. 선봉 이학승은 황룡강가에 집결하여 장터에서 점심을 먹고 있던 농민군을 선공함으로써 전투의 포문을 열였다.0730)≪오하기문≫, 90쪽;≪동학사≫, 122∼123쪽. 엉겁결에 공격을 받아 수십명의 사상자를 낸 농민군은 곧바로 삼봉에 올라가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이리하여 농민군과 경군의 대접전이 시작되었다.

 농민군은 황토현에서 전주감영군과 전투를 해 본 적은 있으나 조선 최정예부대와 싸우는 것은 처음이었다. 경군은 외국에서 수입해 온 쿠르프식 야포, 회전식 기관총, 모제르식 소총 등의 최신장비로 단단히 무장하고 있었다. 농민군은 각 고을을 점령하면서 지방군의 무기들을 접수하여 처음보다 무장이 강화되었다고는 하나 경군의 무기에 비하면 성능이 훨씬 떨어지는 재래식 무기에 불과했다. 그러나 장성 황룡강의 지형 지세를 환하게 익혀 둔 농민군들은 삼봉의 정상에서 학 모양의 진을 치고 관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포를 쏘아대는 관군 앞으로 장태가 수없이 굴러 내려갔다. 불을 뿜은 장태는 관군의 화력을 소모시켰고 이에 당황한 관군이 정신차릴 틈을 주지 않고 농민군은 장태 뒤에서 맹공격을 퍼부었다.

 장성 전투에서 농민군의 무기로 특기할 만한 장태는 원래 닭을 키우는데 쓰이는 닭구장태 만드는 법을 이용해 제작된 것으로 농민군은 이 장태 안에다 짚을 넣어서 불을 붙인 뒤 수백 개를 경군 쪽으로 굴려 화력을 모두 소모시키고 그 뒤에 농민군들이 따라 붙어 경군에 접근하며서 공격했다.≪오하기문≫에서는 장태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적은 위에서 아래로 관군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잠시 후 홀연히 커다란 대나무로 만든 통을 밀고 나왔는데, 둥그스럼한 닭의 집과 비슷한 것이 수십 개였다. 밖으로 창과 칼이 삐죽하게 꼽은 것이 고슴도치 같았고 아래에는 두 개의 바퀴를 달아 미끄러지듯 아래로 내려왔다. 관군은 총탄과 화살, 돌을 쏘았지만 모두 대나무 통에 차단되어 버렸다. 적은 대나무 통 뒤에서 총을 쏘며 따라오다가 고함을 지르며 뛰어들었다. 초토군의 진영은 멀리서 빤히 바라보면서 도와주지 못한 채, 그들이 사방으로 달아나도록 방임하였다.0731)≪오하기문≫, 90쪽.

 이미 죽음을 무릅쓴 농민군의 위세와 용기는 관군이 확보한 신식무기 앞에서도 주저함이 없었다. 경군은 영광쪽으로 길을 따라 퇴각하면서 신촌리 뒷산 까치골 능선에서 농민군과 마지막 접전을 벌였다. 이곳에서 최후의 항전을 벌였던 경군 대관 이학승이 전사했다.

 이 전투에서 농민군은 대관 이학승과 다수의 경군을 죽이고 대포 1문, 쿠르프식 기관포와 회전식 기관포 각 1문, 그리고 양총 다수를 노획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반면, 경군은 대관의 전사로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여 영광쪽으로 도망쳤다. 평소 경군들에게 오합지졸의 무리로 인식되어 왔던 농민군은 이제 더 이상 만만한 상대가 될 수 없었으며 그들의 용맹성을 직접 체험하면서 경군의 사기는 더욱 저하되었다. 이후 경군과 접전이 있을 때마다 농민군의 용맹성은 전국적으로 널리 퍼졌고 동학농민군은 信符를 지니고 있어 총탄을 맞지 않고, 또 맞아도 죽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로 그들의 용감성은 전설화되기도 하였다.0732)≪동학사≫, 122∼123쪽.

 장성 황룡촌 전투는 농민군과 정식훈련을 받은 정규군인 경군이 최초로 접전을 벌인 곳이었으며 이 전투에서 농민군이 대승함으로써 농민전쟁의 전개과정에서 또 다른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첫째는 왕이 파견한 경군을 이겨 내었다는 사실이 농민군의 의식에 커다란 진전을 가져오게 하였다. “처음 동학과 난민들이 어울릴 때는… 감히 드러내놓고 관군과 대적하지는 못하였으며,”0733)≪오하기문≫, 92쪽. 또 얼마 전 함평에서만 해도 농민군은 초토사 홍계훈 부대를 두고 “이 군대는 우리 主上의 명을 받고 내려온 사람들이므로 貪官들의 兵隊와 달라 결코 저항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싸움을 벌이면 우리들은 역적의 죄를 모면할 수 없습니다”0734)≪주한일본공사관기록≫1, 25쪽.라고 하여 아직 왕에 대해 직접 공격하는 것에 대해서는 유보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지만, 장성 전투를 통하여 이러한 의식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장성전투 승리 이후 농민군은 “王師를 가볍게 여기는 마음이 생겼고 멀리 달려서 전주에 이르렀다.”0735)≪謙山遺稿≫19,<金城正義錄>, 3쪽;정창렬, 앞의 글, 156쪽. 둘째로 장성전투 직전에 전라도의 농민군이 합류하여 대농민군부대를 이룸으로써 거괴와 정예가 다 모인 강력한 농민군 부대가 이루어졌고, 이러한 물리력을 배경으로 연래의 목적이었던 전주점령이 성사될 수 있었다.

 황룡촌에서 경군 대관 이학승을 뉘이고 대승한 농민군은 사기가 충천하여 기수를 전라감영이 있는 전주로 돌렸다. 갈재를 넘어 정읍·태인·금구·원평을 내달았다. 농민군에게는 오로지 ‘이 나라를 바로 잡아보겠다’는 보국안민의 의지와 확신이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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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농민전쟁 시기 농민군 및 감영군·경군의 진격로
제1차 농민전쟁 시기 농민군 및 감영군·경군의 진격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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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24일 장성을 출발한 농민군은 정읍을 거쳐 태인에서 하룻밤을 머문 다음 25일 원평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때마침 관군을 위로하기 위해 내탕금 일만냥을 가지고 서울에서 내려온 선전관 李周鎬와 수행원 두 명을 체포했다. 이에 앞서 왕의 윤음을 가지고 왔다가 장성에서 붙잡힌 초토영 종사관 이학응·배은환 등과 함께 이들을 원평 장터에서 참수했다.0736)<양호초토등록>(≪동학란기록≫상), 172쪽. 다음날인 26일 농민군은 경군이 뒤쫒아 북상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내 전주부를 향해 진격했다. 농민군은 원평에서 금구현아가 있는 금구쪽으로 나아가지 않고 오른쪽으로 길을 꺾었다. 농민군은 큰 길을 택하지 않고 다소 험하지만 지름길인 독배재를 넘어 전주성의 코앞인 三川에 도착하여 26일밤을 보냈다. 삼천에 진을 친 농민군의 바로 앞에 전주부가 그들의 충천한 사기의 함성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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