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군이 집강소를 설치한 것은 폐정을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가 주체적으로 개혁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 성장과 발전의 결과 7월 6일에는 집강소가 공인되었다. 관민의 타협·합작이라는 형태의 공인 아래서도 농민군 세력의 우세라는 배경에서 폐정개혁 사업은 더욱 본격화되었고 체계화되어 나아갔다.≪동학사≫에는 집강소의 폐정개혁 내용으로서 12개조가 기재되어 있다.0935)≪東學史≫, 126∼127쪽. 이 폐정개혁건 12개조의 실재여부 문제는 집강소 폐정개혁의 내용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고 따라서 갑오농민전쟁의 성격까지도 규정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여러 견해가 제시되었는데 그 윤곽을 알아보기로 한다. 전라도에는 “집강소가 설치되어 12개조의 프로그램에 의한 폐정의 개혁이 집행되었다”0936)강재언,<조선에 있어서 봉건체제의 해체와 농민전쟁(2)>(≪역사학연구≫177, 1954. 11), 18쪽.라고 하고 그 폐정개혁건 12개조는 5월 8일의 전주화약 때에 농민군이 휴전의 조건으로 제시하였고 정부에 의하여 수용된 것이라고0937)강재언,≪조선근대사연구≫(일본평론사, 1970), 181쪽. 추가하는 견해가 있었다.
폐정개혁건 “12개조의 조항은 봉건제의 부정에 관한 전봉준의 이념으로서 (중략) 구사회의 질서를 전복시키는 사상적 기반 위에 서는 것이며 낡은 이조사회의 질서를 전면적으로 개혁하려는 것이라고 하겠으며, 그것은 원리적으로는 근대사회 형성의 기본구조에 접근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0938)김용섭,<전봉준 공초의 분석>(≪사학연구≫2, 한국사학회, 1958), 34쪽.라고 하여 강령의 실재와 농민군에 의한 실천 의지와 시도를 인정하고 그 역사적 성격을 봉건제 부정·근대지향으로 정위하는 견해가 있었다.
이러한 적극적 평가에 반해 “동학 자체도 전주 패주 이후에는 그 세력이 쇠약되었다. 때문에 이무렵 ‘東學割據’의 지방에 일종의 자치기관은 나왔을 수도 있지만 이것이 전부 집강소라고 했을지 어땠을지도 의문이다. 이들 사실로 보아서 전주화약이라는 것은 상상의 산물임에 지나지 않고, 동학의 ‘폐정개혁안’이라는 것도 지어낸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0939)山邊健太郞,<甲申事變과 東學의 亂>(≪世界의 歷史 11-흔들리는 中華帝國-≫筑摩書房, 1962), 279쪽.라고 하여, 폐정개혁건 12개조는 물론이고 전주화약 때의 27개조 폐정개혁안까지도 ‘지어낸 이야기’로 파악하는 견해가 있었다. 山邊의 의문제출에 찬성하면서도, 전주화약 때의 27개조 폐정개혁안의 역사적 실재는 긍정하고, 그러나 폐정개혁건 12개조는 ‘지어낸 이야기’로 보는 견해가 있었다.0940)박종근,<갑오농민전쟁에 있어서 ‘전주화약’과 ‘폐정개혁안’>(≪역사평론≫140, 1962), 427쪽.
이러한 부정에 반하여 폐정개혁건 12개조 중 토지평균분작 조항에는 의문이 있으나 나머지는 “대체로 실제와 가까운 것”이고 “그 大綱은 실재 실시된 것으로 생각한다”0941)김용덕,<북학사상과 동학>(≪사학연구≫16, 한국사학회, 1963), 119쪽.라고 하여, ‘지어낸 이야기’ 설을 부정하는 견해가 있었다. 한편 “당시 집강소에서는 폐정의 개혁을 위한 행정의 요강을 공포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12개조항으로 알려져 있다. (중략) 그러나 동학군은 그들이 제시한 12개조항의 개혁요강을 실지로 시행하는데 있어서는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이 있었다”0942)한우근,<동학농민봉기>(≪한국사≫17, 국사편찬위원회, 1973), 127·129쪽.라고 하여 역시 ‘지어낸 이야기’설을 부정하는 견해도 있었다.
집강소의 12개조 폐정개혁요강의 실재를 부정하는 견해는 “무엇보다도 양반유생 황현이 갑오농민전쟁 직후에(거의 당시에) 쓴≪오하기문≫에 의하여 철저히 반박되고, 집강소와 그 폐정개혁요강의 실재가 잘 증명되고 있다”0943)신용하,<갑오농민전쟁 시기의 농민집강소의 활동>(≪동학과 갑오농민전쟁연구≫, 일조각, 1993), 215쪽.라고 하여 폐정개혁건 12개조의 역사적 실재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견해도 있었다.
그러나 ‘지어낸 이야기’설이 다시 제기되었다. 토지평균분작안은 “만주집단이주를 통해서까지 그토록 혁신적으로 실현해 보고자 했던 오지영 자신의 토지개혁방안이 아닐까”0944)노용필,<오지영의 인물과 저작물>(≪동아연구≫19, 서강대동아연구소, 1989), 94쪽.라고 하여, 12개조는 오지영의 ‘상상의 산물’이라고 하는 견해가 있었다. 오지영의≪동학사≫에 대하여, “역사소설이라는 관식사가 딸린 일종의 야사”로서 “믿어서는 안되는 자료”0945)유영익,<전봉준 의거론>(≪이기백선생고희기념한국사학논총≫하, 일조각, 1994;≪동학농민봉기와 갑오경장≫, 일조각, 1998), 17쪽.라고 하여, 12개조가 오직 그곳에서만 기술되고 있는≪동학사≫의 자료적 신빙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견해도 있었다. 이렇게 ‘지어낸 이야기’설이 다시금 제기되었다.
위에서와 같은 전면 긍정과 전면 부정을 종합하는 견해도 제기되었다. “12개조가 완전히 잘못된 것으로 볼 수는 없으며, 그 조항의 상당수가 실제 농민군들에 의해서 실천에 옮겨진 내용으로 파악해야 한다. 다만 12개조 모두가 전봉준과 김학진에 의해 하나의 강령으로서 문서화된 안건이 아니란 점이다. 이들 조항은 오지영이 당시의 농민군 활동과 폐정개혁의 내용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조문화한 것이란 점을 충분히 염두에 두어야 한다”0946)김양식,<1·2차 전주화약과 집강소 운영>(≪역사연구≫2, 역사문제연구소, 1993;≪근대한국의 사회변동과 농민전쟁≫, 신서원, 1996), 153쪽.라는 견해가 있었다. “12개조와 같은 명시된 폐정개혁정강은 없었다고 생각되지만 그 폐정개혁정강들은 집강소 시기의 정황을 상당히 잘 요약해서 보여주는 것들이다”0947)박찬승,<1894년 농민전쟁의 주체와 농민군의 지향>(≪1894년 농민전쟁 연구≫5, 역사비평사, 1997), 126쪽, 127쪽.라고 하는 견해가 있었다. “≪동학사≫의 폐정개혁안의 조목은 (중략) 역시 모두 의심스럽다. 그러나 이들 조목을 오지영에 의한 전적인 作爲의 산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똑 부러진 강령은 없었더라도 폐정개혁 12조목은 都察의 직임을 가진 오지영이 각 도소에서의 민중의 내적인 요구나 실제로 행해진 폐정개혁을 견문한 것에도 터전하여 기술된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0948)조경달,≪異端의 민중반란-동학과 갑오농민전쟁-≫, (암파서점, 1998), 212쪽.라고 하는 견해가 있었다. 앞의 세 견해는 똑 부러진 모습으로의 12개조 강령의 성립은 부정하면서도 그것이 집강소에 의한 폐정개혁의 역사적 내용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는 파악이다.
필자도 기본적으로는 주 138) 141) 142)의 견해에 동조한다. 그러나 필자는 김학진과 전봉준 사이에서 문서화하지는 않았지만 서로의 양해로서 묵인리에 합의된 사항들로서, 농민군이 실제로 시행한 개혁사업이나 장차 시행하려는 명시된 지향들 중의 일부를 오지영이 기술한 것이 12개조 폐정개혁건이라고 생각한다. 김학진은 왕명에도 복종하지 않으면서까지 양측의 협력·합력에 의한 지방질서 안정 위의 집강소질서라는 撫局을 유지하려 하였고, 전봉준은 7월 17일의 통문이나 8월 20일 무렵의 남원에서의 김개남·손화중과의 3자회담0949)≪梧下記聞≫2, 甲午 8月(≪叢書≫1, 210쪽).에서와 같이 국내정세·국외정세로 말미암은 국가적 위기 속에서 관민합작의 집강소 질서를 유지하면서 좀 더 정세를 관망하는 것이 농민군의 개혁사업을 위한 만전지책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전봉준은, 농민군의 우세한 실력에 밀린 마지못한 묵인에서일지라도 김학진의 동의를 전제로 하는 폐정개혁사업을 하였고, 농민군의 일방적 강행이나 일방적 선언의 폐정개혁사업을 하지는 않았다고 생각된다. ‘폐정개혁건 12개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道人과 政府와 사이에는 宿嫌을 蕩滌하고 庶政을 協力할 事
2. 貪官汚吏는 그 罪目을 査得하여 一一嚴懲할 事
3. 橫暴한 富豪輩는 嚴懲할 事
4. 不良한 儒林과 兩班輩는 懲習할 事
5. 奴婢文書는 燒祛할 事
6. 七斑賤人의 待遇는 改善하고 白丁頭上에 平壤笠은 脫去할 事
7. 靑春寡婦는 改嫁를 許할 事
8. 無名雜稅는 一幷勿施할 事
9. 官吏採用은 地閥을 打破하고 人材를 登用할 事
10. 外敵0950)‘○’으로 되어있는 것을≪東學史(草稿本)≫에 의하여 ‘外敵’으로 고쳤다.과 奸通하는 者는 嚴懲할 事
11. 公私債를 勿論하고 已往의 것은 幷勿施할 事
12. 土地는 平均으로 分作케 할 事
(1, 2 등의 번호는 인용자가 편의상 붙인 것임)
첫째, 뚜렷하게 드러나는 특징은 봉건적인 계서적 신분제도를 전면적으로 철폐하려는 원칙이었다. 제4조, 제5조, 제6조, 제7조, 그리고 제9조가 그것이었다. 제7조는 이미 상민층과 천민층에서는 관행화되어 있었던 것을 공식적인 제도화로서 재확인하는 것이었고, 제4·제5·제6조는 제1차 농민전쟁과 집강소 시기에 농민군에 의하여 실천되었던 것을 공식적 제도화로서 재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제9조와 함께 갑오개혁에서 국가의 차원에서도 제도화되었다. 따라서 봉건적인 계서적 신분제도는 집강소 질서하에서 철폐되었다고 생각된다.
둘째, 봉건적 정치형태를 개량하려는 원칙도 두드러지고 있다. 제2조와 제9조가 그것인데, 제2조 역시 제1차 농민전쟁과 집강소 시기에 농민군에 의하여 실천되었던 것을 공식적 제도화로서 재확인하는 것이었다. 제9조는 갑오개혁에서 국가 차원에서도 제도화됨으로써 집강소 질서하에서 봉건적 정치행태는 크게 개량되었다고 생각된다.
셋째, 경제관계에서의 봉건적 폐단을 개혁하려는 원칙이었다. 제8조와 제11조가 그것인데, 제8조는 교정청의 개혁에서도 확인되고 있고0951)≪日省錄≫, 고종 31년 6월 14일 ;≪續陰晴史≫上, 甲午 6月 21日條, 319쪽. 갑오개혁에서도 제도화되었다. 公私債의 勿施조항은 농민군측에게는 생활상의 절실한 문제였다. 부여 대방면에서 吳鳳龍은 李復榮으로부터 1888년에 租 10斗를 빌려서 1893년에 원리금 합하여 4石의 租를 갚았는데, 집강소 질서하에서 吳는 4石租의 반환을 요구하였고 결국 1894년 10월에 이복영은 4石租를 반환하고 있다.0952)홍성찬,<1894년 집강소기 設包下의 향촌사정>(≪동방학지≫39, 연세대국학연구원, 1983), 88∼89쪽에서 재인용. 충청도 태안에서는 집강소 질서하에서 平民이 양반에게 20년전에 갚은 400金의 반환을 요구하였고 양반은 그것을 반환하였다.0953)≪김약제일기≫3, 갑오 7월 27일(≪叢書≫3, 72∼73쪽). 역시 태안에서 琴峴의 張淸一은 入道하고나서 전에 갚은 원리금을 모두 반환하기를 양반 債主에게 요구하였으나 그 양반 채주가 乞免함에 포기하고 있었다.0954)위의 책, 갑오 8월 1일, 74쪽. 충청도에서 이러하였으니까 농민군의 우세가 더욱 현저하였던 전라도 지역에서는 위와 같은 경우가 더 많았다고 짐작된다. 그러나 역시 부여 대방면의 집강소의 接司는 國典의 자모정식법에 준거하여 고리채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고 있었는데0955)홍성찬, 앞의 글, 89쪽. 이러한 경우도 많았으리라고 짐작되며, 특히 고리채 문제는 지역에 따른 농민군의 지배력에 따라 편차가 많았으리라고 생각된다. 이상과 같이 집강소 질서하에서 경제관계에서의 봉건적 폐단도 일정하게 개혁되었다고 생각된다.
넷째, 횡포한 부민을 응징함으로써 均産의 이념을 실현하려는 원칙이었는데 제3조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는 농민군에 의하여 제1차 농민전쟁과 집강소 시기에 실천되고 있었던 현상이었다.0956)오지영은 집강소 질서하에서는 “또는 부자나 양반이나 그 죄과를 懲習하는 일방”(≪동학사≫, 152쪽)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무조건적인 富民응징이거나 富民으로부터의 討財는 아니었다. 그것은 富民도 이미 농민전쟁에 동조층으로서 참여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증명되고 있다. 예컨대 “中流 이하의 民은 이번의 소란에 오히려 돈벌이의 기회가 열림을 반겨하였지만, 上流의 재산가로서 평소 사람들에게 인심을 잃었던 자들은 풍성학려하여 약탈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아무데로나 도망하는 자가 많았다”라는 보도가 있고,0957)≪조선변란실기≫, 26쪽. 信夫淸三郞,≪增補 日淸戰爭≫(南窓社, 1970), 25쪽에서 재인용. 충청도 홍주에서는 농민군 활동기의 절정기에서도 평소 潤産을 도모하지 않고 待客과 賙貧에도 힘을 기울였던 宋氏家에는 농민군들이 서로 경계시키면서 침입하지 않았다는 견문기사도0958)洪楗,≪洪陽紀事≫,<亂中記聞>(≪叢書≫9, 198쪽). 있음에서 그렇게 생각된다. 이 제3조의 원칙은 김학진의 입장에서는 현실적으로 수용하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상대적인 열세로 말미암아 부득이 양보함으로써 집강소 질서하에서 봉건적·관료적 특권에 의한 부축적은 크게 제약되었고 동시에 그런 방법에 의하여 부를 축적한 봉건적·관료특권적 부민은 크게 奪財당하였다고 생각된다.
다섯째, 外敵 구체적으로는 일본과 간통하는 자는 응징한다는 민족적 원칙이었다. 농민군은 3월 25일의 4개 名義0959)≪大韓季年史≫上 , 74쪽. 이래 斥倭의 원칙을 일관되게 견지하였다. 그러나 농민군은 일본의 조선진출을 식민지화의 위기로는 인식하지 않았고,0960)公州儒生 李丹石은 “곳곳에서 봉기하니, 봉기하지 않은 고을이 없었다. 모두 斥倭를 명분으로 하지만 실은 火賊이었다”라고 하였고(≪時聞記≫甲午條,≪叢書≫2, 177쪽), 일본인 기자는 “洋夷倭奴를 斥攘해야한다고 부르짖지만 이것은 구실일 뿐이고 실은 정부를 전복하여 혁신하려는 데에 목적이 있다”라고 보도하였다(≪東邦協會報告≫38회, 명치 27년 6월 27일 보고, 95쪽). 6월 21일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사건도 식민지화의 결정적 위기로까지는 인식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0961)전봉준은 제2차 재판에서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사건을 ‘侵掠我國境土’ 즉 식민지화의 위기로 인식하면서 그것에 대한 대처에 골몰하였다(≪전봉준공초≫, 538쪽). 8월 11일 전봉준은 전주에서의 일본인과의 회견에서,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사건 이후 “우리는 일본의 행동, 대원군의 행동을 아직 자세히 몰라서 안심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힘써 동지들의 분격을 가라앉힘과 동시에 우리 정부의 동태를 알려고 하고 있다”라고 말하였다(≪日淸交戰錄≫12, 명치 27년 10월 16일(음력 9월 18일), 42∼43쪽). 8월 17일의 일본군의 평양전투 승리 이전에는 청일간의 우열이 분명치 않았고, 일본의 한국제압도 극히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농민군의 최대·최고의 목적은 폐정개혁이었고 집강소 공인시기의 단계에서는 봉건적 모순의 근본적 해결이 최우선의 과제였다. 그 과제를 온전하게 수행하기 위한 여건으로서의 斥倭였다고 생각된다.
개화파 정권도 일본에 의하여 장악되어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김홍집은 평양의 淸陣에 편지를 보내어 청일전쟁의 승패결과에 대비하면서 조선의 局外中立을 구상하고 있었고,0962)伊藤博文編,≪朝鮮交涉資料≫中(原書房, 1970), 635∼636쪽. 김가진도 청일간의 승패의 귀결을 관망하고 있었다.0963)≪日本外交文書(韓國篇)≫5, ‘445. 京城狀況報告의 件’, 701∼702쪽. 개화파 정권에 의한 갑오개혁도 8월 17일의 평양성전투에서의 일본의 대승 이전까지는 개화파의 구상에 의하여 시행되었다고 생각된다.0964)유영익,<갑오경장을 위요한 일본의 대한정책>(≪갑오경장연구≫, 일조각, 1990), 3쪽.
따라서 이 원칙은 양측에 의하여 어렵지 않게 합의되었고 恩津의 黃山에서는 6월 21일의 사건 이후 “이전 동도는 일본인에 대하여 하등의 방해를 하지 않았으나 이번은 일본인에 대한 감정이 매우 나쁘며”0965)≪駐韓日本公使館記錄≫3, 240쪽. 공주에서는 역시 6월 21일의 사건 이후 농민군이 일본을 討平하는 데에 군량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富民·士族家에 곡물·말·총 등을 卜定하고 있었음에서0966)≪時聞記≫, 甲午 7月 5日(≪叢書≫2, 178쪽). 나타나듯이 철저하게 준수되고 있었다.
여섯째, 토지소유 내지는 토지경작의 문제에 관한 원칙이었는데 제12조가 그것이다. 관민합작의 집강소, 공식적으로 인정된 집강소의 성격규정 문제에서 가장 핵심적인 관건이 되는 조항이라고 생각된다. 제12조의 파악문제 역시 집강소와 갑오농민전쟁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에 대한 파악에서도 견해가 크게 갈리고 있다.0967)주 131) 133) 138)의 논문들에서는 土地所有의 균등분배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90년대에 들어와서는 농민전쟁 연구가 심화되면서 대체로 부정되고 있다. 김양식은 “집강소의 주요한 기능은 무기관리와 부량배 단속과 같은 치안유지였으며, 폐정개혁활동 역시 원칙적으로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졌으므로 집강소는 농민군 대 정치권력 사이의 문제해결 방식이었을 뿐, 사회구조의 혁명적 재편까지는 전망한 것이 아니었다”(주 141)의 논문, 165·167쪽)라고 하여 제12조의 역사적 실재를 부정하였다. 박찬승은, 농민들은 지주제의 해체를 희망하고 있었지만 농민군 세력은 객관적 여건상 “아직 토지혁명의 문제를 주된 목표로 설정할만한 주체적 역량을 갖고 있지 못하였다”(주 142)의 논문, 130쪽)라고 하여 제12조의 강령으로서의 성립을 회의하고 있다.
조경달은, 제12조는 “문자 그대로 토지소유의 均分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주 143의 책, 212쪽)되지만, 그것은 민중의 내적인 요구·희망을 반영하고 있을 뿐 개혁강령으로서의 성립은 믿기 어렵다고 하였다.
그러나 토지소유의 재분배·균등분배로 보는 견해도 더욱 실증적으로 주장되고 있다. 김용섭은 주 169)에서와 같이 농민군 지도부는 정약용의≪경세유표≫에서의 토지개혁구상 즉 지주전호제도의 전면적 해체와 경작농민에의 토지소유 재분배를 내용으로 하는 토지제도 개혁구상을 공유하고 있었다고 하여, 제12조를 토지소유의 균등분배로 파악하였다. 신용하는≪경세유표≫의 정전제의 농민군 지도부에의 계승,≪동학사≫(초고본)의 두레제 강령 등을 종합하여, 제12조를 “지주제도를 폐지하고 경작농민들에게 私田 8구를 1구씩 균등하게 분배해주어 자작농으로하는”(신용하,<갑오농민전쟁과 두레와 집강소의 폐정개혁>≪한국사회의 신분계급과 사회변동≫, 문학과 지성사, 1987;≪동학과 갑오농민전쟁연구≫, 일조각, 1993, 281쪽) 토지소유의 균등분배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제12조는 말 그대로 토지의 경작을 평균되게 한다는 경작평균의 원칙이었다고 생각하며, 제2∼11조 특히 제11조가 김학진의 상대적 양보였고, 그것에 반하여 제12조는 농민군측 즉 전봉준의 상대적 양보였다고 생각한다.
농민전쟁 진행과정에서 토지문제에 관련하여 농민들이 어떤 행동을 하였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1894년 7월 30일 태안에서 농민군 李某에게 畓文記를 빼앗긴 어떤 地主는 “道人들이 애초에 經界說이 없어서 畓文記를 빼앗아갔다”0968)≪김약제일기≫3, 갑오 7월 30일(≪叢書≫3, 74쪽).라고 말하고 있다. 道人들이 토지사유를 부정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역시 태안에서 金若濟의 從叔은 일단 畓券을 농민군들에게 빼앗겼다가 나중에 찾아오고 있다.0969)위의 책, 갑오 8월 21일(≪叢書≫3, 78쪽). 농민전쟁 진행 중에 부안에서는 농민군 南眞元·金甫一이 金丙喜의 時作畓을 탈경하였다.0970)≪民狀置付冊≫2, 을미 3월 2일, 30쪽. 역시 농민전쟁 진행 중인 7월과 9월에 光州의 최경선 농민군은 지주인 鄭士辰의 幷租를 탈취하고 있다.0971)≪光州郡范治明獄事初覆檢文案≫. 長城에서도 농민군이 地主의 賭租를 탈취하였다.0972)<巡撫先鋒陣謄錄>(≪東學亂記錄≫上, 650∼651쪽). 농민군들이 지주전호제를 반대하고 토지소유를 지향하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전봉준부대의 경우에도 5월 하순의 행동과 6월 20일 무렵의 행동에서와 같이 균산주의적 지향을 나타내고 있었는데, 이는 위에서의 지주전호제 부정과 같은 궤도에 있는 것이었다.
≪康津邑誌≫ ‘名僧草衣傳’(草本謄寫)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고 한다.0973)최익한,≪실학파와 정다산≫, 1955. 여기의 인용은 청년사 재간본 411쪽에 의한다. 번역을 부분적으로 약간 수정하였다.
草衣는 정다산의 詩友일 뿐만 아니라 道交였다. 다산이 유배로부터 고향으로 돌아가기 직전에≪경세유표≫를 밀실에서 저작하여 그의 문생 李睛과 親僧 초의에게 주어서 비밀히 보관 전포할 것을 부탁하였다. 그 전문은 중간에 유실되었고, 그 일부가 그 후 대원군에게 박해당한 南尙敎·南鍾三 부자 및 洪鳳周 일파에게 전하여졌으며, 그 일부는 그 후 강진의 尹世煥·尹世顯·金炳泰·姜雲伯 등과 해남의 朱挺浩·金道一 등을 통하여 갑오년에 기병한 全綠豆·金介男 일파의 수중으로 들어가서 그들이 이용하였다. 전쟁 끝에 관군은<정다산비결>이 녹두 일파의 ‘匪賊’을 선동하였다 하여, 정다산의 유배지 부근의 민가와 高聲寺·白蓮社·大芚寺 등 사찰들을 수색한 일까지 있었다.
전봉준·김개남 등의 농민군이 정약용이 밀실에서 저작한≪경세유표≫즉<정다산비결>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농민군들은 집강소에 의한 폐정개혁 사업을 실천하면서 자신들의 개혁방향·개혁이념을 다듬어나갈 필요성을 절감하였고, 그것을 다듬어나가는 과정에서 정약용의≪경세유표≫특히 井田制를 개혁의 기준으로 삼게 되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정약용의 개혁사상과 농민군의 연결 가능성에 대해서 주목하는 견해도 있었다. “농민군 지도층이 실학사상, 특히 다산의≪경세유표≫의 정치사상을 계승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중략) 다산 제자의 후손이 농민군에 가담하고 있었던 점으로서도 확인된다. 다산의 제자에는 尹鐘億이 있었고 그의 아들 尹樂浩는 학자로서 父學을 계승하고 있었으며, 그 아들에는 尹柱莘이 있었는데 이 尹柱莘은 강진에서 농민군(동학)에 가담하여 접주를 하였으므로, 정부군·일본군의 농민군 진압과정에서 체포되어 처형되고 있었다. 윤주신은 그 가학을 통해서 다산의 학문에 쉽게 접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러하였다면 그러한 사상은 어렵지 않게 농민군 지도부의 공유의 사상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0974)김용섭,<조선왕조 최말기의 농민운동과 그 지향>(≪한국근현대농업사연구≫, 일조각, 1992), 370∼371쪽. 신용하도 주 165)의 논문에서 정약용의 정전제 개혁사상의 농민군 지도부에의 계승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경세유표≫의 정전제 토지제도개혁안의 내용에 대해서도 견해가 크게 갈리고 있다. 견해의 다기성은 매우 복잡하지만 平均分作의 해석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정리하면 대개 세 가지 견해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토지소유의 재분배를 현실적 내지는 궁극적 목적으로 하였다는 견해이다. 대부분의 견해가 여기에 속한다.0975)김용섭,<18, 9세기의 농업실정과 새로운 농업경영론>(≪대동문화연구≫9,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1972;≪증보판 한국근대농업사연구≫상, 일조각, 1984);박찬승,<정약용의 정전제론 고찰>(≪역사학보≫110, 1986);성대경,<다산의 농업개혁론>(≪대동문화연구≫21, 1987);정윤형,<다산의 재정개혁론>(≪다산학의 탐구≫, 민음사, 1990);강만길,<다산의 토지소유관>(≪다산의 정치경제사상≫, 창작과 비평사, 1990);안병직,<다산의 농업경영론>(위와 같은 책). 둘째는 지주전호제를 용인하면서 九一稅法을 실시하여 治田(생산력 발전-인용자)·皆職·均稅를 실현하려 하였다는 견해이다.0976)박종근,<다산정약용의 토지개혁사상의 고찰>(≪조선학보≫28, 1963);정석종,<다산정약용의 경제사상>(≪이해남박사화갑기념사학논총≫, 일조각, 1970);신용하,<다산정약용의 정전제 토지개혁사상>(≪김철준박사화갑기념사학논총≫, 지식산업사, 1983). 셋째는 정전제에는 均稅의 원칙만이 관철되고 있다는 견해이다.0977)이영훈,<정약용의 정전제론의 구조와 역사적 의의>(≪제4회 동양학 국제학술회의 논문집≫,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1991).
필자는 둘째의 견해가 타당하다고 생각한다.0978)졸고,<한국사회경제사와 실학>(≪한중실학사연구≫, 민음사, 1998). 농민군 지도부는 집강소에 의한 폐정개혁을 경험하면서, 개혁방향·개혁이념을 다듬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였고 그 모색과정에서 정약용의≪경세유표≫의 정전제 구상에 접하게 되었고, 지주제를 용인한 속에서 경작능력에 따른 경작지의 均分이라는 개혁원칙을 수립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관민합작의 집강소 질서에서는 ‘경작능력에 따른 경작지의 均分’안이 지주제의 철폐를 전제로 하는 ‘토지소유의 均分’안보다는 훨씬 실현의 가능성이 많은 것이었다.
농민들의 압도적 다수는 지주제를 철폐한 속에서의 ‘토지소유의 均分’안을 희망하고 지지하였지만, 관민합작의 집강소 질서를 어디까지나 유지하는 속에서 폐정개혁을 진행한 전봉준에게는 ‘경작지의 均分’안이 현실적인 개혁원칙으로 될 수 밖에 없었다. 김학진 쪽에서도 ‘경작지의 均分’안은 세력의 열세 속에서 마지못해서나마 허용과 묵인의 여지가 많은 것이었다.
김학진의 종사관으로서 김학진의 난민효유문을 모두 작성하면서 농민전쟁 수습과정에서 김학진의 두뇌역할을 한 金星圭의 토지제도개혁안이 주목된다. 김성규의 지주전호제도 개혁안은, 요약하면 소작지의 균등분작과 그 소작인의 常定化를 전제로 하는 생산물의 1/4 수준에서의 恒定賭租法이었고0979)김용섭,<광무개혁기의 양무감리 김성규의 사회경제론>(≪증보판 한국근대농업사연구≫하, 일조각, 1984), 134쪽. 이러한 구상은 1904년에 문장화되었지만,0980)김용섭, 위의 글, 139쪽. 그가 이와 같은 지주제 개혁안을 구상하게 된 것은 그 부친의 토지론이나 다산의 농업개혁론과도 관련하여 이미 오래전부터의 일이었다면,0981)김용섭, 위의 글, 135쪽. ‘경작지의 均分’안은 김학진 쪽에서도 허용과 묵시적인 동의의 여지가 넓은 것이었다.
동학당 정토군 독립 제19대대 사령관 南小四郞 소좌가 전봉준을 포획한 당시에0982)전봉준은 12월 2일 淳昌에서 체포되어 12월 7일 일본군에게 인도되었다(<巡撫先鋒陣謄錄>,≪東學亂記錄≫上, 611쪽). 따라서 口供書는 12월 초순에 이루어졌다고 생각된다. 그를 취조한 口供書에서 전봉준은 “나의 종국의 목적은 (중략) 田制·山林制를 개정하는 것이었다”0983)≪東京朝日新聞≫, 명치 28년 3월 5일, ‘동학당 대두목과 그 자백’, (≪사회와 사상≫1, 1988년 9월호), 261쪽.고 하였다.
농민전쟁에서 田制의 개정을 종국적 목적으로 삼은 전봉준이 폐정개혁사업에서 田制의 개정에 관련되는 지향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은 있기 어려운 일이며, 집강소 체제 운영의 양쪽 당사자 모두에서 현실성이 많았던 ‘경작지의 均分’안이 제12조의 土地平均分作으로 성립되었다고 생각된다.
더욱이 정약용의 정전제 개혁안에서는 “자기 땅에서 스스로가 농사짓는 경우는 官에서 금단할 수 없다”0984)≪與猶堂全書≫5,≪經世遺表≫田制10, 井田議 2, 145쪽.라고 하여 自耕其田者=自耕農은 능력에 따른 기준면적을 초과하여 경작하더라도 그대로 경작이 허용된다고 하였다. 힘써 농사짓는 富農에게는 환영의 여지가 매우 많은 개혁구상이었다. 따라서 제12조의 ‘경작지의 均分’안 역시 농민전쟁에 다수가 참가한 부농에게도 수용의 여지가 많을 수 있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제12조는 개혁강령으로서만 성립하고 존재하였을 뿐, 현실화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봉건적 사회질서의 가장 핵심되는 기둥인 지주전호제를 현실적으로 크게 개혁시킬 수 있는 강령이 역사적으로 성립되었다는 것은 농민군의 커다란 성장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상에서와 같이 집강소 질서 하에서 제12조를 제외한 다른 조항은 실현되었다고 보인다. 봉건제도가 근본적으로 변혁되지는 않았지만 계서적인 신분제도는 전면적으로 해체됨으로써 봉건제도는 크게 개혁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농민군의 집강소가 기존의 행정체계와 이원적으로 병립되었지만 농민군의 자치적 행정기관으로서 확립되었고, 농민군세력의 군사적 우세성이 확고한 곳에서는 사실상 일원화됨으로써 농민의 지방권력기구로 성립되기도 하였다. 농민군은 지방의 차원이긴 하지만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가 주체적으로 자신들의 사회경제적 생활질서를 다듬어 나가고 새롭게 창출하기도 하였다. 이는 조선사회의 역사적 전진이었고 농민군의 비약적 성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鄭昌烈>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