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3. 황무지개척권 반대운동
  • 3) 한국민의 반대운동
  • (3) 보안회의 투쟁

(3) 보안회의 투쟁

한국민의 황무지개척권 반대투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전직 관료와 유생들의 상소와 헌의가 중심이 되던 반대운동은 점차 집단 또는 단체의 투쟁 형태로 전환되어 갔다. 상소와 언론을 통한 반대운동을 대규모 집회운동으로 확대 발전시켜 지속적으로 주도한 단체는 輔(保)安會였다.

7월 7일에 산림·천택·원야·진황지 문제로 신사들이 연명상소를 올렸는데, 그 논술이 문제되어 疏首인 奉常司副提調 이순범이 9일에 체포되었다. 상소에 참여한 신사들은 평리원에 들어가 법적 조치를 함께 받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법관이 소수는 조정의 처분으로 구속되었으나, 다른 사람들을 가두는 것은 부당하다고 설명했다. 상소에 참여한 사람들은 종로 白木廛都家에 모여 여러 사람들에게 통문을 발송했다.

13일에 前議官 宋秀萬·沈相震 등 朝臣과 유생들이 백목전도가에 모여 외국인에게 황무지개척권을 빌려주는 것은 불가하니, 일본의 요구를 결사적으로 물리쳐야 한다고 연설하고, 이 사안에 관계한 외부대신 이하영 등을 성토하였다. 그리고 강토를 보전할 계획을 기약하고 輔國安民을 뜻하는 輔安會를 개회하였다. 장차 유망한 대신을 회장으로 擇薦한 후 궁궐 앞에서 상소를 올릴 계획을 세웠다. 경무청의 순검과 헌병대 대원이 방청하고 보안회의 연설인 이외의 인민들을 설득하여 해산시켰다. 이튿날에도 백여 명이 백목전도가에 모여 연설하였다. 이날 보안회는 일본의 요구를 철폐시킬 때까지 매일 집회하기로 정하고, 중추원부의장 이도재를 의장으로 추천하였다. 이도재는 고사하였다.0324)≪皇城新聞≫, 1904년 7월 15일, 잡보<宋氏演說>·16일, 잡보<醉狂激言>·8월 1일, 잡보<宋氏供案>.

송수만·심상진 등은 전국에 통문을 발하고 정부의 각 부서와 대관 집까지 公函을 보내, 일본인이 산림·천택·원야·진황지를 청구하는 것은, 곧 한 나라의 존망과 인민의 사생을 결판내는 것이라 하고, 대한의 신민된 자는 한 목소리로 준열히 물리칠 수밖에 없으므로, 종로 백목전도가에 임시회의소를 설치했다고 취지를 밝혔다. 여러 대신들은 임시회의소에 회동하여 이 문제를 널리 의논, 타결하는 자리가 되게 해 줄 것을 요망하였다. 그리고 보안회의 운영요강을 아래와 같이 내세웠다.

<보안회의 운영요강>

一. 전국의 山林·川澤·原野·陳荒의 토지를 청구한 일을 모여서 같이 妥商할 것.

一. 회원의 言權은 다만 위 項의 문제를 타정하는 것으로만 할 것.

一. 회를 폐하는 기한은 위 항의 문제가 귀결되는 그 날로 정할 것.

一. 위 항의 문제는 국제교섭에 위배되니, (문제를) 일으킨 정부대신의 탄핵은 회원들이 法司에 부쳐 죄를 받게 할 것.

 (≪皇城新聞≫, 1904년 7월 16일, 잡보<保安所函請>).

서울에서 황무지개척권 요구 반대운동이 조직화되고, 보안회 등에서 보낸 통문이 전국에 전달되면서, 지방에서도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平北 寧邊郡民들은 통문을 보고 격분하고, 지방 진위대 병사들이 일본군 兵站部에 총격을 발하였다.0325)≪舊韓國外交文書≫7(日案 7), 214∼215쪽.

보안회는 16일 하오 3시에 백목전도가에서 모임을 갖고, 회장에 申箕善, 부회장에 前承旨 宋寅燮을 천거하고, 회의를 주재하는 代辯會長에 宋秀萬을 선출하였다. 10여 명이 회장 초청을 상의하고 있을 때, 일본 警部 와타나베(渡邊)가 순사 1명을 대동하고 와서 군중들의 격렬한 저항을 무릅쓰고 송수만과 송인섭을 붙잡아 갔다.

보안회는 사태를 의정부와 외부에 보고하였다. 외부대신은 交涉局長 金益昇을 보안회에 보내 사실을 문의한 뒤에 일본공사관에 항의하였다.0326)≪皇城新聞≫, 1904년 7월 18일, 잡보,<日捉韓紳>·8월 1일, 잡보<宋氏供案>. 17일에 외부대신과 협판이 일본공사에게 송수만·송인섭을 붙잡아 간 것을 항의하고, 범죄 여부는 한국 사법관이 응당 査辦할 일이니, 韓日修好條規 제10관에 따라 한국 法衙에 교부하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일본공사는 유생들이 照諒하는 것을 방임하고 금압하지 아니한 결과이므로, 오히려 한국 정부의 책임이라고 강변하였다. 또 영변군민이 일본 병참부에 총격을 가한 것도 통문이 지방인심을 불러 일으켜 사단을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일본공사의 직책으로 機宜의 조치를 시행함은 부득이하였다고 변명하였다. 송수만 등을 還交하라고 거듭 요청했으나, 앞으로 이런 행위를 엄금한다는 행동을 보이지 않으면 응할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0327)≪舊韓國外交文書≫7(日案 7), 213∼215쪽.

고종은 경무청에 칙명을 내려 보안회를 해산케 하였다. 보안회는 백목전도가에서 폐쇄하고 17일부터 典洞의 漢語學校로 옮겨 신사 2, 3백 명이 날마다 모여 개회하였다. 前侍從 元世性이 대변회장을 맡고, 문 앞에 大韓國旗를 높이 게양하여 기세를 올렸다. 정부는 헌병과 순검을 보내 문의 안팎을 지키게 하였다. 회장 申箕善에게 보안회소로 출석하기를 청하고, 鄭寅燮 대신 朴箕陽을 부회장으로 추천하여,0328)≪皇城新聞≫, 1904년 7월 19일, 잡보<駐隊增置>·<日捉韓紳>·<輔安移所>·<長副請帖>. 조직을 정비 강화하였다.

송수만은 18일에 일본공사관에서 심문을 받았다. 그는, 보안회는 강토를 보전할 계획을 기약한 것이지 소요를 일으키려고 만든 것이 아니라고 해명하였다. 황무지개척권 반대를 某 대관과 상의할 때 고종으로부터 恩燭이 있었다는 설이 있고, 또 모모 인사가 충동했다고 하며 고종과의 관련 여부를 질문받았다. 송수만은 國事로서 陳䟽·獻書한 적은 몇 번 있었지만, 누구의 지시나 상의한 것은 없다고 밝혔다.0329)≪皇城新聞≫, 1904년 8월 1∼4일, 잡보<宋氏供案>.

18일에 하기와라는 하야시공사가 착임하는대로 고종황제를 알현하기를 요청하고, 송수만·송인섭은 외부가 먼저 어떻게 처리한다는 답변을 하면, 조처하겠다고 답하였다.0330)≪舊韓國外交文書≫7(日案 7), 217∼219쪽. 이 즈음에 배일운동을 하는 ‘暴民’을 진압하기 위해, 서울 주차군을 3천 명 가량 증치하겠다고 일본공사가 한국 정부에 알려 왔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보안회는 18일에 총대원을 의정부와 외부로 파송하여,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한 照會를 일본공사관에 繳還할 것인지 여부를 질문하였다. 의정부에서는 격환 여부는 알지 못한다고 대답하고, 외부는 10여일 전에 격환하였는데 받지 않아 유치하고 있다고 답변하였다.

이날 고종이 權任巡檢 扈鎭淳을 통해 다시 칙령을 내려 보안회를 해산할 것을 효유하였다. 그러나 임시대변회장 원세성은 강토를 사수하겠다는 뜻을 표명하고, 보안회원들이 여러 번 칙령을 받고도 해산하지 않는 것은, 일본의 요구를 외부에서 되돌려 보냈다는 말도 듣지 못하였으니, 일본의 청구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 물러가겠다고 하였다. 하오 3시에 다시 헌병이 고종의 명으로 勅敎하고, 5시에 또 칙령을 내려 해산할 것을 효유하였다. 칙사를 세 차례나 보내 해산을 명령하였지만, 보안회는 죽음을 무릅쓰고 황무지개척권 요구가 철회되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해산하겠다는 확고한 자세를 고수하였다.0331)≪皇城新聞≫, 1904년 7월 20일, 잡보<三諭復奏>.

외부는 19일에 일본공사에게, 장차 정부가 황무지 및 산림 원야를 개척하는 일에 힘쓸 것이라고 밝히고, 이미 어공원을 설치하고 장차 개척을 주관할 것이며, 어떠한 요구가 있더라도 결단코 외국인에게 황무지개척권을 불허할 것이라고 단호하게 통보하였다.0332)≪舊韓國外交文書≫, 7(日案 7), 221∼222쪽.
≪皇城新聞≫, 1904년 7월 22일, 잡보<外照日館>.

7월 20일경에 이르러 보안회는 조직을 정비, 강화하였다. 보안회 내에 수천 명이 모여 대규모 집회를 개최하고, 외부에게 長書를 보내 황무지개척안을 반환했는지를 질문하였다. 외부는 방금 되돌려 보냈다고 회답하였다. 보안회는 ‘大韓輔安會章’을 刻造하여 각종 문서에 사용하고 會章을 관민에게 광고하였다.

보안회가 서울에서 연일 대규모 집회를 열어 황무지개척권 요구를 반대하는 운동을 지속하자, 지방에서도 호응하여 의연금을 보내 격려하고 상인들이 철시하여 투쟁에 참여하였다. 21일에 鳳山郡守 洪世永과 前郡守 金亨濟가 의연금 5백 냥을 보안회에 보내왔던 것이다.0333)≪皇城新聞≫, 1904년 7월 21일, 잡보<日照繳還>·<長副許參>및 22일, 잡보·광고. 종로의 각 상인들은 보안회의 통문을 받고 撤市하였다. 농민들도 일본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가 생활 터전을 모두 탈취해 가려는 계획으로 인식하고, 한국인 2천만이 다 죽지 않는 한, 결코 토지를 빼앗길 수 없다고 다짐하였다.0334)≪皇城新聞≫, 1904년 7월 23일, 논설<農談野說>·26일, 잡보<諭禁撤市>.

21일에도 회원 3, 4천 명이 보안회에 모여 일장 연설한 후에 격분하여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다. 대변회장은 정부에 장서하여 질문하였다. 그리고 각국 공관에도 장서를 보내, 일본공사가 나가모리의 황무지개척안을 외부에 조회하여 요구하였는데, 진황지는 인민들이 생활하는 바탕으로 한번 외인에 양여하면, 전국 강토를 모두 빼앗겨 인민이 참혹한 상태에 빠질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송수만이 衆議를 모아 강토를 지킬 방책을 정부에 개진했는데, 일본 경찰관이 총을 쏘고 몽둥이를 휘둘러 송수만·송인섭을 잡아다가, 일본 공사관에 구속하였다고 토로하였다. 그리고 각 공관이 만국공법을 위반하는 일본공사와 일본인의 침탈을 막아 우리가 전국 강토를 지키고 세계가 우의를 완비하길 바란다고 호소하였다.

보안회의 장서를≪대한매일신보≫는 논설에서 언급하고,≪황성신문≫은 이를 번역 게재함으로써,0335)≪皇城新聞≫, 1904년 7월 22일, 잡보<申報譯載>·<輔安會狀況>및 23일, 잡보<函訴各館>. 전국민의 여론을 더욱 고조시켰다.≪대한매일신보≫는 황무지청구를 반대하기 위해 각처에서 모인 공동회의의 연설자를 일본 공사관이나 영사·경찰서에서 포고 심문하는 것은 경솔한 행동이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보안회가 각부 대신에게 상서한 것은, 위급 존망의 시기에 國事에 힘쓰기를 권면하고, 보안회 회의에 참석하여 동포들의 의견을 두루 듣기를 건의한 것이라고 해명하였다.

보안회장 李裕寅은 21일에 일본공사관을 방문, 산림·천택의 진황지 개척 요구를 일본 정부도 알고 있느냐고 질문하자, 일본공사는 연일 한국인들이 집회하여 인심이 소란하니 해산하면, 진황지 요구안도 철회하겠다고 답변하였다.

보안회 활동이 격화되자, 일본은 당황하여 한국 정부에 보안회를 해산시키고 반대운동을 일체 금압할 것을 강경히 요구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보안회를 강제로 금압할 수 없고 설득하여 해산시키겠다는 대답으로 일관하였다. 외교나 경찰력으로 한국민의 반대투쟁을 저지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일본은 21일에 한국의 치안은 한국주차 일본군이 담당한다고 일방적으로 통고해 왔다. 하야시는 가까운 시일에 증가된 일병이 서울에 들어올 것이니, 親衛 제3대대 兵舍를 借給하여 일병을 居接케 하라고 외부에 요청하였다.0336)≪舊韓國外交文書≫7(日案 7), 226∼227·231∼232쪽.
≪皇城新聞≫, 1904년 7월 25일, 잡보<請借營居>.
그리고 헌병으로 하여금 서울을 엄히 경비하고 步兵과 砲兵을 성내로 진주시켜 官民을 위협하였다.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22일에 典洞 漢語學校에서 보안회 집회가 열렸다. 이유인이 전날 일본공사와 면담한 내용을 공표하고, 집회를 해산하였다가 황무지개척안을 철회하지 않으면 다시 집회하여도 늦지 않다고 설득하였다. 그러나 군중들은 모두 반대하여 큰 소리로 회장에게 복종하지 않겠다고 외쳤다. 원세성이, 일본이 진황지요구안을 철회하기 전에는 해산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잠깐 휴식하자고 제안하였다. 여러 사람이 연설하고 의견이 분분하였다. 이 와중에 일본 헌병과 사복 순사들은 보안회 핵심 회원들인 원세성·심상진·鄭寅琥·申學均 등 4인을 모두 포박해 가고, 보안회 문서를 모두 搜探하여 압수하고 보안회 회소를 폐쇄하였다.

지도부가 일본 군경에 붙잡혀 갔으나, 보안회는 굴하지 않고 반대투쟁을 계속 전개하였다. 일본 군대에 의해 한어학교가 폐쇄되자,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은 鍾街로 雲集하여 白山을 이루고 한바탕 연설로 일본을 성토하였다. 일본 헌병 수명이 말을 타고 六穴砲와 長刀를 좌우로 휘두르며 군중을 해산시키려 하자, 보안회 발기에 참여하여 적극 활동한 鄭淳萬은 “정순만이 여기 있으니 한 치의 땅도 가져가지 못하리라”고 소리치고, 일본 헌병에게 나아가, “너희들이 육혈포와 장도를 빼어들었으니, 나를 총으로 죽이던지 칼로 찔러 죽이라”고 소리쳤다. 헌병들은 어떻게 하지 못하고 장도를 칼집에 넣고 군중 사이로 다니기만 하였다.

저녁 8시 경에 騎隊副領 李泰來와 警務官이 칙령을 받들고 와서, 일본 관헌에 붙잡혀 간 사람들을 한꺼번에 석방케 할 것이라고 효유하고, 해산하였다가 명일 다시 모여도 늦지 않다고 하며 해산시키려 하였다.0337)≪皇城新聞≫, 1904년 7월 23일, 잡보<會長說明>·<日兵捕縛會員>·<更會鍾街>.
≪大東共報≫, 1909년 5월 5일,<鄭淳萬氏의 歷史>.
그러나 군중들은 더욱 격동하여 연설하며 통곡하였다. 저녁 9시경 司果 李範錫이 일장 연설을 하다가 日兵에게 붙잡혔다. 前主事 白樂衡이 연행해 간 이유를 힐문하다가 난투전이 벌어졌다. 일병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백낙형을 廣通橋 위에까지 끌고가 총자루와 주먹을 휘둘러 구타하였다. 밤 11시경 日兵 1개 분대가 다시 와서 집회를 모두 해산시키려 하였다. 끝내 듣지 않자, 일병은 총으로 申永均을 때려 상해를 입혀 사경에 이르게 하였다. 일병은 군중을 모두 몰아내고 몇 명을 헌병대로 붙잡아갔다. 22일 밤 11시경에 勅使의 권유로 보안회는 해산하였다. 보안회는 이때부터 표면상 집회투쟁은 보류하였다.0338)≪皇城新聞≫, 1904년 7월 25일, 잡보<白氏激忿>·<押人散會>·<政府告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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