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1. 무단통치체제의 확립
  • 2) 조선총독 지배하의 탄압기관
  • (2) 사법기관

(2) 사법기관

 1910년 10월 1일의 조선총독부 官制가 실시됨에 따라 그 칙령 제5호로써 통감부 재판소를 조선총독부 재판소로 개칭하였다. 그러나 총독부 재판소는 약간의 관할구역의 변경을 제외하고는 이미 그들 손으로 만들어진 3심 4급제의 구통감부 시대의 체제와 기능을 그대로 답습하였다(즉 고등법원 1개소:경성, 控訴院 3개소:경성·평양·대구, 지방재판소 8개소:경성·공주·함흥·평양·해주·대구·진주·광주, 지방재판소 지부 12개소, 구재판소 68개소 등 92개소),049)≪朝鮮總督府 施政二十五年史≫39∼40쪽.
≪朝鮮總督府施政年報≫(1910년), 93∼96쪽.
이와 같은 3심 4급의 司法組織은 1912년에 고등법원·履審法院·지방법원 3심 3급제로 개정되었다(3월 制令 제4호).

 전술한 재판소들은 민사 및 형사재판 외에 非訟事件을 장악했으며 동 재판소내에 검사국을 부설함으로 사법은 총독을 정점으로 하는 행정부의 일원적인 系線으로 구성되고 행정관서와 같은 위치에 있으며 판사의 신분보장이 없으므로 사실상 사법기관은 총독에 예속되고 있었다.

 재판제도 및 재판소는 일제가 합리적 사법을 가장하여 한민족을 탄압하기 위한 절차 및 시설이었다. 일본인 법관이 일본법 내지 총독부 법령에 의하여 한민족에게 일방적으로 중형을 내렸다. 법관은 이미 1909년에 일본인으로 대치되어 일본인 판사 192명에 한국인 판사는 겨우 88명에 불과했다. 1910년에는 일본인 판사 183명에 한국인 판사 71명, 일본인 검사 54명에 한국인 검사 6명 그리고 1912년에는 일본인 판사 161명에 한국인 판사 38명, 일본인 검사 54명에 한국인 검사 3명밖에 없었다.050)≪朝鮮總督府施政年報≫(1910년), 97쪽 및 (1912년) 63쪽.
J. A. Grajdanzev, Modern Korea. N. Y.:The John Day Co., 1944, p. 251.
또한 같은 법관이라도 민족차별이 심하여 한국인 판사는 일본인이 관련된 재판을 담당할 수 없었으며 민족차별폐지를 선언한 1920년 이후에도 합의부 재판부 구성에 있어 한국인이 裁判長이 된 일은 없으며, 일본인 재판장이 절대적인 권한을 갖고 있어 사실상 한국인 판사의 재판권은 박탈되어 있었다.

 사법제도 및 재판소는 한민족의 탄압과 수탈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으니 법관의 민족별 구성이 문제가 아니었다. 한국인은 일본의 법정에서 일본인 또는 일본인과 다름없는 소수의 친일한국인 판사에 의해 일본의 법률과 사법절차에 따라서 언어조차 이해되지 않는 재판을 받았다. 이러한 재판에서 한국인으로서 정의와 공평을 기대하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구나 한국인 중에 정치관계로 피검된 자가 있으면 사실여부를 불문하고 혹형을 가하여 거짓자백을 받으려 하고 친척이나 친구들까지 괴롭혔으며 간혹 정부비판이나 사회개혁에 언급한 사회인사에게는 치안법을 핑계로 악형을 가하였다.051) 朴殷植, 앞의 책, 33∼34쪽. 또 일반경제나 산업에 관하여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 소송이 제기되어 그 가격이 1,000원 이상이 되면 재판소는 반드시 총독에 먼저 보고하고 그 訓令을 기다려 심판을 했다. 쌍방의 잘잘못은 논하지 않고 단지 일본인의 신분과 명예를 존중하고 한국인의 재산과 일체의 권리를 희생하는 판결이 났다.052) 朴殷植, 위의 책, 34쪽.

 한국에 적용한 형률은 강도·강간에 사형을 규정하는 등 범죄의 성격에 비해 중형을 규정하였다. 한국인이 일단 검거되면 다수의 관련자를 만들어 재판에 이르기까지 장기간 심문하여 고통을 주었다. 가난한 한민족은 장기간에 걸친 심문과 재판과정에서 생존의 위협을 받았고 그간의 옥고와 고문이 체력과 의지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가정을 파멸시키는 일이 종종 있었다.053) 양영환,<일제의 침략기구>(≪한국사≫21), 44∼45쪽.

 대체로 가난한 한국인은 흔히 민사소송을 제기할 재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며 또 일본인 법원의 재판을 신임하고 있지도 않았다. 그 결과 한국인은 심한 경우에만 재판소에 가는 것이다. 그러나 형사사건에 있어서는 사정이 이와 다르다. 여기서는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정부가 재판을 제기한다. 그러므로 형사사건의 受理와 유죄판결건수가 매년 크게 증가하였다. 이것은 한국인 중에 죄를 범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과 함께 그만큼 일제의 한민족에 대한 여러 가지 형태의 탄압과 식민지배의 모순이 확대되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한민족의 항일투쟁이 격화되자 일제의 가중되는 탄압으로 매년 각종 범죄는 격증하였고 감옥은 계속 신축·증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감방수용능력은 이를 충족하지 못하였으며 격증하는 한국인 수감자의 차별과 학대로 그 대우는 가일층 악화되었다. 그 현상을≪朝鮮總督府施政年報≫는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표 5>참고).

1910 5,232
1911 7,021
1912 9,580
1913 9,993
1914 10,723
1915 9,796
1916 11,413
1917 12,496

<표 5>재감자수 각년도 감방수용인원 (매년 12월 현재)

 1910년에 이르러 대구감옥 및 청주·춘천 양 分監의 신축공사가 낙성되고 기타 각 本·分監의 증수축공사 준공으로 감방수용력 또한 매우 증가하여 入監人員의 증가가 해마다 현저함에도 불구하고 1910년 말에 있어 감방수용인원은 1평당 4.75(4人 7分 5厘)인이 되어 전년 말에 비해서 0.7인 이상이 감소되었다. 이와 같이 일부의 감옥은 설비가 아직 불충분함으로써 歐美人 기타 문명국인의 범죄자는 가급적 설비가 비교적 완전한 감옥에 수용하는 방침을 택했다.054)≪朝鮮總督府施政年報≫(1910), 102쪽.

 병합 후 조선총독부 치하에서 유례없이 가혹한 감옥제에 관한 법령이 제정·공포된 것이 1912년 3월이었다.055) 制令 제14호<朝鮮監獄令>, 府令 제33호, 同令 施行規則 제정 공포,≪朝鮮總督府施政年報≫(명치 45년, 대정 원년 合本), 76쪽. 동년에는 또 옥사를 신축해서 서대문감옥(경성감옥의 개칭)을 준공하고 직원도 증가해서 감옥수는 本監 9, 分監 13, 구치감 1, 출장소 5개소가 되고 직원도 수감자의 증가에 대비하여 典獄 9명, 간수장 78명, 간수 105명, 女監取締 31명, 기타의 증원이 있었다.056)≪朝鮮總督府施政年報≫, 78쪽.

 특히 주목할 것은 대개의 감방은 1평에 최대 5인이 원칙이나 15인에서 50인까지 수감하였다. 그러므로 눕고 앉을 수 없어 모두 서서 밤낮을 보냈다. 이 밖에도 식료·반찬의 質粗惡과 量低減 그리고 비인도적 작업환경과 의료시설 등 각종 학대를 받았으며 장기수로 기와공장에서 작업을 하던 사람 중 10분의 1은 각종 학대로 죽어 가고 있었다. 병합 이후 수감자는 10%씩 증가했다.057) 朴殷植, 앞의 책, 35쪽 참고.

 이와 같이 일본은 감옥을 계속 증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절대면적이 부족하여 고민하였음이 그들의 시정보고를 통하여 역력히 드러나고 있다. 일본은 그 대책으로 가석방·집행유예·恩赦 등 궁여지책을 구사했으나 수형자는 매년 계속해서 증가하여 갔다. 병합 전후부터 1917년까지의 기간중≪조선총독부시정연보≫에서 보고된 在監者 통계는 애매하고 불명확한 점이 있으나 대체로<표 5>와 같다.058)≪朝鮮總督府施政年報≫1909·1910·1912·1913·1914·1915·1916·1917, 監獄欄 참고.

 인구 1,600만 명(1909년 현재 13,091천 명, 1917년 현재 16,669천 명)밖에 안되는 나라에 헌병경찰의 준엄한 탄압에 추가해서 형무소가 본감 9, 분감 13, 구치소 1, 출장소 3개소나 설비되어 한민족에게는 차별적인 각종 가혹한 탄압이 자행되었다. 이와 같이 일제는 유례가 드물게 수감자를 차별하고 학대하였기 때문에 외국인의 시찰을 기피하였다. 외국인의 감옥참관은 반드시 총독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고 시찰요구를 거절할 수 없을 경우엔 시일을 끌며 그럴듯하게 가장을 한 후 수일이 경과해야만 시찰을 허락하였다. 모든 가장을 다하므로 불법·학대·처참·혹독의 실상이 외국인의 눈에 띌 수가 없었다.059) 박은식, 앞의 책, 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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