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3. 경신참변과 자유시사변
  • 2) 경신참변

2) 경신참변

 무장독립군을 비롯한 간도일대의 항일독립운동세력을 ‘초토화’할 목적으로 투입된 일본군은 상술하였듯이 독립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소기의 ‘성과’를 거두는 데 실패하였다. 일본군 북만주 파견대 역시 나자구 老母楮河를 비롯해 몇 군데서 장정중인 독립군과 교전을 벌였지만 역시 뚜렷한 전과를 올리지 못하였다. 일본군 보고서에서 “(일본군은 독립군측에) 섬멸적 타격을 주지 못하였다. (또한 독립군의) 중심인물로 지목된 자의 대부분을 놓쳐 버렸다”라고 한 대목은 완전히 실패로 귀착된 일본군의 ‘초토화작전’ 결과를 생생히 입증해 주고 있는 것이다.499)≪間島出兵史≫上(金正柱 編,≪朝鮮統治史料≫2, 韓國史料硏究所, 1970), 106쪽.

 독립군에 대한 탄압이 이처럼 실패로 귀착된 것은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결국 한인사회가 독립전쟁에 대해 물심 양면에서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성원한 결과이기도 하다. 곧 현지 한인사회가 무장독립군의 초석으로 그 기능을 충실하게 수행한 셈이었다. 그러므로 간도를 침략한 일본군은 독립군 탄압에 심혈을 기울이는 한편, 현지 한인사회에 대해서는 초토화 전략을 구사하게 된 것이다. 일제의 무장군대가 비무장 민간의 한인사회에 대해 인적·물적 양면에서 무참히 짓밟은 만행, 곧 경신참변은 ‘인류사의 저주받을 한 페이지’로 기록될 것이다.

 간도 한인사회에서 자행된 경신참변은 일제 침략군에 의해 1920년 10월초 부터 12월까지 3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반복되었다. 일본군은 간도 도처에서 한인 촌락을 습격 방화하였다. 각지 촌락의 무장하지 않은 한인 주민들은 침략군에 의해 임의로 ‘불령선인’으로 지목되어 참혹하게 살해되었다. 이러한 만행은 일본군대가 간도에서 퇴각하는 1921년 5월까지 도처에서 자행되고 있었다.

 일제의 ‘조선군’ 19사단 예하의 주력부대 가운데 하나인 키무라(木村) 支隊는 1920년 10월 20일 온성 부근에서 두만강을 건너 간도 침략을 개시하였다. 이 부대는 북간도 한인사회의 독립운동 근거지와 마을들을 초토화시키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10월 22일 대한군정서의 근거지인 왕청현 西大坡와 十里坪 일대를 휩쓸었던 것도 이 부대였다. 십리평에 있던 대한군정서 병영과 7개 동의 사관연성소 건물이 이때 소각되었다. 이어 이 부대는 百草溝와 依蘭溝, 그리고 八道溝 등지에서 150명의 무고한 한인 양민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500)리광인,<‘경신년 대토벌’과 연변 조선족 군중의 반‘토벌’투쟁>(≪한국학연구≫4,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1992), 125쪽.

 10월 30일에는 경신참변을 상징하는 사건인 獐巖洞慘變이 일어났다. 연해주로부터 침입한 일본군 제14사단 제15연대 제3대대장 오오카(大岡隆久)가 인솔한 77명의 병력이 용정촌 동북 25리 지점에 위치한 장암동으로 침입해 주민 33명을 참혹하게 살해하고 가옥·학교·교회 등을 불태워 마을을 초토화하였다.501)車成瑟,<獐岩洞慘案에 關한 硏究>(≪獨立運動史의 諸問題≫, 범우사, 1992), 202∼204쪽. 40여 호 규모의 장암동은 이주 한인촌락으로 주민의 대부분은 기독교 신자였다. 일본군은 주민 가운데 성인남자 33명을 한 곳에 집결시켜 처참히 살해하고 시신까지 불태우는 야수적 만행을 자행하였다. 만행 다음날 캐나다 북장로회 선교사 푸트(富斗一, Foote. D. D)와 용정에서 제창병원을 경영하던 영국 선교사 마틴(閔山海, Dr. S. Martin)은 함께 장암동을 방문해 참변의 진상을 조사하고 참혹한 광경을 사진에 담아 일제의 만행을 세상에 폭로할 수 있었다. 마틴은 자신이 조사한 참변의 정형을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기술하였다.

날이 밝자마자 무장한 일본 보병부대는 耶蘇村을 빈틈없이 포위하고 골 안에 높이 쌓인 낟가리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는 전체 촌민더러 밖으로 나오라고 호령하였다. 촌민들이 밖으로 나오니 아버지고 아들이고 헤아리지 않고 눈에 띄면 사격하였다. 아직 숨이 채 떨어지지 않은 부상자도 관계치 않고 그저 총에 맞아 쓰러진 사람이면 마른 짚을 덮어놓고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불태웠다(姜德相,≪現代史資料≫28, 朝鮮 4, 676쪽).

 장암동참변 외에도 한인학살의 사례는 허다하다. 한인 마을마다 10여 명 전후의 희생자는 예사였을 정도였다. 이씨 집성촌이었던 30여 호 규모의 연길현 의란구 南洞의 경우에도 마을 주민 거의 전부가 몰살당하였다. 마을의 어느 네 형제는 자기 집과 함께 한꺼번에 焚殺당하고 말았다.502)≪獨立新聞≫, 1921년 1월 27일,<墾北來信>. 또 연길현 臥龍洞의 교사였던 鄭基善은 일본군에게 연길현 九水河 新興洞으로 끌려가 심문을 당하게 되었다. 그는 일본군의 고문에 의해 안면 피부가 칼로 벗겨지고 안구가 빠져 누군지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고기덩어리’가 되고 말았다.503)≪獨立新聞≫, 1921년 2월 5일,<間島慘狀別報>. 뿐만 아니라 연길현 팔도구에서는 어린애 네 명이 일본군에게 처참히 刺殺당했고, 연길현 약수동에서도 사람을 죽여 불에다 태운 후 그 시체를 다시 강물에 던졌다. 또 일본군은 부녀자를 강간한 후 살해하였다. 연길현 小營子에서는 25명의 부녀자가, 그리고 이도구(현 화룡현 서성향 소재지)에서도 20여 명의 부녀자가 강간당하였다.504)리광인, 앞의 글, 127쪽. 심지어는 2∼3세 아이를 창끝에 꿰어든 일본군이 고통으로 울부짖는 비명을 들으며 이를 즐기는 사례조차 있었다. 민족주의 사학자 박은식은 한인이 당한 참변의 구체적 실상과 사례를 아래와 같이 적나라하게 기술함으로써 일제의 야수적 죄악상을 규탄 고발하였다.

아아! 세계민족이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자 수없이 많지만, 어찌 우리 겨레처럼 남녀노소가 참혹하게 도살을 당한 자 있을 것이리오. 역대 전쟁사상 군사를 놓아 살육 약탈한 자 수없이 많지만, 저 왜적처럼 흉잔 포학한 자는 들은 적이 없다. … 저 왜적이 우리 서북간도의 양민동포를 학살한 일 같은 것이야 어찌 역사상에 있었던 일이겠는가. … 각처 촌락의 민가·교회·학교 및 양곡 수만석을 모두 불태웠다. 남녀노소를 총으로 쏴 죽이고, 칼로 찔러 죽이고, 매질하여 죽이고, 포박하여 죽이고, 주먹으로 때려 죽이고, 발로 차서 죽이고, 찢어 죽이고, 생매장하고, 불에 태우고, 가마에 삶고, 해부하고, 코를 꿰고, 옆구리를 뚫고, 배를 가르고, 머리를 베고, 눈을 파내고, 가죽을 벗기고, 허리를 베고, 사지를 못박고, 손발을 잘라서 인류로서는 차마 볼 수 없는 일을 저들은 오락으로 삼아 하였다. 우리 동포는 혹은 할아버지와 손자가 함께 죽고, 혹은 부자가 함께 참륙당하고, 혹은 남편을 죽여 아내에게 보이며, 혹은 형을 죽여 아우에게 보이며, 혹은 喪制로 魂魄 상자를 품고 난을 피하다가 형제가 함께 죽음을 당하기도 하고, 혹은 산모가 기저귀에 싼 어린애를 품고 화를 피하다가 母子가 같이 명을 끊었다. 그 밖에 허다한 일은 이루 다 적을 수 없다(박은식,≪韓國獨立運動之血史≫, 上海:維新社, 1920, 165∼166쪽).

 이와 같은 한인사회의 끔찍한 참변은 북간도에서만 자행된 것이 아니다. 서간도에서는 이른바 중일합동수색이 실시되던 1920년 5∼8월 4개월에 걸쳐 우에다(上田)부대와 사카모토(坂本)부대 등의 일본군에 의한 한인학살이 자행되었다. 그 뒤 서간도를 침범한 관동군 소속의 스기야마(杉山) 보병대와 기병연대에 의해서도 북간도에서와 같은 양상으로 참변이 반복되었다. 서간도 가운데서도 특히 興京縣 旺淸門과 寬甸縣 일대에서 피해 정도가 극심해 왕청문에서만 305명이, 그리고 관전현 일대에서는 총 495명의 한인이 참화를 입었다. 왕청문의 西堡교회당과 江南교회당, 그리고 민족교육기관인 三成學校도 이때 일본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어 통화현과 유하현의 여러 한인 마을에서도 일본군의 만행에 의해 ‘屍山血河’를 이루었다고 한다.505)≪獨立新聞≫, 1920년 12월 18일,<旺淸門附近의 慘狀>.

 러시아 연해주지방에서도 1920년 4월부터 일제의 블라디보스톡 주둔군(浦潮軍)과 남부우수리 파견대에 의해 한인 참살이 자행되었다. 연해주 각지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은 4월 초부터 볼셰비키를 탄압하는 한편, 블라디보스톡(海蔘威)·하바로프스크(花發浦)·우수리스크(蘇王嶺)를 비롯한 연해주 도처에서 한인 민족운동 대탄압에 돌입해 마을을 습격 방화하고 한인들을 학살하였다. 4월 5일 일본군의 포위공격을 받은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은 초토화되었다. 신한촌에서만 300명 이상의 한인이 일본군에게 체포당했으며, 가옥은 물론 한민학교와 신문사 건물도 소실되었다. 블라디보스톡뿐만 아니라 우수리스크 거주 한인들 역시 참화를 입었다. 연해주 한인사회의 출중한 지도자이며 임시정부 재무총장에 추대되기도 한 崔在亨이 金利稷·嚴周必·黃景燮 등과 함께 참살된 것도 이때였다. 한편 4월 6일 일본군의 총공격을 받은 하바로프스크에서도 20명 이상의 한인이 희생되었다.506)김승화 저, 정태수 역,≪소련 韓族史≫(대한교과서주식회사, 1989), 113∼114쪽. 이것이 이른바 연해주 4월참변으로, 연해주 도처에서 한인 70여 명이 희생되었던 것이다.

 자료상의 한계로 경신참변 당시 간도 한인사회가 입은 인적·물적 피해의 규모와 실상을 명확히 밝히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이 점을 감안하고 상해 임시정부의 간도 파견원이 보고한 1920년 10∼11월 두 달간의 통계만 보더라도, 3,469명이 희생되고 170명이 체포되었으며 민가 3,209개동, 학교 36개교, 교회당 14개소, 곡물 54,045섬이 소실된 것으로 파악된다.507)≪獨立新聞≫, 1920년 12월 18일,<西北間島同胞의 慘狀血報>. 이 통계는 1920년 10월 9일부터 11월 30일까지 조사된 내용으로, 10월 5일부터 11월 23일까지 조사기록을 제시한 박은식의≪韓國獨立運動之血史≫통계치와는 다소간 편차를 보이고 있다.≪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는 희생자 총수가 3,106명으로 집계되어 있다. 이 통계가 11월 이후 이듬해 5월까지의 피해상황을 집계하지 않은 수치임을 감안할 때, 일본군 침략 기간 동안 입은 참화의 전체 규모는 이 수치를 훨씬 상회할 것이다.508)이런 맥락에서 경신참변 전기간 동안 한인 1만 명 정도가 희생된 것으로 추정하는 경우도 있다(愼鏞廈,≪韓民族獨立運動史硏究≫, 을유문화사, 1985, 510쪽). 만행 실상을 극도로 축소한 일본군측의 자료에서조차도 한인 494명을 살해하고, 민가 531개동, 학교 25개교를 소각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509)≪間島出兵史≫上, 108쪽.

 일제의 대륙침략 前端으로 야기된 일본군의 간도침범과 그로 인한 경신참변은 일제에게 철저히 유린된 한민족의 고통을 상징하는 생생한 한 증좌가 된다. 또한 경신참변은 국망 직전 일제가 의병 등 항일세력 초토화전략으로 감행한 소위 남한대토벌작전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일제가 남한대토벌작전을 완료하고 난 뒤 한국병탄을 실현했듯이, 간도 한인사회의 저항세력에 대한 초토화전략을 감행함으로써 3·1운동으로 격동한 한민족의 독립열망을 철저히 분쇄하려 했던 것이다. 경신참변은 이런 시각에서 역사적으로 조망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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