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일동맹의 개정은 러일전쟁 후 변모한 동아시아 정세에 비추어 양국간의 이해를 조정하는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영국이 해상세력으로서 동아시아 문제에 관여할 능력을 보유한 유럽국가이며, 일본이 지역강대국이라는 점을 인식한다면 양국간의 동맹과 그 내용은 동아시아 국제체제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간주될 수 있다. 양국도 이 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영국은 영일동맹의 지속여부가 일본이 러시아에게 제시한 평화조건을 규정할 것이라 평가했다. 영국이 종전에 맞추어 동맹조약을 개정하지 않는다면 열강들은 영국이 조약기간이 만료되는 1907년후 동맹관계를 폐지할 의사를 가진 것으로 간주할 것이다. 따라서 동맹조약이 개정된다면 일본은 향후 러시아의 복수전에 대한 우려에서 벗어날 것이며, 러시아 역시 일본을 상대로 전쟁을 재개할 의지를 갖지 않는다는 전재아래 전후처리에 임할 것이다. 일본의 평가도 동일했다. 영일동맹이 존속되어야 일본은 승리의 과일을 충분히 차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복수전의 악령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었다.402)Nish, Op. cit.(1966), pp.300ff. 즉 일본의 관점에서 동아시아 지역평화는 영일동맹의 지속여부에 달려 있던 것이다.
2차 영일동맹은 다음의 3가지 점에서 1차동맹과 다르다. 우선 동맹의 성격이다. 1차동맹은 동아시아의 현상유지를 위한 방어동맹이었다. 그러나 2차동맹은 공수동맹이었다. 러시아가 종전 후 일본의 권익을 침해할 때 영국은 일본을 지원할 의무가 있으며, 일본 역시 영국이 인도대륙의 방위를 두고 영국을 지원해야 한다. 이론상으로는 이같이 양국이 상대국의 안보상 위기에 원조를 하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러시아의 복수전으로 인한 일본의 안보위협을 영국이 확실한 방법으로 보장한 것이었다. 러시아가 비록 이번 전쟁에서 패했지만 일본이 한 척의 전함을 건조·구매할 때 3척을 건조·구매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즉 러시아가 일본만을 상대로 복수전을 구상한다면 함대 재건을 시도할 수도 있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영국의 지원이 계속된다면 영·일 양국의 함대에 대항할 만한 함대를 건설한다는 야망을 갖기 어려울 것이다. 2차동맹은 이같이 일본의 안보에 대한 확실한 보장이었다.
두번째는 동맹의 범위이다. 이 문제도 러시아의 잠재적인 위협과 관련된 것이다. 영국은 러일전쟁 후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팽창은 저지되었으나 러시아는 여전히 팽창을 주도할 만한 능력을 보유한 것으로 평가했다. 특히 캐스피해 연안 횡단철도를 완성했기 때문에 인도국경 지역에서 전쟁이 일어날 경우 50만 병력을 쉽게 동원할 수 있게 되었다. 일본은 1차동맹 협상 때 동맹의 범위를 그들의 이해가 전혀 없는 인도대륙까지 확대하는 데 반대했지만 이번에는 ‘장기적 관점에서’ 영일동맹이 가져다 줄 이익을 위해 영국의 요구를 수용하게 되었다.
세번째는 한국독립 조항의 폐기이다. 앞장에서 검토한 바와 같이 영국은 1902년 1차동맹에서 한반도에서 일본의 우월적 지위를 인정했지만 동시에 한국의 독립도 보장했다. 이 동맹은 러시아의 팽창으로 야기된 동아시아의 정세에서 그 효력을 극대화하지만 영일동맹은 러일전쟁의 종결과 함께 불협화음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동맹이 지속되는 20년 동안(1922년까지) 가장 원활하게 운용된 것이 바로 1902년∼1905년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동아시아 지역 수준에서 러시아라는 가상 적국이 뚜렷이 부각되었기 때문이겠지만, 한반도 域內수준에서도 양국간의 이해와 접근법이 일치했다는 점도 일조를 했다. 여기에는 양국의 서울주재 공사인 죠단(John N. Jordan)과 하야시(林權助)의 개인적 친분까지 겹쳐 구체적으로 일본의 한국정책에 대한 영국의 지지는 절정을 이루었다.403)구대열,≪제국주의와 언론-배설, 대한매일신보 및 한·영·일 관계≫(이대출판부, 1996), 81∼84쪽. 이 결과 2차동맹은 서문에서 한국의 독립에 관한 언급이 삭제되었을 뿐 아니라 일본이 한국에서 정치·군사·경제적으로 특수이익을 가지며, 이러한 이익을 옹호 증진하기 위해 한국에 대해 지도·감리 및 보호조치를 취하는 데에 영국이 동의하게 되었던 것이다(2조).
그러나 국가간의 거래는 상호교환 혹은 대가라는 원칙 위에서 이루어진다. 일본은 영국이 동맹의 범위를 인도국경까지 확대한 대가로 한국문제의 처리에 있어 영국의 전폭적인 지지를 요구한 것이다. 그러나 영국의 입장은 1차동맹과는 달리 단순한 것이었다. 1차동맹을 체결하던 시기 영국은 한국문제를 두고 러시아와 분쟁에 휘말릴 가능성을 우려했지만, 2차동맹을 논의할 때는 이같은 우려는 사라졌다. 더구나 일본의 요구는, 영국의 관점에서 보면, 한반도에 새로운 조치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즉 러일전쟁의 개전과 함께 일본군이 한반도를 완전히 점령했으며 이후 두 차례의 한일의정서를 통해 일본이 확보한 권익을 단순히 인정하면 해결되는 것이었다. 영국은 당시 국제사회에서 미국과 함께 한국의 독립을 보호하는 국가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에서 약간 곤혹스러워 했지만, 한반도에 존재하는 기정사실(fait accompli)을 승인하는 것뿐이라는 논리로 일본의 요구를 수용하는 것이다.404)Nish, Op. cit.(1966), pp.320∼322.
영국의 입장은 국제정치의 현실주의를 반영하는 것이지만 전적으로 타당한 것은 되지 못한다. 일본의 한국점령은 전쟁기간 중에 이루어진 군사적 조치에 불과한 것이며, 따라서 국제법적으로 승인된 영속성을 갖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2차례의 한일의정서는 국제법적 효력을 갖는 것이며, 영국은 물론 다른 열강들은 일본이 이를 강압적으로 체결했다는 점은 고려하지 않았다. 따라서 영국은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기 1년 전인 1904년 9월, 친일 외교고문 스티븐스(Durham W. Stevens)가 한국의 외교업무를 장악하자 앞으로 한국의 대외관계는 도쿄에서 처리될 것이기 때문에 서울의 영국공사관은 철수할 것을 고려하기 시작하였다.405)Jordan to Campbell, 1904. 9. 10, FO/17/1660(私信). 2차동맹조약이 공개된 후 한국정부가 한국 독립보장의 폐지와 2조의 한국관련 조항은 기존의 한영조약에 위반되는 것이므로 폐기할 것을 요망하자 서울주재공사 죠단은 이것은 1·2차 한일의정서에서 한국 자신이 승인하여 조성된 상황을 인정한 것뿐이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406)Jordan to Lansdowne, 1905. 10. 17, FO/17/1693(142). 더욱이 전쟁발발 이후 한국정부와 왕실은 영국의 관점에서는 ‘반동적인’ 러시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무능·부패로 인하여 독자적으로 개혁을 수행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일본에 의한 보호가 더 바람직한 해결안이라고 한국의 독립에 대한 지지를 포기하는 입장 변화를 정당화하고 있었다.407)이에 대한 논의는 구대열, 앞의 책, 77∼82쪽 및 Nish, Op. cit.(1966), pp.312∼322도 참조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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