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3. 동학농민전쟁의 역사적 의의
  • 2) 경제적 지향

2) 경제적 지향

 1894년의 농민전쟁은 3월의 제1차 농민전쟁, 6월의 집강소, 9월의 제2차 농민전쟁이라는 세 단계로 발전하였고 그 과정에 따라 농민군의 사회경제적 지향도 성장·발전하였으므로 편의상 세 단계로 나누어 살펴보려고 한다.

 3월 20일에서 5월 8일까지의 제1차 농민전쟁의 단계에서 농민군은 전라도 일대를 순회하면서 각지에서 그들의 정치적 요구와 지향을 나타내는 4개名義,1247)鄭 喬,≪大韓季年史≫上 권 2, 고종 31년 갑오 3월, 74쪽. 檄文,1248)吳知泳,≪東學史≫, 112쪽. 通文,1249)≪東匪討錄≫,<4月 初4日 東徒通文法聖吏鄕>(≪韓國學報≫3, 1976), 244쪽.
≪朝鮮交涉資料≫中,<東學黨彙報>, 332쪽.
布告文,1250)<聚語>, 갑오 4월 11일,<茂長東學輩布告文>(≪東學亂記錄≫上), 142∼43쪽. 榜文,1251)鄭 喬,≪大韓季年史≫上 권 2, 고종 31년 4월, 75쪽. 訴志1252)≪兩湖招討謄錄≫, 갑오 5월 4일(≪東學亂記錄≫上), 207쪽. 등을 발표하였고, 그들의 사회경제적 요구 즉 폐정개혁의 요구는 1894년 4월 4일의 격문,1253)朴殷植,≪韓國痛史≫제2편 제26장, 甲午東學之亂(≪朴殷植全書≫上), 108∼109쪽.
≪東匪討錄≫(≪韓國學報≫3,<새자료>, 1976), 244쪽.
4월 20일 무렵 초토사에게 보낸 호남유생원정서,1254)<湖南儒生原情于招討使文>,≪東匪討錄≫(≪韓國學報≫3,<새자료>), 259∼260쪽. 5월초 순변사 李元會에게 제출한 전라도유생원정서1255)金允植,≪續陰晴史≫上 권 7, 고종 31년 5월, 322∼323쪽.와 湖南會生等上書1256)<湖南會生等上書>,≪東匪討錄≫(≪韓國學報≫3,<새자료>, 1976), 263∼264쪽.
金允植,<又原情列錄追到者>, 앞의 책, 323∼325쪽.
등으로 나타나 있으며 1894년 5월 8일의 전주화약 때에 이들을 27개 조목으로 종합·정리하여 초토사 홍계훈에게 제시하고,1257)<全琫準判決宣言書>(≪나라사랑≫15, 1974), 147∼149쪽. 초토사가 그 조목들을 왕에게 보고하고 실시되도록 노력한다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화약에 호응하였다.1258)韓㳓劤,<東學軍의 弊政改革案檢討>(≪歷史學報≫23, 1964)
朴宗根,<甲午農民戰爭(東學亂)에 있어서의 ‘全州和約’과 ‘弊政改革案’>(≪歷史評論≫140, 1962).

 폐정개혁안 27개조를 몇 묶음으로 정리하면 田結부담의 경감을 요구하는 것이 4개 조목, 洞布·환곡·연호잡역 등 농민부담의 경감을 요구하는 것이 5개 조목, 전운소의 폐지를 요구하는 것이 1개 조목, 보를 쌓아서 수세하는 것을 금지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1개 조목, 均田의 폐지요구가 1개 조목, 권력을 배경으로 한 고리대 징수의 금지요구가 1개 조목, 개항장의 미곡상이 내지시장 밖에서 미곡매입하는 것을 금지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1개 조목, 농촌소상인을 억압하는 상품유통관계 시정의 요구가 5개 조목, 백성의 묘지를 지방관이 빼앗는 것을 금지해 줄 것을 요구하는 것이 1개 조목, 탐관오리의 처벌을 요구하는 것이 2개 조목, 아전을 임명할 때 사례조로 받는 任債의 폐지요구가 1개 조목, 전보국의 폐지요구가 1개 조목, 민비 척족세력의 제거와 대원군의 옹립을 요구하는 것이 1개 조목, 동학인의 복권을 요구하는 것이 1개 조목이었다. 그 중에서 전운소 폐지요구는 4월 4일의 격문에서부터 호남회생등상서까지에 모두 제기되고 있고, 개항장 미곡상인의 내지시장 밖에서의 미곡매입 금지요구는 호남유생원정서에서만 제기되지 않았다. 이 두 항목은 모두가 개항후의 미곡수출과 밀접히 연관되는 현상이었다.

 일본상인의 내륙지방 행상은 1887년 무렵부터 시작되어 1890년 전후부터는 본격화되었고, 일본 자본주의의 구조 자체의 내적인 요구에 의하여 1890년부터는 한국으로부터의 미곡수출이 급격히 증가하였다. 농민적 상품교환의 장으로서의 농촌장시, 이 장시를 중심으로 한 미곡시장, 그 내부에 미곡판매농민과 구매농민을 함께 거느리는 재래의 시장구조가 수출시장과의 접촉에 의하여 동요·파괴되기 시작하였다.1259)吉野誠,<李朝末期에 있어서 穀物輸出의 展開와 防穀令>(≪朝鮮史硏究會論文集≫15, 1978), 110쪽. 그러나 1894년 당시에는 수출시장과의 연관을 전면적으로 차단한다는 것은 이미 현실적인 가능성이 결여된 것이었다. “외국의 潛商이 높은 값으로 쌀을 구입하는 것”1260)朴殷植,≪韓國痛史≫제2편 제26장, 甲午東學之亂(≪朴殷植全書≫上), 108∼109쪽.
≪東匪討錄≫(≪韓國學報≫3,<새자료>, 1976), 244쪽.
을 시정할 것, “개항장의 잠상이 쌀을 구입하는 것을 일체 금단할 것”1261)위와 같음. 위와 여기에서 말하는 潛商이란 場市의 시장질서 내부에서 하는 상행위가 아니라 그것을 벗어나서 행하는 상행위로서 장시의 시장질서·시장구조를 교란하는 상행위를 일컫는다. 등은 수출시장과의 연관을 전면적으로 차단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핵심은 미곡매매를 농촌장시의 시장질서 내부에로 한정함으로써 농촌장시를 중심으로 한 재래의 시장구조의 파괴를 막고, 그럼으로써 지역적인 재생산구조의 유지를 도모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1262)吉野誠,<李朝末期에 있어서 穀物輸出의 展開와 防穀令>(≪朝鮮史硏究會論文集≫15, 1978), 114쪽 참조. 전주화약 27개조목의 하나인 “대동上納 전에는 각 개항장의 잠상이 쌀을 구입하는 것을 금단할 것”에서는 그 금단의 시기를 대동상납 전 즉 보리가 나오기 전의 봄철에만 한정하고 있다.1263)‘大同上納前’은 “수확 후 조세 納入까지의 기간으로서 米價가 가장 下落하는 시기”(吉野誠,<朝鮮開國後의 穀物輸出에 대하여>, 60쪽의 주 74))가 아니라, “大同米의 收納은 春秋 두 번으로 나누는데 三南과 江原道는 이듬해 봄에 한꺼번에 합쳐서 上納한다”(大典會通 卷2 戶典 徭賦, 景仁文化社, 1969, 282쪽)라고 하였듯이 米價가 가장 올라가는 봄철을 의미한다. 이 경우에는 쌀값이 올라가는 춘궁기에 있어서의 농촌장시의 보호·방어에 역점을 두고 있다. 즉 수출시장과의 연관을 객관적인 사실로 인정·전제하고서 농촌장시=농민적 시장을 중심으로 한 재생산구조의 유지를 도모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1895년 2월 11일의 제2차 법정신문에서 전봉준이 재봉기한 이유를 “일본이 대궐을 범한 연유를 따지고자 하였다”하자, 법관이 “그러면 일본군대와 경성에 머무르는 외국인들을 모조리 구축하려고 하였는가”라고 물었으며 이에 전봉준은 “그렇지 않다. 다른 나라는 단지 통상만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일본은 군대를 거느리고서 경성에 주둔하고 있어서 우리나라 경토를 침략하려는 것이 아닌가 의심되었다”1264)<全琫準供草>, 을미 2월 11일, 再招問目(≪동학란기록≫하), 538쪽.라고 하였듯이 외국과의 무역관계에 대해서는 객관적인 사실로서 전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운소의 혁파도 그러한 농촌시장을 전제로 하여, 농민생활에 가해지는 억압과 수탈을 철폐하려는 것이었다. 전운소 창설 즉 “輪船에 의한 상납 이후 每結의 加磨鍊米가 3∼4두에 이르렀다”1265)金允植,≪續陰晴史≫上 권 7, 고종 31년 갑오,<五月, 全羅道儒生等原情于巡邊使李元會 革弊後錄>의 제11조, 323쪽.라는 가마련미는, 전운사 조필영이 인천에서 일본상인에게 선가미만 매도한 것이 아니라 세미본곡까지도 매도하고 그것을 量餘不足米라는 명색으로 농민들에게 재징수한 것이었다.1266)吉野誠,<朝鮮開國後의 穀物輸出에 대하여>(≪조선사연구회논문집≫15, 1978), 49쪽. 즉 미곡수출로 인한 세미곡 상품화의 증대에 따른 과세의 가중이었다. 따라서 전운소 혁파의 요구는 미곡상품화의 증대추세에 있어서 탐학관료의 세미곡 상품화 증대에 대한 농민적 미곡상품화 지향의 저항이었다. 이러한 지향은 이미 고부민란의 경우에도 나타나고 있었다. 전운에 대한 농민층의 반감·저항은 “동도가 나그네로 가장하여 인천 제물포에 와서 전운사위원 1인을 유인하여 배에 싣고 멀리 사라져버렸다. 동도는 진작부터 전운소에 대하여 묵은 반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1267)<東學黨의 情形>(≪朝鮮交涉資料≫中), 338쪽.라는 기록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상을 종합하면, 농민군은 농민의 생산력 발전의 장애물 제거와 농민의 소상품생산자로서의 자립·발전을 보장해 줄 것을 요구하고1268)梶村秀樹,<李朝末期(開國後)의 綿業의 流通 및 生産構造>(≪朝鮮에 있어서 資本主義의 形成과 展開≫, 龍溪書舍, 1977), 115∼116·119∼120쪽과 주 17) 참조. 농촌소상인의 자립·발전을 보장해 줄 것을 요구하며 아울러 균전폐지의 요구에서 나타나듯이 농민적 토지소유의 발전을 요구하고 그러한 보장을 대원군정권의 성립에서 기대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농민군은 이상과 같은 기대에의 저지물로서 민씨척족정권을 그 상징으로 하는 봉건적 제관계를 주요한 것으로, 다음 일본을 그 대표로 하는 외국의 경제적 침투를 부차적인 것으로 인식하였다. 3월 25일에 발표한 ‘4개명의’에서는 ‘왜오랑캐를 쫓아내어 버린다’라고 하였지만 제1차 농민전쟁 당시에는 아직 “일본인이 직접 공격목표가 되었다기보다도 국가의 내정문제로서 위정자 즉 부패관권에 대한 경고로서 발하여진 것이었다.”1269)韓㳓劤,<東學軍의 弊政改革案檢討>(≪歷史學報≫23, 1964), 68쪽. 위에서와 같이 제1차 농민전쟁의 경제적 지향은 소상품생산자·소상인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은 5월에서 9월까지의 집강소의 단계이다. 집강소 단계에서의 폐정개혁은≪東學史≫에 나오는 ‘폐정개혁건 12개조’1270)吳知泳,≪東學史≫, 126∼127쪽.의 사항들이었다. 12개조중 제12조인 ‘土地의 平均分作’ 이외에는 실현되었다고 보인다. 미쳐 실현되지 못한 제12조까지 포함하여 농민군의 경제적 지향을 요약하면, 경제관계에서의 봉건적 폐단의 개혁, 均産의 실현, 농민적 토지소유의 실현, 농업생산력 발전의 실현1271)필자는 ‘土地의 平均分作’을 토지소유의 재분배가 아니라 토지경작의 재분배라고 생각하며, 이 점에서 정약용의≪경세유표≫에서의 정전제 개혁안에서의 농업생산력 발전의 원리를 계승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등이었다고 생각된다. 기본적으로는 제1차 농민전쟁 단계와 같았지만 농업생산력의 발전이라는 視角이 새로이 보완됨으로써 한걸음 더 역사적으로 전진되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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